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苦痛

〔라〕dolor · 〔영〕su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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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를 지은 후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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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를 지은 후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

I . 교의신학에서의 고통 고통은 인간의 현세적 실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과 근본적인 관계 속에서 산다. 고통이라는 말 속에는 고통의 원인이나 동기를 말하는 객관적 차원과 고통을 주체적으로 느끼는 주관적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즉, 고통은 불행이나 악을 감지할 수 있는 인간의 감각과 인식 능력을 전제한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는 고통의 원인을 악(惡)의 체험, 곧 악은 선의 결핍이나 제한 또는 왜곡이며, 인간으로부터 단절되거나 박탈당한 선(善) 때문에 인간은 고통 받는다고 보았다. 고통에 대한 물음은 신학에서 "선하신 하느님이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가?" 혹은 "선하신 하느님이 왜 이 세상 안에서 악을 허용하시는가?" 와 같은 형태로 제기되어 왔다. 세계로부터 인간에게 고통이 오고 있는데도 인간은 이 물음을 세계를 향하여 묻지 않고 세계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신 하느님께 묻는다. 그리고 바로 이 물음과 관련하여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있어서 수많은 좌절과 갈등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면 먼저 성서 안에서 나타나는 고통에 대한 이해를 살펴본다.
〔구약성서의 고통 이해〕 구약성서에는 고통을 가리키는 특별한 어휘가 없다. 괴로움(malah), 곤궁(sarah), 비참(jagon) 등으로 표현하며 고통받고 있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규정한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 '파스코' (πάσχω: 나는 ~을 겪는다. 나는 고통받는 느낌을 경험한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인간이 악을 경험하고 고통의 주체가 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고통에 대한 표현은 세밀하지만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을 구별하지 않는다. 구약 성서는 고통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와 이해를 담고 있다.
1) 고통의 최종 원인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인간의 원죄와 연결시키는 견해가 있다. 창세기의 창조 설화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사랑하는 인간에게는 당신께 순종하는 한 고통도 죽음도 없으리라는 특은을 베푸셨다. 그러나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께 불순종하도록 아담을 유혹하였고 이 원죄에 대한 응벌로서 이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도래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창조 설화는 인간의 불순종을 징벌하시는 심판자 하느님에 관하여 말한다기보다, 고통 속에 살다가 죽음으로 한정되는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답변하고 있다. 선하신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고통 중에 불행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실텐데, 왜 이 세상의 삶은 이다지도 괴롭고 힘든가? 이에 대해 창조 설화는 불행한 인간 현실이 인간 스스로의 잘못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느님 가까이에 있을 때는 행복과 즐거움으로 보였을 일들이 하느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비(非)구원으로 체험된다는 것이다. 노동이 비록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한다 하더라도 하느님 곁에서는 그렇게 지긋지긋한 것이 아니라, 즐거운 놀이와 같았을 것이다. 남녀의 관계도 갈등과 불화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깊이 이해하는 관계가 되었을 것이고 여자가 겪는 산고도 새 생명을 얻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죽음 역시 공포가 아니라 하느님의 품속에 안기는 평화로운 안식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하느님을 삶의 테두리에서 배제시키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이웃, 그리고 자연 세계와 더 이상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 하느님이 인간을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이 스스로 징벌하고 있다.
2) 고통을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해석하는 표현들이 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그분으로부터 본질적인 선이 나오는데, 이 선을 인간이 의식적이고도 자유롭게 침해한다면, 이는 죄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따라서 죄에 대한 윤리적 상응은 벌이요, 벌은 초월적 의미에서 윤리적 질서를 보장하고, 상선벌악하시는 하느님이 의로운 심판자이심을 드러낸다. 선을 선으로 갚고 악을 악으로 갚으시는 정의로운 하느님은 선을 침해하는 인간의 행위를 징벌하신다. 비록 악인들이 오랫동안 번영할 수 있으나,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이 마침내 그들에게 미칠 것이라는 굳은 확신들이 나타나 있다(예 : 시편 7. 15-16 ; 37, 1-3 ; 52, 1. 5 ; 73, 12-20 ; 92, 7). 한 가족이나 한 왕조의 고통은 선조의 잘못이나 왕조의 창건자가 지은 죄에 대한 결과로 나타난다. 민족의 고통은 왕들이 저지른 잘못의 결과로 나타난다(출애 7-11장 ; 2사무 21, 1 ; 24, 11-17 ; 2열왕 21, 14). 또한 선조의 잘못은 민족 전체의 고통을 야기시킨다(창세 9, 25 ; 49, 3-7).
