소화 본당

小花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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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소속 본당. 대구시 남구 대명3동 2301-2소재. 1972년 10월 28일 남산동(南山洞) 본당 · 내당동(內唐洞) 본당 · 대명동(大明洞)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 립되었으며, 주보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설립 당시의 이름은 '성당동 본당'이었으나 1975년에 '소화 본당' 으로 바꾸었다. 관할 구역은 대명3 · 7동 전 지역과 대명2 · 4동, 두류1 · 2동, 성당1 · 2동 일부 지역. 〔교세〕 1978년 2,167명, 1983년 2,758명, 1989년 3,451명, 1993년 3,680명, 1997년 3,610명. 〔역대 신부〕 초대 김경식(金烱式) 보니파시오(1972. 10~1975. 1), 2대 신상조(申相祚) 스테파노(1975. 1~1979. 11), 3대 임청(林淸) 베드로(1979. 11~1981. 7), 임시 이종흥(李鍾興) 그리
산도(1981. 7~9), 4대 신현옥(申鉉玉) 치릴로(1981. 9~1987. 1), 5대 이성우(李聖雨) 아킬로(1987. 1~1990. 2), 6대 이성배(李成培) 요한(1990. 2~1991.6), 7대 김영우(金 英佑) 그리산도(1991. 6~1994. 8), 8대 서정섭(徐正燮) 바르톨로메오(1994. 8~1999. 6), 임시 김상조(金相祚) 대건안드레아(1999. 6~현재) .
소화 본당의 설립은 사회 복지 사업을 위해 독일에서온 선교사 옥잉애 원장이 1965년 대명동에 설립한 '소화 보육원' 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보육원 내에 소당이 마련되자 남산동 본당 주임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가 매주 목요일 이 지역 신자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해 주었던 것이다. 당시 미사에 참례한 신자수는 약 60 명 가량이었으며, 예비 신자 교리반도 운영되어 그 해에 30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 후 1972년에 소화 보육원이 성당동 5-4번지로 옮겨 가면서 보육원 건물 2층(135평)을 성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본당 설립 논의가 가시화되어 1972 년 10월 28일에 소화 본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주임 김경식 신부는 1974년 2월에 수녀원으로 사용할 주택을 매입하였으며, 1976년 11월 1일에 현 성당 부지 366평 을 매입한 2대 주임 신상조 신부는 독일 사회 복지 단체의 지원으로 이듬해 5월 22일 공사에 착수하여 11월 25일에 이를 완공한 뒤 1978년 1월 8일 성당(290평) 봉헌 식을 거행하였다.
성당을 완공한 뒤 각종 신심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던 중 1981년 7월 20일 3대 주임 임청 신부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이종흥 신부가 같은 달 25일에 임시로 부임하였으며, 4대 주임 신현옥 신부 때인 1982년 6월 13일에는 관할 구역 조정에 따라 송현동 본당으로 202명을 전출시켰다. 본당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 가운데에서도 특히 엘리사벳회와 성모회는 매년 피정을 겸해 소록도 나환우들을 방문 위로하는 등 그 활동이 매우 두드러졌다. 그리고 1989년 12월 18일에는 성당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고, 1990년 4월 10일에는 교리실과 유아 교육실을 마련한 데 이어 이듬해 2월 17일에는 도서실을 마련하였다. 또 1995년에는 '복음을 따라 사는 가정' 이라는 주제 아래 가정 성화를 위한 묵주 기도를 봉헌하였고, 매월 마지막 주일을 가정의 날로 정해 온 가족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였다. 이후 1997년에는 본당 설립 25주년을 기념하여 체육 대회 · 역사 자료 전시회 · 바자회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1999년 2월 10일에는 '인성회의 집' 을 맡아 운영하는 등 나눔 실
천 운동에도 동참하고 있다. → 대구대교구 ; 남산동 본당 ; 내당동 본당 ; 대명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소화 성당 25년사》, 소화 천주교 회, 1997/ 《대구대교구 총람》, 천주교 대구대교구, 1986/ 《빛》 175호(1997. 11), 천주교 대구대교구, pp. 104~107.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