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재 孫聖載(1877~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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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재 신부.

손성재 신부.

서울대교구 소속 신부. 세례명은 야고보. 1877년 4월 4일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공소 회장을 지낸 손 바오로와 이 마리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8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의 부친은 코스트(E.J.G. Coste, 高宜善) 신부를 도와 나가사키(長崎) 인쇄소와 서울의 인쇄소에서 일하면서 공소 회장을 겸임할 만큼 교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는데 그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사제직을 갈망하게 되었다. 이에 1888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 1905년 4월 8일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황해도 봉산군(鳳山郡)의 검수(劍水) 본당(사리원 본당의전신)에서 첫 사목 활동을 시작하면서 봉산 · 서흥(瑞興) · 평산(平山) 등지까지 전교하였다. 이 무렵 뛰어난 라틴어 실력으로 1906년부터 마태오 복음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1910년에 나온 4복음서의 한글 번역서인 《사사성경》(四史聖經)의 발간에 기여함으로써 성서 국역 사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1911년 6월 사제 연례 피정이 끝난 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德村里)로 부임한 손성재 신부는, 이 지역이 사목 및 전교 활동에 어려움이 많자 한옥 성당을 매각한 후 용문면 마룡리(馬龍里, 마내) 353번지로 이전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6년 동안 경기도 양평(楊平)을 비롯한 포천(抱川) · 여주(驪州) 일대와 강원도 화천(華川) · 양구(楊口) · 춘천(春川) 등지의 여러 공소들을 관할함으로써 교세 신장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1927년 초 폐결핵 증세가 나타나 그 해 여름부터
서울의 주교관에서 휴양하였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같은 해 11월 19일 사망하여 용산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경향잡지》 626호(1927. 11), pp. 518~521/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수원교구 30년사》, 천주교 수원교구,1993.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