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와 그의 부친 성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그리고 당고모인 성 김 데레사의 탄생지.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4번지 소재.
산에 소나무 숲이 많다 하여 솔뫼 또는 송산(松山)이라고 불린다. 이곳에 언제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의 거주 지인 여사울(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 9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일찍부터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솔뫼가 한국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김대건 신부 가문과 관련해서이다. 즉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운조(金運祚, 字 震厚, 비오)가 솔뫼에서 태어났고, 종조부인 김한현(金漢鉉, 字 宗漢, 안드레아) 이 솔뫼 사람이고, 또 1836년 12월 3일 김대건이 모방 신부 앞에서 신학생 선서를 할 때 솔뫼 출신이라고 기록된 것이 그것이다. 이외에 김해 김씨 족보에 기록된 김운조의 자손 중 묘지가 송산에 있는 사람만도 여럿이다.
김대건 신부 가문 사람 가운데 가장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김운조의 장남인 종현(淙鉉)이었다. 그는 이존창의 권면으로 입교한 후 형제와 조카들을 차례로 인도하였고, 그의 부친 김운조도 1791년 이전에 입교하였다. 아울러 이존창의 딸인 이 멜라니아와 김대건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金澤鉉)이 혼인함으로써 김대
건 신부 가문의 천주 신앙은 더욱 활기를 띠었으며, 그러한 신앙 전통이 김제준, 김대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김운조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하였고, 1816년에는 김한현이 대구에서 참수되는 등 박해의 위협 속에 있던 김대건 신부 집안은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 害)를 계기로 솔뫼를 떠났다. 가솔을 이끌고 서울 청파(青坡)로 이주한 조부 김택현은 그곳에서 다시 경기도 용인의 한덕동(寒德洞, 용인군 이동면 묵리)으로 옮겨 살 다가 1830년에 사망하였다. 그 후 김제준은 가족을 데리고 한덕동 이웃의 골배마실(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주하였고, 김대건 신부는 이곳에서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솔뫼의 성역화 작업은 1946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당시 구합덕 본당 주임 페랭(P. Perrin, 白文弼) 신부는 송산리 산 45-1번지의 동산 4,866평을 매입한 뒤,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비를 건립함으로써 성역화 사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그 뒤 30년이 지난 1976년 11월에 '천주교 대전교구 성웅 김대건 신부 탄생지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 가 발족되어 이듬해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을 건립하는 등 본격적인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그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1981년 4월 '대전교구 솔뫼 성역화 추진위원회' 가 재발족되면서 피정의 집 건립(1983), 김대건 신부 생가 복원 기공식(1996) 등 성역화를 위한 작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있다. (→ 김대건 ; 김 데레사 ; 김제준)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가톨릭 사전》 김진용, <김대건 신부 가족 피난지에 관한 연구>, 《교회와 역사》 218호(1993. 7), 한국교회사연구소, pp. 2~5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순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이원순, <김대건 가문의 신앙 내력과 순교 전통>, 《교회사 연구》 12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方相根〕
솔뫼
松山
글자 크기
7권

1 / 4
솔뫼에 건립된 김대건 신부 동상(왼쪽)과 순교 100주년 기념비 및 시성 기념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