3) 고통이 교육적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이 징벌은 우리 민족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찍질하시려는 것이었다" (2마카 6, 12). 고통을 통하여 회개하라는 부르심을 듣게 되고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성된다. 따라서 신앙을 통해 하느님의 계획과 관계를 가진다면 고통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아브라함(창세 22장), 욥(욥기 1, 11 ; 2, 5), 토비아(토비 12, 23)는 시련을 통하여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4) 그외에 의인이 겪게 되는 고통에 대한 이해도 있다.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은 객관적인 윤리 질서의 차원에서 욥이 당하는 고통을 정당화시키려 논증한다.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고통을 보내시는 것은 죄에 대한 벌로서만 가능하다. 욥이 그처럼 갖가지 무서운 고통을 겪는 것은 무엇인가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임을 그들은 확신한다. "내가 보니,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욥기 4, 8). 여기서 고통은 하나의 '정당화된 악' 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욥은 무죄한 사람이 받아야 하는 고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고통을 죄에 대한 벌로서 설명하려는 시도는 무죄한 사람이 받는 고통에 대하여 설명할 길이 없다. 가정과 재산과 명예를 모두 잃어버린 욥은 잿더미 위에 앉아 토기 조각으로 부스럼이 난 몸을 긁으면서 눈물과 탄식 가운데 자신의 결백함을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왜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 그러나 욥의 물음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은 윤리적 질서를 넘어서고 우리의 생각과 능력으로 상쇄될 수 없는 그분의 뜻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무죄한 사람의 고통은 인간의 지력으로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없는 하나의 신비로서 제시된다. 그래서 고통을 인과응보적으로 설명하는 논리를 깨뜨린다.
5) 의인이 받아야 하는 고통과 아울러 이사야서 40-55장에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 에 관한 노래가 있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이사 53, 4-5). 여기에 나타나는 고난의 종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다. 그는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이사 53, 9) 이 고난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지고 자신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음으로써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얻게 되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대속 사상은 신학적으로 깊이 도달한 하느님 인식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신약성서의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도 직결된다.
〔신약성서의 고통 이해〕 1) 복음서는 현세 생활에서 갖가지 고통으로 시련을 당하는 사람들, 슬퍼하고 가난하고 배고프고 의를 위해 핍박받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일컫는다(마태 5, 3-11 : 행복 선언). 하느님의 통치와 함께 시작되는 종말론적 구원이 굶주리고 슬퍼하는 자들에게 약속된다. 예수님은 고통으로 가득 찬 인간 세계에 오셔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고 괴로운 이들을 위로해 주며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신다. 맹인, 농아, 나병 환자 등을 신체적 장애에서 풀어 주고 죽은 이를 소생시키신다. 육신의 고통이든, 영혼의 고통이든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셨으며, 그 고통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병자의 치유와 죽은 자의 소생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을 드러내는 표징들이었다.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는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구원을 매개한다. 왜냐하면 기적과 병고침도 하느님 나라의 선포라는 지평 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고통을 퇴치하는 것이고,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일이다.
고통이 제거되고 상황이 역전됨으로써 하느님 통치가 실제적 구원으로 드러난다. 하느님과 분리되어 경험되는 비구원으로부터 다시 하느님과 연합되는 구원의 체험을 통하여 인간의 고통은 제거된다. 또한 현세의 고통을 죄의 결과로 해석하려는 견해를 극복하고 있다. 예수님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며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한 9, 2-3).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고통을 퇴치하는 것이고, 이러한 하느님의 일은 안식일에도 행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율법을 깨뜨리면서까지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치유와 기적을 행하셨다(마르 3, 1-6 ; 마태 12, 9-14 ; 루가 6, 6-11). 고통을 퇴치하는 힘의 원천은 하느님이시다(루가 5, 17). 따라서 마술과는 구별되는 방식으로 영으로,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예수님은 악마를 축출하셨다(마태 12, 28 ; 루가 11, 20). 이 세상에는 불의한 사람들이 오히려 세속적으로 축복받은 삶을 누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자들은 불의와 구조악으로 희생되는 예가 많다. 나아가 현세에서 받은 고난은 하느님의 정의에 충실한 삶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고통을 죄에 대한 징벌로 볼 때, 흔히 고통의 원인을 간과하게 될 뿐만 아니라, 고통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불의한 구조를 영속시키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해석 : 예수는 고통 자체를 위해 산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다가올 수난 때문에 번민하셨고(요한 12, 27), 그 잔이 거두어지길 바라셨으며(루가 22, 42) 십자가 상에서 고난을 마지막까지 맛보셨다(마태 27, 46). 