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르트(Sarthe) 주의 르망(Le Mans) 교구에 있는 작은 마을로, 19세기 이후 그레고리오 성가 부흥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베네딕도회 솔렘 연합회가 있는 곳. '솔렘' 이라는 명칭은 오늘날까지 이 연합회와 이곳에서 시작된 그레고리오 성가 부흥 운동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솔렘 연합회의 창설〕 본래 이 수도원은 라 쿠튀르(La Couture) 베네딕도회 아빠스좌 수도원에 속한 수도원(pri-oratus)으로서 1010년에 사블레(Geoffroy de Sable)에 의해 설립되었다. 12세기에는 파트리(G. Patry) 원장 신부가 수도원 둘레에 높은 담을 세울 정도로 호황을 누렸으나, 1375년 이후 영국과의 백년 전쟁으로 피해를 입기 시작하여 1425년에는 수도원이 점령되고 파괴되기까지 하였다. 이후 다시 복구되어 르네상스 시기에는 11세기에 세워진 성당이 재건축되는 등 웅장한 수도원의 면모를 드러냈다. 하지만 1556년부터 1773년까지 이 수도원은 위탁 · 운영되었는데, 1664년부터는 베네딕도회 생 모르 연합회의 관리하에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에 수도원이 매각되어 1791년에 수도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1833년 르망 교구 소속의 게랑제(Prosper Louis Pascal Guéranger, 1805~1875) 신부가 동료들의 도움으로 버려진 이 수도원을 구입한 뒤 5명의 신부들과 함께 베네딕도회 규율을 지키면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솔렘 수도원은 1837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에 의해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게랑제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임명되었다. 이 수도원은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성장하여 베네딕도회의 새 연합회(congregaio)가되었다.
〔솔렘 악파의 형성과 변천〕 게랑제는 《전례 제도》(Ins-titutions Liturgiques, 1840~1852)를 저술하면서 복고적인 완벽한 수도 생활을 복원하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전통적 형태의 수도 생활 복원은 시간 전례의 개혁과 재건을 통해 가능하고, 이것은 또 시간 전례에서 실용적으로 활용되는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의 출판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에 편찬실을 두고 가장 오래된 수사본(手寫本)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새로이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이 작업을 할 때 그는 르망 교구의 주교좌 성당 참사 위원인 공티에(A. Gontier)의 도움을 크게 받았는데, 그의 《단선율 성가 이론 교본》(Méthode Raisonnée de Plain Chant, 1859)에는 솔렘 악파의 그레고리오 성가 이론의 중요한 요소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낭송적 음률(oratorius rhythmus) 이론' 으로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리듬은 절대로 라틴어 가사의 리듬에 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게랑제와 함께 1856년에 조시옹(Paul Jausion, 1834~1870), 그리고 1860년부터는 포티에(Joseph Pothier, 1835~1923)라는 수도승들이 이 일에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중요한 수사본들을 복사하고 커다란 비교판을 설치하여 가장 좋은 자료들을 확인함으로써 그레고리오 성가 선율을 복원하는 일에 중요한 학문적 토대를 형성하였다. 그 결과 1864년에 프랑스 베네딕도 수도원 성당 합창단의 《성가 지침서》(Directorium Chori)가 발간되었다. 조시옹은 이를 위하여 13세기에 사용되던 사각 음표를 이용해서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를 만들었다. 그리고 포티에와 조시옹은 그레고리오 성가 교과서인 《정통 그레고리오 음악》(Les Mélodies Grégoriennesd' Apés la Tradition)을 만들었는데, 이 책은 조시옹이 사망
한 지 10년 뒤인 1880년에 포티에의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인 동가론(同價論, aequa-lismus)은 "모든 음표는 같은 길이를 갖는다"는 이론으로, 이는 귀도(Guido d'Arezzo, 992?~1050?)의 음악 이론서인 《음악 기술법》(Micrologus de Disciplina Artis Musicae, 1025~1026)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불변하는 시간 길이를 갖는 단위 음표를 그레고리오 성가의 음률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엄격한 수학적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음절에 악센트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자연스럽게 혹은 상대적으로 긴, 혹은 상대적으로 짧은 음 길이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이 그레고리오 성가의 연주법은 급속히 다른 수도회로 전파되었고, 킨레스(A. Kienles)는 이 교과서를 1881년에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바티칸 판 그레고리오 성가 : 제2대 아빠스 쿠튀리에(Charles Couturier, 재임 1875~1890) 때 솔렘 악파와 교황청 간에 약간의 갈등이 일어났다. 즉 1882년에 귀도를 기념하는 교회 음악 대회가 이탈리아의 아레초(Arezzo)에서 개최되었는데, 독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푸스텔(Pustet) 출판사에서 만든 그레고리오 성가집과 솔렘에서 막 출판 중에 있던 그레고리오 성가집 중에서 어떤 성가집을 교회의 공식 성가집으로 인정해야 되는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왜냐하면 푸스텟 성가집은 1868년 이래 교황청과 30년 동안의 성가집 발간 계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논쟁에서 솔렘 악파가 패하여 솔렘의 성가집은 교황 레오 13세(1878~1903)에 의하여 프랑스의 베네딕도 수도원 밖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레오 13세 교황은 1901년에 전례적 선율의 복구에 관한 솔렘 연합회의 연구에 관한 서류를 남겼고, 후계자인 교황 비오 10세(1903~1914)는 착좌 3개월 만에 성음악에 관한 훈령인 자의 교서 <트라 레 솔레치투디니〉(Tra sollecitudini, 1903. 11. 22)를 발표하면서 전례 중에는 고대로부터 전해 오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사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레겐스부르크의 그레고리오 성가집 대신 바티칸 판(Editio Vaticana, 1908)을 출판하였을 때에는 솔렘 악파를 이 작업에 참여시켰다.
