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안드레아. 충청남도 홍주(洪州)에서 부유한 평민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 서부터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였다. 또한 성품이 너그러워 많은 외교인들과 교우(交友) 관계를 맺었으며, 그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항상 도움을 베풀곤 하였다. 장성하 여 조선의 두 번째 중국인 선교사인 유 파치피코(중국명 余恒德)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중, 고을 수령의 명령으로 1838년에 가족과 함께 체포된 그는 고을 수령이 돈을 뜯어낼 목적으로 자신들을 체포했음을 알고 거짓으로 배교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은 물론, 함께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까지 속량금(贖良金)을 내주고 풀려 났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손경서는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에 대한 보속으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피신시킬 장소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앵베르 주교를 수원 송교(松橋, 현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송교리)에 마련해 둔 가옥에 은신시켰으며, 얼마 뒤에는 극심한 박해로 조선에서의 활동에 많은 위험이 있자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와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를 불러오라는 앵베르 주교의 지시에 따라 이들 두 신부를 배로 송교까지 데려오기도 하였다.
박해의 여파가 점차 심해지고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자 손경서는 가족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다가 숨어 있던 가족들이 대신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모든 가산을 잃게 되자, 자신 때문에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관가에 자수하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심한 고문의 고통을 이기지못하고 배교하였지만, 그 무렵 형조 판서가 바뀜에 따라 그의 배교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죽음을 두려워한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친 후 배교를 철회하였으며, 치도곤(治盜棍)을 70대씩 두 차례나 맞은 후, 1839년 12월 21일 교수형을 받고 4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기해박해)
※ 참고문헌 <기해일기>1《달레 교회사》 中. [편찬실]
손경서 孫 - (1799~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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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