그러나 그분은 그 고통을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순종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나의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고, 제가 그것을 마실 수 밖에 없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26, 42)라는 말씀은 아버지께 순종하며 바치는 사랑의 진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분이 겪은 고통의 진실을 입증하고 있다. 이 말씀은 깊은 차원에 있어서 고통의 인간적 진실을, 즉 고통이란 인간이 그 앞에서 전율하며 악을 몸소 겪는 일임을 극히 명료하게 드러내 준다. 예수는 생명을 주는 생명의 원천, 고통을 없애는 분으로서 하느님을 계시하셨다. 바로 그 메시지에 충실했고 아버지께 순종한 것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인 동시에 보편적 사랑의 선포자를 독성(瀆聖) 죄인으로 몰아 함구하게 했던 세상이 보인 미움의 표지였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상의 죽음을 부활이라는 신앙의 빛으로 해석하였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적 고통을 자기 자신에게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의 원인인 죄나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셨고, 죽기까지 받아야 했던 고통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고 주장한다(마르 8, 31-33 ; 루가 24, 25-26).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이사야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증언한다(사도 2, 23-24 ; 3, 13-14 ; 4, 10-12 ; 1요한 2, 2 ; 4, 10).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을 위하여 당신 몸을 내주신다는 뜻이다. 또한 포도주는 많은 이들을 위해서 흘리는 계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는데,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피는 구약성서의 야훼의 종을 찬양한 노래 제4편(이사 52, 13-53, 12) 중에서 따온 표현이다. 야훼의 종이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53, 11) "많은 이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53, 12) 대속죄의 죽음을 당하였듯이, 예수님도 야훼의 종처럼 많은 이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 상에서 속죄하는 죽임을 당하셨다. 바울로 사도는 십자가 상의 죽음을 인간의 죄를 대속한 죽음이고(로마 5, 9 ; 1고린 15, 3 ; 2고린 5, 21),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킨 화목제이며(로마 5, 9 ; 2고린 5, 19 ; 1디모 2, 5-6), 그분의 영광에 합당한 일이었다고(에페 1, 20-23)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고난받는 예수를, 인간을 위하여 단 한 번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대제관으로 묘사하고 있으며(히브 2, 9 ; 7, 27 ; 9, 26-28),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한다(히브 5, 8). 예수가 당하셨던 고통과 죽음은 한정된 인간에게 자신의 몸을 온전히 내어 준 행위였고 많은 이들을 위한 희생제였다.
3) 초대 교회의 고통에 대한 이해 :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빛에 비추어서 자신들이 받는 고통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고 주님께 일치하여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 충만하게 실현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사도들은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였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받음을 기뻐하며 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 수난의 부족한 것을 마저 채웁니다"(골로 1, 24). 예수와 일치함으로써 그분의 스스로를 주는 삶이 그들 안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분과 함께 일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기꺼이 지신 것처럼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의 삶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게 되었다. 십자가를 뒤따르라는 요청이 고난에 대한 신비로 쉽게 빠져들 수도 있는데, 이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아야 했던 역사적 정황을 잊어버릴 때 곧잘 발생되었다. 예수의 죽음은 그분의 전갈과 활동에 따른 귀결이었지 고통 그 자체를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은 아니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은 고통을 퇴치하려는 실천 속에서 생명을 주는 분이지 고통을 즐기는 분이 아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다. 고통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퇴치의 대상이다. 십자가를 따르라는 요청은 많은 이들을 살리려는 노력을 할 때 부딪치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예수의 삶을 따라 형제가 자유롭게 되고 자매들이 행복하게 될 수 있는 방향으로 노력할 때, 예수가 당하셨던 것과 같은 고난이 우리에게도 닥치기 때문이다.
〔교의사적 관점에서의 고통 이해〕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로마 제국의 혹독한 박해 하에서도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맹수의 밥으로 내던졌다. 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그들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313년 그리스도교가 합법적인 종교로서 승인되고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고통에 대한 이해는 고행이라는 적극적 형태로 나타났다. 고난에 침잠하는 것이 "마음의 평정" (Apathie)에 정향되는 이상으로 여겨졌다. 고통에 대한 소극적 이해로는 교육적 의미로 파악되었는데, 아우구스티노는 고통을 하느님의 손에 맡겨져 있는 교육의 도구라고 보아 시련을 참고 견더내야 한다고 보았다. 고통에 대한 물음은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한 물음으로 제기되었고 이에 대한 답변은 악이라는 개념과 결합되었다.