음률 이론과 논쟁 : 제3대 아빠스 들라트(Paul Delattes,1848~1937)의 재임 시기(1890~1937)에는 프랑스 제2 공화국의 반교회적인 입법과 박해로 인해 국외로 추방되어, 1908년부터는 영국 해협에 있는 와이트(Wight) 섬의 카르(Quar) 수도원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솔렘 악파의 학자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수사본 기호와 음률적 해석에 관한 논쟁에 휘말렸고, 전통적인 그레고리오 성가 연주에서 공식적으로 두파가 베네딕도회 내에 생겨남으로써 이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그 후 포티에의 협조자였던 모크로(André Mocquereau, 1849~1930)가 《음악 기호학》(音樂記號學, Paléogra-phie Musicale, 약칭은 PalMus)이라는 책을 통하여 그레고리오 성가의 새로운 음률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마침'낭송적 음률 이론' 을 주장하던 포티에가 생 방드릴(St.Wandrille)의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어 떠나자, 모크로는 음표를 둘 혹은 셋씩 묶어서 한 음률 단위를 정하자는 '맥동 이론' (脈動理論, ictus theory)을 수도원 내에서 적용시키기 시작하였고, 이로써 두 음률 이론 간의 차이는 더 벌어지게 되었다.
바티칸 판 성가집을 출판하기 위한 준비 학술위원회 회장이 포티에였는데 이 위원회에서 개최한 회의에 모크로가 솔렘의 유일한 대표자로 참석하게 되었다. 당연 히 둘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바티칸 판 성가집에 음률첨가 표시를 하자는 모크로의 제안은 기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렘 악파는 이런 음률적 표시를 고집하 였고, 한국의 신학교에서도 사용되었던 《통상 성가집》 (Liber Usualis, 1903) 등에 리듬 추가 표시를 위하여 세로로 된 짧은 금(ictus, episema recta) , 약간 늘림 표시인 가로금(episema tranaversa), 한 음이 약간 긴 것을 표시하는 부점(附點, punctum mora) 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표시들은 학적 및 법률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 후 모크로는 두 권으로 된 《그레고리오 성가의 조화》(Le Nombre Musical Grégorien, 1908, 1927)를 발간하였으며, "보충판에서, 음률 표시는 사적인 권위에 따라서 첨가될 수 있다" (editiones in subsidium scholarum, signis rhythmicis privata auctoritate ornatae)는 교황청 발표가 있자 솔렘 악파는 1911년에 자신들의 판을 바티칸 판과 병용할 수 있다는허락을 얻어냈다.
바티칸 판의 출판으로 학술위원회는 해산되었으며, 1913년에 바티칸 판의 발전을 위해 다시 새로운 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는 솔렘 악파의 도움을 받도록 한 규정에 따라 여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새로 구성된 이 위원회에서는 1926년까지 로마에서 작업을 계속하여 <파스카 삼일과 예수 성탄 대축일을 위한 시간 전례>(1922)와<조과집>(Matutinum, 1926)을 완성하였고, 새로 제정된 축일들의 기도문들에 많은 옛 성가 선율을 찾아 접목시켰다. 한편 솔렘 연합회는 제4대 아빠스 코지앙(Germain Cozien)의 재임 때(1920~1959)인 1922년에 솔렘으로 귀환하였으며, 모크로가 사망한 다음에는 가자르(Joseph Gajard, 1885~?) 수사가 솔렘의 성가대 지휘자로 그 학문적인 맥을 이었고, 현재는 클레르(Jean Claire) 수사가 그 맥을 잇고 있다.
〔한국에서의 영향〕 한국의 그레고리오 성가 전통도 역시 솔렘 악파의 맥을 따르고 있다. 이는 솔렘 출신의 카르딘(E. Cardine)이 로마 교황청 소속의 음악 학교인 '무지카 사크라' (Musica Sacra)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가르쳤고, 여기에서 한국 최초의 교회 음악 전공자인 이문근(李文根, 1917~1980) 신부가 교육을 받은 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회 음악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솔렘의 '맥동 이론' 은 다만 하나의 가설로 여겨져 그 영향력을 잃어 가는 추세이다.(→ 게랑제 ; 그레고리오 성가)
※ 참고문헌 《MGG》/ L. Robert, Solesmes, Abbey of, 13, p.418/ P. Combe, Solesmes, Music of, 《NCE》 13, pp. 418~419/ Godehard Joppich, Der Gregoriamische Choral in Geschichte und Gegenwant(강의록)/ Histoire du monastère, Site officiel de l'Abbaye de Solesmes. [白南容]
솔렘
〔프〕Solesmes
글자 크기
7권

솔렘 수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