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히〕שְׁלֹמֹה · 〔그〕Σολομών · 〔라〕Salomon · 〔영〕Solo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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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독일 쾰른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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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독일 쾰른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이스라엘의 세 번째 임금으로, 다윗과 바세바 사이에서 태어나 다윗 왕의 뒤를 이어 기원전 972년부터 933년까지 약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린 인물.
〔이름과 가족〕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구약성서에 300여 번, 신약성서에는 11번 언급되어 있다. 솔로몬은 다윗의 열 번째 아들(2사무 3, 2-5 : 5, 14-16)이며, 어머니 는 바세바였다(2사무 12, 24 : 1역대 3, 5에서는 '밧슈아' ).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평화' 를 의미하는 동사 '살렘' (שָׁלֵם)과 명사 '샬롬' (שָׁלוֹם)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1역대 22, 9)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대신함' (replacement)이란 의미를 지닌 '실렘' (שִׁלֵּם)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려는 학자들도 있다. 예언자 나단은 솔로몬을 '야 훼의 사랑하는 자' 라는 뜻을 가진 '여디디야' (יְדִידְיָהּ)로 불렀다(2사무 12, 25). 솔로몬에게는 700명의 후궁과 300명의 첩이 있었고(1열왕 11, 3), 자녀들로는 아들 르 호보암과 두 딸 다밧(1열왕 4, 11), 바세맛(1열왕 4, 15)의 이름이 성서에 나타난다. 솔로몬은 대략 4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그에 관한 자료는 주로 신명기 사가의 자료인 열왕기 상 1-11장과 역대기 사가의 자료인 역대기 하 1-9장에서 찾을 수 있다. 역대기 하 1-9장에 나타나 있는 솔로몬 기사에는 열왕기 상 1-11장에 언급되어 있는 많은 기사들이 제외되어 있다. 제외된 부분들에는 솔로몬의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많은데, 이는 다윗 다음으로 솔로몬을 왕들의 모범으로 제시하려고 한 역대기 사가가 의도적으로 이러한 기사들을 없앤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의 등극과 행적 조직〕 다윗 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를 두고 왕궁 고위 관직자들이 두 편으로 갈라졌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으나(1역대 3, 1-2) 형인 암몬과 압살롬이 죽은 다음, 살아 있는 왕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사령관 요압과 사제 에비아달의 후원을 얻어 엔로겔 근방에서 스스로 왕으로 선포하였다(1열왕 1, 5-10). 그러자 예언자 나단, 사제 사독, 용병 대장 브나야 등 솔로몬의 편에 선 사람들은 바쎄바를 내세워 다윗을 설득시켜 솔로몬이 후계자라는 승낙을 받아 냈다. 이렇게 하여 솔로몬은 다윗을 이어 다윗 생전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였다(1열왕 1, 11-40).
솔로몬은 왕이 된 다음 정적인 형 아도니야, 사령관 요압, 사울 가문의 시므이를 죽이고, 에비아달은 사제직을 박탈한 후 그의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하였다. 이렇게 솔로몬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반대파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확고히 하였다.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추방한 솔로몬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고위 관직에 자신을 지지해 준 공신들과 그의 자녀들을 앉혔다. 사독과 그의 아들 아사리아는 사제가 되었고, 용병 대장 브나야는 사령관이 되었으며, 나단의 두 아들 가운데 아자리야는 지방관들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사붓은 사제이자 왕의 친구가 되었다(1열왕 4, 1-6). 중앙정부의 조각을 완료한 솔로몬은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이스라엘 국토를 12개 행정 구역으로 재편성하고 각 지역에는 지방관을 두었다(1열왕 4, 7-19). 지방관들 중에는 솔로몬의 사위 벤아비나답과 아히마즈도 포함되었다. 이 지방 행정 조직은 세금 및 궁중 식량을 조달하고 전통적인 지파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켜 모든 권력을 솔로몬이 장악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흥미로운 일은 이 지방 조직에 유다 지파의 지역을 제외시킴으로써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만 이 과중한 부담을 담당하게 되어 북쪽 지파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는 사이다. 이 불만은 결국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다.