중세의 신학은 형이상학적 틀로 확대되었고 고통에 대한 도덕적 현학적인 가르침이 우주론으로 보충되었다. 원죄에 대한 벌로서 고통이 들어왔듯이 고통을 통해서만 원래 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고 보아 엄격한 훈육과 시련이 강조되었다. 시련을 통하여 하느님은 고통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중세의 형이상학적 신학은 유신론적 전통 위에 서 있다. 그리스 철학에서 신적 존재는 영원불멸하고 고통도 겪지 않는 존재로 상정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신은 선한 분이고 악과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신은 스스로 자족하며 초연한(apatheia) 분이다. 초연함이란 변화하지 않고 감정이 없으며 자유로움을 뜻한다. 따라서 고통과 죽음은 하느님의 본성과 거리가 먼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에서 형이상학이 비판되고,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욕망을 신에게 투사시킨 관념이 유신론이라고 일축함으로써, 현대 신학은 그들과 대결해야만 했다. 현대 신학은 고통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고통이라는 문제 앞에서 유신론이나 무신론은 설자리를 잃게 되고 대신 '정의롭고 선하신 하느님이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가? 라는 변증법적 물음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몰트만(J.Moltmann)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고통과 죽음을 스스로 당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불행과 고통에 무감각하지 않고 그 고통을 퇴치시키려는 노력이 예수의 삶과 죽음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정치 신학자 메츠(J.B. Metz)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 대한 회상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회상에 의해 하느님은 고난받는 역사의 주체로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회상하는 것은 고통을 야기시키는 우리의 역사와 사회를 문제삼도록 하며 또한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좌절한 이들에게는 미래의 자유를 약속해 주는 회상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의 고통은 외적으로는 하느님 나라와 인간 사회 사이의 갈등을 표출하며, 내적으로는 의인(義人)의 고난을 나타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고통은 인간 고통의 우주적 의미를 깨우쳐 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사회적으로 억눌리고 정치적으로 짓밟힌 모든 인간 고난의 역사를 극복하여 이 역사와 세계 안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기 위한 노력을 다하게 되고 이때 받을 핍박과 고통을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그리스도교의 관점이 오늘날 다시 강조되고 있다.
해방 신학은 고통의 문제를 사회 경제적 차원에 중점을 두고 파악하고 있으며 남미의 불의한 사회 구조와 정치 세력에 대항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고통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역사 발전과 구원의 계기로서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현대 신학의 움직임은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 등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나타난다.
※ 참고문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정한교 역, <구원에 이르는 고 통>,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4/ J.B. Brantschen, 배영호 역, 《고통 이라는 걸림돌》, 성바오로출판사, 1990/ J. Moltmann, 김균진 역, 《십 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한국신학연구소/ J.B. Metz, Glaube in Geschichte und Gesellschaft, Mainz, 1977/ H. Schipperges · E. Ringel · E. Zenger · J.B. Brantschen, Leiden, : Christlicher Glaube in moderner Gesellschaft, Bd 10, Freiburg, Basel, Wien, 1980/ D.J. 《ABD》/ J. Scharbert · S. Lauer · M. Wolter · W. Spam · K. Winkler, 《TRE》. 〔姜永玉〕
II . 불교에서의 고통
일반적으로 즐거움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심신(心身)을 압박하고 괴롭히는 것. 심신에 적합한 상황이나 대상을 대할 때는 즐거움을 느끼지만, 적합하지 않은 그런 것들을 대할 때는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런 괴로운 느낌을 고통이라고 한다. 불교 특유의 용어로는 고(苦, 산스크리트어 duhkha, 팔리어 dukkha)라는 한마디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 말의 원어가 지닌 의미는 매우 광범하고 포괄적이다. 즉 사소한 괴로움으로부터 가장 두려운 고통에 이르기까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 어려움, 불행, 절망 등 불유쾌한 모든 것을 의미하며, 형용사로도 명사로도 사용된다. 고 는 원래 '바라는 대로 가지 않는 , '~하기 어려운'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음' 을 의미하는 명사로 사용되었으며, 다시 '고통' , '괴로움' 도 의미하게 되어 인도 사상의 역사에서 중심 관념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이 말은 고뇌' 라고도 번역되어 일의적(一義的)으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압박하여 괴롭힘' 을 의미하며, '생각한 대로 되지 않음' , '심신의 괴로움으로 인한 불안한 상태' 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남방 불교의 언어인 팔리어로 작성된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는 고통(dukkha)을 혐오(du)와 공허(khatuccha)로 나누어 설명하길, 혐오되어 영원한 지속[常]과 즐거움〔樂〕과 불변의 자아〔我〕와 청정〔淨〕이 아닌 공허한 상태라고 이해한다.
인도〔印度〕의 철학 전반, 특히 불교는 고통에 대한 인식을 철학적 사색의 출발점으로 삼을 만큼 무엇보다도 강조한다. 그래서 서구의 학자들 중에는 고통을 "붓다와 그 제자들이 존재에 대해 지닌 극단적인 염세적 관념"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고, 이런 견해가 고정 관념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 사상의 근본 취의나 교리의 발달 과정에서 보면, 그런 견해는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후대의 교리 연구에 의하면, 고통이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용법으로 쓰인다. 하나는 일상적인 감각에서 받는 고통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은 고통이다"라고 말하는 경우처럼 존재 자체' 를 가리키는 고통이다. 전자의 경우는 육체적인 고통〔苦〕과 정신적인 고통〔憂〕으로 나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엔, 즐거움〔樂〕도 그것이 파괴될 때는 고통이고, 고통이나 즐거움이 아닌 것〔不苦不樂〕도 모두 무상(無常)하며 생멸과 변화를 면할 수 없으므로 고통이라고 간주된다. 이는 곧 고통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모든 것은 고통임을 뜻한다. 후대의 대승 불교에 이르면, 고통은 즐거움으로 바뀌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된다. 고통에 대한 불교의 전통적인 관념과 해석을 사상사에 따라 다음과 같이 개관한다.
