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꽂 〔히〕סֶכּתָה 〔그〕Σοκχώθ

〔라〕Socoth · [영]Succoth

글자 크기
7
수꽂으로 여겨지는 '텔 데이르 알라' (왼쪽)와 그곳에서 출토된 아직 판독되지 않은 문자가 새겨진 기원전 12세기의 점토판.
1 / 2

수꽂으로 여겨지는 '텔 데이르 알라' (왼쪽)와 그곳에서 출토된 아직 판독되지 않은 문자가 새겨진 기원전 12세기의 점토판.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급 때 처음으로 도착한 지역으로, 이집트 라므세스와 에담(Etham) 사이에 있다.
〔위 치〕 수꽂은 어원상 히브리어로 '천막' 이라는 뜻을 지닌 '수카' (סֻכָּה)의 복수형으로서 유목민들의 천막촌을 의미한다. 수꽂이 출애급 이야기에서 출발지인 라므세스를 떠난 후 첫 번째 도착한 지역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출애 12, 37 : 13, 20 : 민수 33, 5) 19세기의 성서학자들은 이집트의 나일 강 삼각주 지방에서 되도록 가나안과 가까이 있는 북서쪽의 고센 땅에서 그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1875년에 브룩쉬(H. Brugsch)는 이집트 지명과 히브리어 지명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이집트 고대 기록에 등장하는 체쿠(Ṯkw)가 출애굽기의 수꽂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하면서, 출애급 직전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할 수 있는 비돔이 체쿠에 있는 도시라는 언급에서 체쿠를 수꽂과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히브리어의 싸멕(ס)과 이집트어의 츠(Ṯ)가 서로 교환될 수 있는 발음이고, 히브리어의 여성 복수형 어미 옷트(")는 이집트어의 남성 복수형 어미 우(w)로 표기될 수 있기 때문에 체쿠는 수꽂과 일치될 수 있다고도 하였다. 만일 이집트의 체쿠가 성서의 수꽂이라면 수꽂은 고대 이집트 기록에서는 항상 비돔과 같이 등장하기 때문에 비돔과의 관계 속에서 그 지리적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서 지리학자와 이집트 학자들은 와디 투밀라트(Wadi Tumilat)에 위치한 텔 엘-마스쿠타(Tel el-Maskhuta)를 비돔으로 보고 있으며, 수꽂은 바로 비돔을 포함하는 와디 투밀라트 지역 전체로 보고 있다. 와디 투밀라트는 고대 이집트의 행정 구역상 하이집트의 여덟번째 구역인 동쪽 작살(Harpoon East) 주(州)이다.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4) 시대에 이 지역은 트무이스(Thmouis)로 불렸으며, 로마 시대에는 헤루폴리티쿠스(Heroopoliticus))로 지칭되었다.
1882년 런던에서 결성된 '이집트 탐사 재단'에서는 첫 번째 발굴지로 비돔이나 수꽂을 찾고자 하였고, 가장 적합한 후보지로 와디 투밀라트 지역에 위치한 텔 엘-마스쿠타를 선택하였다. 현지 아랍어로 "우상들의 언덕"이라는 뜻인 텔 엘-마스쿠타는 여러 종류의 석상들이 널려있던 유적지였다. 나빌(Edouard Naville)이 1883년부터이곳에 대한 발굴을 시작하였고, 고대 이집트어로 '페르-아툼, 체쿠' 즉 "체쿠에 있는 아툼의 신전"이라고 기록된 석비가 발견되었다. 페르-아툼 또는 피-아툼이 성 서 히브리어에서 피톰(비돔)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비돔은 수꽂 지방에 위치한 한 도시로 볼 수밖에 없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이 지역의 좀더 자세한 고대 주거사를 밝힐 수 있게 된 것은 캐나다 토론토 대학 주관으로 1978년부터 8년 동안 지속된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통해서였다. 비돔의 최초 주거 역사는 기원전 1700년경 이 지역에 대한 힉소스의 지배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기원전 1550년경 힉소스가 가나안 지방으로 추방될 때 비돔은 파괴된 후 계속 폐허로 남아 있다가 기원전 610년경부터 로마 시대까지 요새로 재건되어 사용되었다. 그리고 네코 2세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는 나일 강 하류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였는데, 이때 이 운하 근처에 위치한 비돔이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체쿠와 비돔의 지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는 기원전 1200년경 세티 2세 시대에 기록되어 당시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던 파피루스 기록을 들 수 있다. 19세기 중엽에 발견된 후 최초의 소장자 이름을 따서 아나스타시(Anastasi) 제6 파피루스라고 불리는 이 문서에는 체쿠의 궁수 대장인 카켐웨르가 시나이 반도 쪽으로 도망친 두 명의 노예를 잡기 위해 궁전(라므세스)을 출발하여 다음날 체쿠에 있는 요새에 도달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출애급 기록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라므세스를 출발하여 다음날 수꽂에 도달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또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아나스타시 제5 파피루스에는 비돔의 연못 근처에서 목축을 할 수 있도록 에돔 출신의 베두인들을 체쿠에 있는 메르네프타 요새 곁으로 통과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원전 1200년경의 기록에서 체쿠는 도시라기보다는 비돔이 위치했던 지역 이름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기원전 600년경에 기록된 비돔 석비의 "체쿠에 있는 페르-아툼"이라는 구절과도 일치한다. 체쿠가 지역이라는 사실은 체쿠라는 이집트 단어 뒤에 붙는 한정사(限定詞, deter- minative)가 도시를 의미하지 않고 부메랑과 산 모양, 즉 유목민들이 사는 광야를 지칭하는 상형 문자로 표기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텔 엘-마스쿠타를 비돔으로 본다면 아나스타시 파피루스의 기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재구성한 비돔의 주거 역사에서, 기원전 1200년경 이곳은 폐허였는데 어떻게 비돔이 계속 언급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이는 비돔을 도시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체쿠 지역 어디엔가 서 있었던 아툼의 신전으로 본다면 해석상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출애급 당시 히브리 노예들이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할 도성으로서 비돔을 건설하였다(출애 1, 11)는 구절은 텔 엘-마스쿠타의 발굴 결과와는 상반된다. 따라서 텔 엘-마스쿠타에서 출토된 비돔 석비의 "체쿠의 비돔"을 근거로 출애굽기의 비돔과 수꽂에 관한 언급은, 결국 기원전 6세기 예레미야를 비롯한 유대의 난민들이 바빌로니아의 침공을 피해 이집트의 고센 지역으로 피난 간 뒤에 생겨난 후대의 전승에 의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 출애급)

※ 참고문헌  E.L. Bleiberg, The Location of Pithom and Succoth, The Ancient World, vol. 6, 1983, pp. 21~271 B. MacDonald, Excavations at Tellel-Maskhuta, 《BA》 43, 1980, pp. 49~58/ J.S. Holladay, Tell el-Maskhuta, 《OEANE》 3, pp. 432~437/ D.B. Redford, Exodus 1, 11, 《VT》 13, 1963, pp. 401~418/ E. Naville, The Store-City of Pithom and the Route ofthe Exodus, London, 1885/ J.A.H. Seely, Succoth, 《ABD》6, pp. 217~218. 〔金 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