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 본당

松禾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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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 읍내리(邑內里) 소재. 1939년 7월 장연(長淵)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50년 9월에 폐쇄 되었다. 관할 구역은 송화군 전 지역이었으며, 공소는 쇠골, 안농리, 풍천읍, 용수리, 월현리 등 5개소. 〔역대 신부〕 초대 박우철(朴遇哲) 바오로(1939.7~1941.6), 2대 이 보환(李普煥) 요셉(1941. 6~1942. 5), 임시 강주희(姜周熙) 판크라시오(1942. 5~1944.9), 3대 서기창(徐起昌) 프란치스코(1944. 9~1950.9). 황해도 송화군 일대에는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에 복음이 전래되었는데, 풍천(豊川)의 이 초시(李初試)와 장연의 이달회(李達晦, 베드로)가 이 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 후 1880년 11월 12일에 황해도 장연의 태탄(苔灘) 앞바다로 입국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위텔(Mutel, 閔
德孝) 신부와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가 목감면 극락리(極樂里)에 약 3개월 동안 머물며 풍천 · 장연 .은율 · 안악 등지에 전교하였다. 리우빌 신부가 상경한 뒤 송화 지방 최초의 공소인 사직동(社稷洞)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그 후 쿠데르(V. Couderc, 具瑪瑟) 신부, 로(J. Rault, 盧若望) 신부, 르 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신부 등이 송화와 풍천 지방을 차례로 사목하다가 1896년에 황해도와 평안도의 사목이 분리된 후로는 주로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가 관할하였다.
이 무렵 송화 · 풍천 일대에는 쇠골(金洞), 산골몰(山洞) 등을 비롯한 공소들이 계속 설립되어 1900년대 초에는 공소수가 15개에 이르렀는데, 이들 공소는 1901년 르 장드르 신부가 장연 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새 본당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또 황해도 지역에 파견된 김문옥(金紋玉, 요셉) 신부와 김명제(金命濟, 베드 로) 신부 등에 의해서도 몇몇 공소가 더 설립되었다. 그러나 송화 본당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송화 공소' 가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오랫동안 본당 설립을 갈망해 온 신자들이 공소 회장을 중심으로 성당 건립 계획을 세워 이를 추진하였고, 1935년경에는 송화면의 향교였던 기와집을 매입한 뒤 이를 철거한 목재를 사용하여 읍내리에 기와집 성당(40평)과 사제관을 신축하였다는 사실만이 전해질 뿐이다. 이후 송화 공소는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였고, 1939년 7월에 강원도 이천(伊川)에서 전교하던 박우철 신부가 부임하면서 마침내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박우철 신부는 본당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다가 2년 만에 전임되었고, 2대 주임 이보환 신부는 심장성 천식증으로 고생하다가 부임 이듬해 강원도 평강(平康)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그러면서 본당은 2년여 동안 본당 신부가 없어 강주희 신부가 임시로 사목을 맡아주었는데, 그 무렵 본당 신자수는 약 510명에 달하였다. 이어 1944년 9월에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서기창 신부는 사제관을 신축하는 등 본당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8 · 15 광복 이후에는 공산 치하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또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치 보위부로부터 잦은 간섭을 받게 되었고, 결국 성당을 군사 동원부 건물로 징발당하고 말아 신자 임능익(林能益, 베드로)의 집으로 옮겨 성무를 집행해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서기창 신부가 1950년 9월 10일경 정치 보위부에 연행되어 10여 일 후 피살체로 발견됨에 따라 송화 본당은 침묵의 본당이 되었다. (→ 침묵의 교회 ; 장연 본당)
※ 참고문헌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편,《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金善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