초기 불교에서의 고통 : 초기 불교나 교리 연구에 치중한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에서는 고 통을 직시하여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거기서 고통은 중요한 교설의 중심으로 파악되어 있다. 모든 것이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라고 설하는 삼법인(三法印)의 가르침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五蘊)이 무상이고 고통이며 무아임을 여실히 파악함으로써 탐욕을 멸하여 이 세계로부터 해탈하라는 것이다. 이 3법인은 "무상인 것은 고통이다" , "고통인 것은 무아다"라고 파악하는 논리로써 무상이 고통임을 설한다. 무상과 고통은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절대불변의 자기〔我〕가 아닌 것, 즉 무아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3법인에게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제행무상(諸行無常) 다음에 언급하는 것도 무상이 고통임을 제시하기 위함일 것이다. 세계가 생성 · 변화 · 소멸하는 법칙을 제시하는 연기설(緣起說)은 고통의 대표인 노사(老死)의 원인을 탐구하여 갈애(渴愛,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나 무명(無明, 무지)을 발견하고, 이것을 멸하면 고통도 사라진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가르침을 종합하여 세상사의 이치와 이로부터 달성해야 할 목표와 방법을 총체적으로 제시하는 사제설(諦說)은, 현실의 세계는 고통이고〔苦諦〕, 그 원인은 갈애 등의 법뇌이며〔集諦〕, 그것을 말하면 고통도 멸하므로〔滅諦〕 이를 위해 여덟 가지의 도를 실천하라〔道諦〕고 설하는 것이다.
초기 불교의 성전들은 인간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기본적인 고통들을 열거함으로써 위와 같은 교리들의 타당성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가 출가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는 전설에서는 늙음과 죽음과 병이라는 세 가지 고통을 열거한다. 즉 석가모니는 젊은 시절에 성의 동문으로 나와 노인을 만나고, 남문으로 나와 병자를 만나고, 서문으로 나와 장례 행렬을 만나서 세상의 고통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결국 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였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고통을 설하는 예는 초기 불교 성전의 산문 부분에서도 보인다. 나중에는 여기에 삶〔生〕을 더하여 네 가지 고통〔四苦〕이라든가 혹은 여덟 가지 고통〔八苦〕을 세우게 되었다. 약간 늦게 성립된 성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조직적으로 설해진다. "삶도 고통이다. 늙음도 고통이다. 우울함, 슬픔, 아픔, 괴로움, 고민도 고통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집착의 요소는 고통이다." 여기서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집착의 요소' 란 불교 용어로 5온(蘊) · 5음(陰) 또는 5취온(取蘊)이라고 번역되는 말인데, 이는 인간의 존재 속에 있는 물질적 형체〔色〕, 감수 작용〔受〕, 표상 작용〔想〕, 형성 작용〔行〕, 식별 작용〔識〕을 가리킨다.
또 다른 경우에는 8종의 고통을 열거한다. "삶〔生〕도 고통이다. 늙음〔老〕도 고통이다. 병(病)도 고통이다. 죽음〔死)도 고통이다. 사랑하지 않는 자와 만나는 것도 고통이다.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다. 온갖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다. 요약하여 말하면 다섯 가지 집착의 요소는 고통이다." 여기에는 불교가 열거하는 고통의 전형적인 종류가 언급되어 있다. 앞의 넷(生 · 老 · 病 · 死)을 '4고' 라고 칭하며, 뒤의 넷가지 포함하여 '8고' 라고 칭한다. 앞의 넷을 하나로 헤아리고 뒤의 넷을 합하여 '5고' 라고도 칭한다. 뒤의 넷은 차례로 원증회고(怨憎會苦, 5온에 대한 집착에서 일어나는 고통)라는 번역어로 잘 알려져 있다. 이 8고는 앞에서 언급한 4제의 교리 중 고제(苦諦)를 설명하는 데서도 전형적으로 예시된다. 특히 이 중 맨 끝의 오음성고는 모든 것이 고통〔一切皆苦〕임을 표시한다. 이처럼 4제가 정의하는 고통은 생로병사(生老病死)만이 아니라 나의 현존재 즉 5온과 동일시된다. 아울러 '모든 것이 고통' 이라고 설하는 3법인에서의 고통은 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한 모든 현상과 동일시된다.