〔긍정적인 역할과 활동〕 건축과 군사 시설 : 솔로몬은 7년에 걸쳐 성전을 지었는데(1열왕 6, 1-38 ; 7, 13-51), 띠로 기술자들의 손을 빌려 가나안과 아람 지방(우가리트, 므기또 등)의 신전 양식을 본따 건축된 이 성전은 길이 31m, 너비 10m, 높이 15m 정도의 작은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 성전은 이스라엘 건축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건물이기는 하지만, 그 건축 양식이나 장식이 아름답고 호화롭다고 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아니다. 이 성전은 왕실의 경신례 장소임과 동시에 국가의 중앙 성소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성전 건축이 완료된 뒤부터 정치적으로는 모든 권력이 중앙 집중화됨과 동시각 지파의 자율권이 위축되고 무너지게 되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지방 성소에서의 예배를 불법화하고 예루살렘 중앙 성소에서의 예배만을 합법적인 예배로 인정하고 강요함으로써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권력의 중앙 집중화는 곧 왕권의 전횡과 타락으로 이어져 민중들의 삶을 억압하고 고달프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1열왕 12, 4). 또 솔로몬은 13년에 걸쳐 궁전과 밀로궁을 지었는데(1열왕 7. 1-12 ; 9, 24), 레바논의 굵고 육중한 나무들로 지어졌다고 해서 '레바논 수풀궁' 이라고 불렸으며, 병기고와 보물 창고의 역할도 하였다. 이 궁전에는 금으로 장식한 상아 왕좌가 있었다. 성전 건축과 궁전 건축에만 20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내치(內治)를 위한 조치들을 취한 다음, 솔로몬은 외적들에 대한 방어 조치들을 취하였다. 그는 견고한 군사 시설들을 건설함으로써 국가의 안전을 유지하며 침략을 예방하였다. 즉 그는 예루살렘에 성벽을 쌓고 하솔 · 므기또 · 게젤 · 벳호론 · 바알랏 · 다말 등 주 도시들을 요새화하여 군사 기지로 만들었으며(1열왕 9, 15-19), 병거가 1,400대, 군마가 12,000마리(1열왕 10, 26), 마구간이 40,000칸(1열왕 5, 6 ; 2역대 9, 25에서는 4,000칸)이 있었다. 왕권을 공고히 하고 외적에 대한 침략의 염려가 없어진 솔로몬 치하의 이스라엘은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였다.
외교와 무역 : 솔로몬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불레셋 땅까지, 그리고 이집트 국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국을 지배하였다"(1열왕 5, 1). 이 왕국들은 솔로몬에게 조공 을 바쳤으나, 이들 나라들 가운데서 에돔의 하닷과 다마스커스의 르손은 반기를 들고 독립하였다(1열왕 11, 1425). 띠로의 히람은 솔로몬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 서 솔로몬을 도왔다. 그는 성전을 지을 건축 자재(향백나무 · 방백나무 · 금)와 기술자들을 솔로몬에게 보내 주었고, 솔로몬은 그 대가로 매년 밀과 찧어 낸 기름을 지불하였으며(1열왕 5, 15-26), 성전과 궁전이 모두 완공된 다음에는 갈릴래아 지방의 성읍 20개를 그에게 주었다(1열왕 9, 10-14).
솔로몬의 통치 시대를 이스라엘의 황금 시대(1열왕 5, 4-5)라고 부르는 이유는, 국내외적으로 정치적인 안정이 유지되고 경제적인 풍요를 누렸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농업과 목축업을 생업으로 하던 이스라엘 사회에 솔로몬은 상업과 공업을 함께 일으켰으며, 에시온게벨에서 상선대를 창설하여 오빌과 정기적으로 무역을 하였다. 이 때도 히람이 사공들을 보내 솔로몬을 도왔다(1열왕 9,26-27 : 10, 11). 이 무역선들은 금 · 은 · 목재 · 보석 · 상아 · 원숭이 등을 가져왔으며, 에시욘게벨 근처에는 특히 구리로 유명한 광산도 있었다. 솔로몬은 세바, 아라비아 왕들과도 무역을 하였다(1열왕 10, 13-15). 또 해변 길(Via Maris)과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 길을 통과하는 대상들로부터 통행세를 받았으며, 이집트의 말과 병거를 수입해서 다른 나라에 파는중개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막대한 수입도 올렸다.
솔로몬의 지혜 : 솔로몬은 성서의 자료들과 후대 전승들에서 지혜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 열왕기 상 3장 3-15절에는 솔로몬이 통치 초기에 기브온 산당에 가서 번제 물을 천 마리씩 바치고 꿈에 하느님으로부터 지혜를 구하여 얻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어 3장 16-28절에서는 그가 지혜의 왕답게 얼마나 현명하게 재판을 하였는가에
대해서, 또 5장 9-14절에서는 솔로몬의 지혜가 동방이나 이집트의 모든 지혜를 능가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그가 지은 잠언이 3,000가지이고 노래가 1,005 편에 이른다는 사실을 전하여 주고 있다. 잠언집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금언집"이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써 이 책의 출처를 솔로몬에게 돌리고 있다 (잠언 1, 1 : 25, 1).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이다" (전도 1, 1)라는 말로, 그리고 아가서는 "가장 아름다운 솔로몬의 노래" (아가 1, 1) 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써 전도서와 아가서를 솔로몬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솔로몬의 지혜를 알아보기 위하여 세바의 여왕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직접 확인하고 감탄하였다(1열왕 10, 1-13). 지혜서도 그 저자를 솔로몬으로 설정하고 있는데(지혜 8, 10-11 ; 9, 7-8. 12), 이는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지혜의 왕 솔로몬의 전통을 반영한 것이다.
