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송림시 산서리(山西里) 소재. 1939년 7월 20일 사리원(沙里院) 본당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
심. 관할 구역은 송림시 일대였고, 1944년의 신자수는 677명이었으며,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50년 6월 본당이 폐쇄될 때까 지 재임하였다.
〔전사 및 공소 시대〕 황주(黃州) 본당 소속으로 있던 1903년경의 송림 공소 신자수가 26명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에 신앙이 전파된 지는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송림 지역은 1904년 러일 전쟁 직후부터 일본군의 군수 물자 한선장이 되면서 일본군과 한국인 군속(軍屬) 노무자들이 많이 상주하기 시작하였으며, 대단위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공업 지대로 변모한 곳으로 일제 시대에는 겸이포(兼二浦)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 후 송림 공소는 황주 본당이 폐쇄되면서 1916년에 사리원 본당으로 이관되었는데, 그때까지 김억범(金億凡)의 집에서 판공 성사를 보았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신자수가 100여 명으로 증가하자 자발적으로 모은 기금으로 1919년 겨울에는 학마산 기슭에 강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본당 승격과 변모〕 송림 공소 신자들은 이 지역이 공업 도시로 성장하게 되자 교구장 라리보(Lamibeau, 元亨根) 주교에게 신부 파견 및 성당 부지 매입을 청원하였고, 그 결과 강원도 양양(襄陽) 본당에서 사목하던 유재옥 신부가 1939년 7월 20일 초대 주임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송림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유재옥 신부는 그 해 8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연와조 성당(81평)과 사제관(19평) 등을 완공하고 12월 3일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청년회 · 성가대 · 복사단 등의 단체들을 조직한 뒤 관내에 있던 10여 개 공소를 중심으로 활발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 17일에 송림 성당은 잠시 총독부에 강점되어 식민지 교육의 장(場)으로 유린되었으나, 서울교구장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의 항의와 신자들의 대처로 사흘 만에 되찾기도 하였다. 이후 송림 지역이 공산 정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유재옥 신부는 이계광(李啓光, 요한) 부제와 김창린(金昌麟, 필립 보) 신학생을 먼저 남하시킨 뒤 혼자 남아 신자들과 함께 성당을 지켰다.
그 후 공산 정권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고 본당 신자들이 속속 남하하면서 신자수가 점차 감소하였다. 그러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에 납치된 유재옥 신부는, 그 해 10월 5일 해주 모래밭에서 생매장을 당해 순교하였다. 한편 서울교구에서는 서울 수복 후인 1950년 10월에 2대 주임으로 김정진 (金正鎭, 바오로) 신부를 임명하였으나, 유엔군의 후퇴로 본당에 부임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본당은 폐쇄되고 말았다. (→ 사리원 본당 ; 유재옥)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黃海道天主教會史》,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본당별 교세 통계표>. 〔金成喜〕
송림 본당
松林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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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