초기 불교 성전에서는 이밖에 고통을 다양하게 분류하여 열거하고 있다. 이러한 분류는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이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구체적인 경험 사실을 개별적으로 설함으로써, 듣는 자에게 인상을 심어 인생이 고통임을 체험에 따라 이해케 하려는 것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의 고통 : 아비달마 불교란 초기 불교에 후속하는 부파 불교 시대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해석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이런 경향의 교리 연구에서는 고통을 아무래도 '괴로움' 과 같은 일상적이고 체험적인 것으로 파악하지는 않고, 추상적 개념으로 논의되게 되었다. 《청정도론》에 의하면 고통은 '압박하여 괴롭힘, 만들어진 것〔有爲〕, 고뇌, 변하고 파괴되는 것' 이라고 정의된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부파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리학에서 고통이란 유루법(有漏法, 번뇌의 요소)의 다른 명칭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유루법은 성자의 마음에 어긋나기 때문에 고통이라고 불린다" 고 말한다. 여기서 고통이란 현상적 존재, 현상적 생활, 인간의 현실 상태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에 연유하여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불교에서는 고통이라는 말이 오염되고 미혹에 싸인 우리 '존재 자체' 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있다.
아비달마 불교의 교리 학자들은 고통을 재해석하고 체계화하고자 노력했는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3고' 라는 관념이다. 《구사론》(俱舍論)에 의하면, 생존하고 있는 것에는 3종의 고통이 있다고 한다.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가 그것이다. ① 고고는 좋아하지 않는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고통이다. 추위나 더위 등 악조건으로부터 받는 고통이며, 소위 '8고' 로 대표되는 일상적인 고통이다. ② 행고는 세상이 변해 감을 보고 느끼는 고통이다. 불교 용어로 유위법(有爲法)이라고 불리는, 세상에서 만들어진 모든 요소가 무상하고 변동하는데서 느끼는 고통이다. ③ 괴고는 좋아하는 것이 파괴됨으로써 느끼는 고통이다. 이 '3종의 고통' 이라는 관념이 성립한 그 의미론적인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인간이 일상의 경험에서 느끼는 제일의적(第一義的)인 고통을 특히 강조하고 고고 라고 같은 말을 중복한 것으로 보인다.인도에서는 한 가지 말의 의미를 강조할 때는 같은 말을 반복하여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제2 · 제3의 고통은 그런 일상적 경험에 대한 철학적 반성에 의거하여 설정된 것이다. 이 '3고' 의 관념은 후대의 대승 불교에서도 계승된다.
설일체유부의 교리학에서는 근본교리인 고 · 집 · 멸 · 도의 4제를 16종의 모습〔行相〕으로 관찰한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하여 4제 중의 고제(苦諦)를 설명하는 데서는 현상 세계의 모든 요소가 압박하여 괴롭히는 성질을 지니므로 고통이라고 정의하고, 고제는 인생의 현실이 무상 · 고 · 공(空) · 무아의 모습을 지닌다는 사실을 명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고제 다음의 집제(集諦)는 고통의 원인이 갈애에 근거하는 온갖 조건〔緣〕의 집합에 있음을 제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에 의하면, 붓다가 설한 4제 중의 고제와 집제는 윤회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존재론적인 고통을 의미한다. 이런 존재론적인 입장에서는 즐거움도 고통의 한 형태로 취급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무상 · 고 · 공 · 무아 로 관찰하는 견해는 대승 불교의 유식설(唯識說)에
도 계승되어 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비달마 불교가 매우 간명한 설명을 제시하기도 한다. 먼저 5온 중 감수(感受) 작용을 일컫는 수온(受蘊)에 세 가지가 있음을 주장한다. 곧, 고수(苦受) · 낙수(樂受) ·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고통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라는 '3수' 가 그것이다. 여기서 고수는 심신으로 감수하는 고통이다. 이것을 다시 엄밀히 구분한 경우엔, 감관을 통해 몸으로 느끼는 것을 고수 또는 신수(身受)라고 칭하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우수(憂受) 또는 심수(心受)라고 칭한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구분이 반영되어, 후대의 문헌인《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보다 합리적으로 2종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고(內苦)와 외고(外苦)라는 2종의 고통이 있다. 내고에는 다시 신체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이라는 2종이 있다. 신체의 고통이란 육신의 통증이나 두통 등인데, 404종의 병이 곧 신체의 고통이다. 마음의 고통이란 우수에 잠기거나 노여워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질투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이 두 가지 고통이 합하여 내고가 된다. 외고에도 2종이 있다. 하나는 통치자나 자기보다 뛰어난 자나 악한이나 도적이나 사자나 호랑이나 뱀 등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피해를 입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풍우(風雨)나 추위나 더위나 천둥이나 벼락 등으로부터 피해를 입는 것이다."
이밖의 특기할 만한 분류로는 늙음과 병과 죽음을 3종의 신고(身苦),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을 3종의 심고(心苦), 임종의 고통을 풍도고(風刀苦)라고 칭하는 것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초기 불교의 성전에 근거하여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에 대한 분류를 시도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고고 · 행고 · 괴고' 라는 3종의 고통이 고통에 대한 아비달마 불교의 관념을 대표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3종의 고통이 없게 될 때 열반의 상태가 성립하지만, 모든 생명체의 행복을 바라는 것으로는 전혀 표명되어 있지 않고, 오직 자기 마음의 편안만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데에 전통적 · 보수적 불교가 지닌 하나의 한계가 있다.