〔부정적인 역할과 활동〕 위에서 살펴본 것과는 달리 솔로몬의 통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 부정적인 측면은 열왕기 상 11-12장에 집중적으로 고발되어 있 다.
종교 혼합 현상 : 솔로몬 시대에는 이방적 · 이교적인 요소들을 많이 받아들인 시기였다. 이미 다윗 왕 때부터 많은 이방인 용병들이 있었고(2사무 15, 18), 솔로몬은
히람과 같은 이방인 기술자를 불러들였으며(1열왕 7, 13-14), 솔로몬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이방인과 결혼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는 이미 정착 초기부터 아모리 · 헷 · 브리즈 · 히위 · 여부스 등 족속들이 남아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기도 하였다(1열왕 9, 20-21).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종교 혼합 현상이 일어났고, 솔로몬도 이방인 공주들을 후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섬기는 이방신들도 받아들여 섬김으로써 종교 혼합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1열왕 11, 1-8). 이러한 솔로몬의 범죄에 대하여 하느님은 진노하고 이스라엘을 분단시킬 것을 선포하였다(1열왕 11, 9-13).
계층 갈등과 지역 갈등 : 솔로몬 시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를 가져온 시기였으나, 소수가 이러한 부를 독점하여상류층을 형성함으로써 노동자 · 노예 · 가난한 자 등 민중과 계급 차별이 생기고 빈부 격차가 심화되었다. 또 소수 상류층이 권력을 독점한 중앙 집권적 국가였다. 그 결과 솔로몬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판관 시대의 민주적 지파 체제가 무너지고 계층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래서 강제 노동, 막중한 세금 부담, 빈부 격차, 계층 차별, 그리고 강제 노동 등에 시달린 민중들은 더 이상 이를 견디지 못하고 솔로몬에게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불만과 반발은 특히 북쪽 지파 사람들이 더욱 심했는데, 그 이유는 솔로몬이 다윗보다도 더 예루살렘과 유다 지파에 편중된 정책을 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여로보암을 앞세운 북쪽 지파들은 불만을 품어 오다가(1열왕 11, 26-40) 그 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남부 유다에 등을 돌리고 갈라져 나갔다(1열왕 12, 1-19). 이 분단의 일차적인 책임은 솔로몬에게 있었다.
〔신약성서에서의 솔로몬〕 신약성서에서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는 우선적으로 예수의 말씀에 언급되어 있다. 예수는 심판에 대해 말하면서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으켜져서 이 세대를 단죄할 것입니다. 사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던 것 입니다. 그러나 보시오, 여기 솔로몬보다 큰 사람을!"(마태 12, 42 : 루가 11, 31)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열왕기상 10장 1-10절의 이야기를 언급한 것으로서, 이방 여인인 세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먼 곳에서 찾아왔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보다 훨씬 위대한 지혜의 화신(마태 11, 19c)인 예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경고였다. 또 "그러나 보시오, 여기 솔로몬보다 큰 사람을!"이라고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총명한 현자로 여기는 솔로몬보다도 위대하다고 자처하였는데 이는 예수의 전권 의식을분명하게 드러낸 말씀이다. 또 음식과 의복 걱정을 하지말라면서 "그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것들 가운데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했습니다"(마태 6, 29 ; 루가 12,27)라고 한 말씀은, 제자들에게 인간적 · 물질적인 것에 대한 걱정과 집착에서 벗어나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으면 하느님께서 나머지 것들을 보태어 주신다는 의도에서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는 "어느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마태 6, 24 참조)는 실존적인 결단을 분명하게 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결국 신약성서에서 언급된 솔로몬은 예수가 누구이며, 예수가 선포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려 주기 위한 과정에서 비교의 대상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 성전 ;시편 ; 이스라엘 ; 지혜서)
※ 참고문헌  임태수, 《살림》 27호, 한국신학연구소, 1991/ 一, <민중 편에 선 신명기 사가의 통치 이데올로기>, 《구약성서와 민중》, 한국신학연구소, 1993, pp. 290~295/ 장일선, 《다윗 왕가의 역사이야기》, 대한기독교서회, 1997/ 박종수, 《구약성서 역사 이야기》, 글터, 1996/ J. Bright, 김윤주 역, 《이스라엘의 역사》, 분도출판사, 1983/ A.H.J. Gunneweg, 문희석 역, 《이스라엘 역사》, 한국신학연구소, 1981/ S.J. De Vries, 1 Kings, WBC, 1985/T. Ishida, 《ABD》 6/ H. Donner, Geschichte des Volkes Israel und seiner Nachbam in Grundziigen, vol.1, Göttingen, 1984/J. Gray, I & II Kings, OTL, 1980/ J.M. Myers, 4/M. Noth, Könige 1~16, Neukirchener, 1983. 〔任太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