대승 불교에서의 고통 : 대승 불교에서도 고통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더욱 세밀하게 고통을 분류한다. 예를 들면, 이에 관한 대표적인 문헌인 《유가사지론》(有伽師地論)에서는 아비달마 불교의 3고를 열거하는 외에, 초기 불교와는 내용을 달리하는 4고, 8고, 9고, 19고를 열거하고, 심지어는 110고를 언급하기도 한다. 고통에 대한 다양한 분류 가운데, 대승 불교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에서 언급하는 3종의 고통이다. 곧 취고(取苦), 상고(相苦), 상응고(相應苦)이다.① 취고는 '질료에 의한 고통' 을 뜻하는데, 자아와 대상을 진짜 실체라고 잘못 생각한 데서 기인하는 고통을 가리킨다. ② 상고는 '양상에 따른 고통' 을 뜻하는데, 아비달마 불교에서 말하는 3종의 고통에 상당한다. ③ 상응고는 '상호 관련된 고통' 을 뜻하는데, 다른 고통과 연관되어 발생하는 고통을 가리킨다.
그러나 대승 불교는 위와 같은 견해는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차원에서 고통을 취급한 것이다. 대승 불교에 이르면 부처의 경지의 경지나 부처의 국토가 적극적으로 설해지게 되고, 번뇌든 고통이든 깨달음이든 자체의 성질이 없는 것이고 공(空)이므로 고정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견해가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번뇌가 곧 깨달음'〔煩惱卽菩提〕이라든가 '세속의 사바 세계가 곧 열반의 부처 세계' 〔娑婆即寂光土〕라는 말도 등장했다. 여기서는 고통이 최대의 관심사는 되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대승의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무상 · 고 · 공 · 무아' 라는 기존의 인식과는 반대로, 부처가 '상(常, 영원한 지속) · 낙(樂, 즐거움) · 아(我, 불변의 자아) · 정(淨, 청정)'이라 하여 오히려 즐거움이 강조된다. 이리하여 고통을 중심 과제로 삼았던 4제설도 점차 소승의 가르침으로 간주되어 갔다.
대승 불교 초기에는 '공' 의 사상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중관(中觀) 학파의 대표자인 나가르주나〔龍樹〕는 고통이라는 것이 궁극적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고통이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임을 매우 정밀하게 고찰하고 있다. 《중론》(中論) 제2장 <고통의 고찰>〔觀苦品〕에서는 고통이 그 자체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또는 원인이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님을 논증하여, 결국 고통이 상호 연관하여 발생하는〔緣起〕 것이라는 이치를 밝힌다. 따라서 《중론》에 의하면, 고통은 연기(緣起)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에 의하여 그것을 끊을 수도 있는 것이며, 만일 고통이 그 자체로 존재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끊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고찰하면 3법인 중의 하나인 '일체개고' 도 연기(緣起)에 의거한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예를 들어 "연기한 것이 아닌 고통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라고 설하는 시구에 대해 "연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해석한다. 이에 의하면 고통은 그 자체로서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호 연관에 의해 발생하여 잠정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위와 같은 견해는 궁극적 진리를 간파하는 입장〔勝義諦〕에서 표방된 것이고, 현실 세계에 고통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불교의 일차적인 목적은 엄연한 사실로 전재하는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다. 고통을 실제로 제거하는 방법도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의 2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말 그대로 단지 고통을 제거하는 것과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승 불교의 입장은 고통이 제거된 상태인 열반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대승 불교는 열반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을 발전시켰다.
《법화경》(法華經)에 의하면, 열반은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실하고 평등한 모습〔諸法實經〕이라는 사실을 실현하는 것과 같다. 《능가경〉(楞伽經)에서는 생사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윤회 세계와 열반이 평등함을 주장한다. 이런 관점은 유식(有識)학파와 증관 학파에서도 인정된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고통은 깨달음의 세계인 열반과 동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이 현실의 삶에서 고통을 인식하는 것은 그것이 열반과 동일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이라는 인식을 그것이 곧 열반의 세계라는 인식으로 전환함으로써 고통이 제거될 수 있지만, 미혹에 싸인 중생으로서는 그런 인식에 쉽게 도달할 수 없다. 대승 불교는 바로 이 점에서 보살의 자비 정신을 강조한다.
현실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자비' 의 정신이다. 자비의 실천은 대승 불교의 구도자인 보살의 이상에서 점점 강조되어 갔다. 자비의 실천자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괴로워하는 사람' 이다.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에 의하면, 구도자는 중생에 대해 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대신하여 고통을 감내하는 정신을 품는다"라고 말한다. 또 "보살은 모든 생명체를 위해 생사의 세계에서 일체의 고통을 기꺼이 받는다" 고도 말한다. 일체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삼겠다는 서원(誓願)은 드디어 수행자로 하여금 스스로 열반에 들어가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게 하기에 이른다. 후세의 대승 불교에 의하면, 구극의 경지에 도달한 수행자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의 상태에 있다. 그는 생사와 열반이 별개의 다른 것이라고는 보지 않기 때문에 그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진실한 지혜〔般苦〕를 지니기 때문에 생사에 머무르는 일이 없다. 또 자비를 지니기 때문에 중생 제도에 노력하고, 열반에 머무르는 일도 없다. 만약 그가 생사를 분별한다면 생사에 머무르는 것이 된다. 열반을 분별한다면 열반에 머무르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어 아무것도 분별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에게는 머물러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몸은 생사윤회의 경계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하여 자유의 경지를 얻고 있다. 온갖 형태의 신체로 자신을 드러내어 항상 중생 제도에 노력하는 일에 싫어하는 경우가 없다. 관음(觀音) 보살이나 지장(地藏) 보살은 이러한 이상의 전형적인 구현이다.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하는 대승 불교는 그 당연한 귀결로서 국가적 혹은 민족적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금광명경》(金光明經)의 <왕론품>(王論品)에서는 국왕이 법을 실행하는 데 태만하여 자신의 영토에서 일어나는 온갖 악행을 간과한다면, 악행이 만연하여 국토에는 거짓과 투쟁이 횡행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악행이 만연하면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존중되고, 성실한 사람이 경멸된다고 한다. 또 전란이 일어나 적군이 침략해 오고, 큰 연못이 코끼리에 의해 황폐해지듯이 국토는 유린되며, 가족은 흩어지고 즐거움은 사라진다고 한다. 따라서 국왕이 되는 자는 "자기를 위해 타인을 위해 또 영토에 법을 실현하기 위해" 생명과 왕위를 버려도 좋다는 각오로 정치에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도 가르친다. 이와 같이 대승 불교에서는 고통에 대한 인식의 문제보다도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비 정신의 실천을 강조함으로써, 고통을 자비 구현의 이유로 간주하였다.
고관(苦觀)의 의의 : 인도의 종교와 철학은 사물의 기존 질서에 대한 정신적 불편 · 불안인 고통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달리 말하면 고통인 악의 근원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이것을 완전히 극복할 수단을 찾기 위해 세계의 특성,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사색한다. 현실 세계를 고통으로 관찰하므로 언뜻 보아 염세적이지만, 그런 자각을 출발점으로 삼아 철학적 사색과 종교적 실천에 의해 고통의 윤회 세계를 초월하여 해탈의 경지를 실현코자 한다. "낙천주의는 염세주의보다 더 비도덕적인 듯하다. 염세주의는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반면, 낙천주의는 우리를 달래어 거짓된 안정으로 이끌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하는 주장을 고려하면, 고통의 인식을 강조하는 염세주의는 무비판적인 낙천주의보다 건전하다. "염세주의는 인도 철학의 시작이지만 중국은 아니다" 라는 단언은 특히 대승 불교에서, 고통에 대한 관념의 전환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불교에 의하면 인간의 고통은 어디까지나 진리에 관한 자신의 무지인 무명(無明)에 근거하여, 미혹한 생존 또는 악행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다. '성자가 관찰하는 네 가지 진리' 라는 뜻에서 4성제(聖諦) 또는 4제라고 불리는 교리에서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는 그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인정하라고 가르친다. 이와 아울러, 고통이라는 현실과 그 원인을 파악하게 될 때, 당연히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이상의 경지와 그 방법을 찾게 될 것이라고 하여, 그 경지와 방법을 각각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로 제시한다. 고통으로 가득찬 현실인 중생의 세계는 각자의 각성과 노력을 통해 즐거움으로 가득찬 이상인 부처의 세계로 전환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대승 불교에 이르면, 고통인 현실을 여실히 파악해 들어갈 때, 그것은 곧 공(空)임을 깨닫게 되어 결국 열반의 세계가 열린다고 고통에 관한 가르침을 이해한다. 이처럼 불교의 고관(苦觀)은 고통스런 현실의 인식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열반이라는 이상 실현의 전제로서 중시된다.
고통이라는 현실은 또 한편으로 자비를 실천해야 할 이유가 된다. 궁극적 진리의 차원에서 고통의 세계가 곧 열반의 세계임을 체득한 보살은, 그 어느 곳에도 걸림이 없이 세속적 진리 차원에서의 고통에 시달리는 범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는 것' 이 보살의 특성이라고 말한다.
※ 참고문헌  Kapil N. Tiwari(ed.), Suffering, Indian Perspectives, Delhi, Motilal Banarsidass, 1986, pp. 145~174/ 佛教思想研究會 編, 《苦》, 第一券, 增補增訂版, 東京, 世界聖典刊行協會, 1974, pp. 633~634. 〔吳將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