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결 · 청빈 · 순명의 세 가지 복음적 권고(consilia evangelica)를 준수하면서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 및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성령의 감도를 받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시작되는 봉헌 생활.
I . 수도회와 수도 생활의 역사
〔기 원〕 창설자의 생애와 영성을 따라 하느님의 사랑을 특별한 방법으로 증거하며 살아가는 수도 생활의 기원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수도 생활 은 제도적 교회의 결정이나 구체적인 필요성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총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모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 다.
수도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창시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고 그의 말씀 안에 수도생활의 특성이 될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다.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 (마태 19, 12)이나 "당신이 완전해지려고 하면 가서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마태 19, 21)나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마르 9, 34)라는 말씀은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수도 생활의 열망을 키우는 불씨가 되었다.
수도 생활은 복음을 더 철두철미하게 실천하려는 열망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도 시대부터 이미 동정 신분을 통해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음을 볼 수 있다. 사도 행전 21장 8-9절에서는 일곱 부제 가운데 하나인 필립보의 딸들 중에 결혼하지 않고 가이사리아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 여자 예언자로 주님의 일에 헌신하였다는 내용을 볼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과 동정 생활의 종말적 가치를 가르친 사도 바오로는 수도자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가 박해를 받던 시기에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순교를 각오한 영웅적인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다른 신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박해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을 때 금욕자들이나 동정자들 중에서는 하느님께 온전히 몰두하며 영웅적인 덕행을 실천하기 위해 광야나 사막에 머무르면서 하느님만을 위한 삶을 살기도 하였다. 또한 세속을 떠나려는 열망을 느끼지 않고 도시에 머물기를 원하는 동정자들 중에는 독신 생활을 피흘림이 없는 '백색 순교 로 보았으며, 독신 생활로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 주님 뜻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생활로 여김으로써 교회 안에 동정자들의 무리가 많아지게 되었다.
현대의 연구에 의하면 수도 생활은 2세기 중엽 여러 지역에 현존하고 있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거의 동시에 자발적인 형태로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시작된 이러한 생활은 팔레스티나 동부와 시리아 등지에서도 거의 동시적으로 시작되었고, 이렇게 시작된 금욕 생활은 곧 동방과 서방 지역으로 두루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 생활의 성격이 서서히 뚜렷해진 것은 교회 내에서 금욕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고행자들은 지역 교회와 그 조직의 일부로서 머물렀으나, 수도자들은 외딴 곳으로 물러가 살았다. 외딴 곳의 정도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는데, 세속을 떠나 외딴 사막에서 지내거나 여럿이 모여 대수도원을 만들어 지내기도 하였다.
〔은수 생활의 시작〕 박해 시기에 일부 사람들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더 온전히 몰두하려는 열망으로 은수(隱修) 생활(vita eremitica temperata) 또는 독거(獨居, 혹은 獨修) 생활(vita anachoretica)을 시작하였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을 수도자로 볼 수 있다. 교회 역사상 첫 은수자(eremita)는 이집트 출신의 성 바오로(229~342)이고, 은수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수도승들의 아버지'라고 불린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251~356)이다.
이집트의 부유한 농부 가정에서 태어난 성 안토니오는 20세 무렵 부모를 여의었는데, 어느 날 기도하던 중 마태오 복음 19장 21절의 말씀을 듣고 감명을 받아 복음 그대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 뒤 인근에 살던 동정녀들에게 여동생을 맡기고 고향 가까이에 있는 어떤 은수자 밑에서 엄격한 생활을 하며 마귀와의 투쟁을 계속하였다. 안토니오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자기 방식대로 알아듣고 우직하게 실천하였지만, 이러한 생활을 오래 계속하자 자연히 그의 명성이 사방에 퍼져 많은 제자들을 두게되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 (2데살 3, 10)는 말씀을 새기면서 그는 엄격한 고독의 훈련 속에서도 노동을 통해 자신의 생계를 꾸리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그의 생애에는 두 가지 강조점이 있는데, 하나는 덕행의 진보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한 독거(獨居)를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영성의 핵심은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의 모방, 승리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 마귀와 대결하신 그리스도의 투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야 할 신뢰심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안토니오의 생애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아타나시오(296?~373)가 《안토니오의 생애》(Vita Antonii)를 저술함으로써곧 서방 세계에 수도 생활의 이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공주 생활] 은수 생활은 시간이 지나면서 단점을 드러냈다. 그리스도를 따라 완덕의 삶을 살고 싶은 열망으로 시작되었지만 지도자 없이 혼자서 하는 생활에서 덕 에 진보하기보다는 오히려 생활 안에서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극단의 방향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사막의 은수자들 중에는 이러한 삶의 중용을 지키지 못 해 덕에 진보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상한 형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지혜와 덕행을 겸비한 스승의 지도 아래 수도 생활을 해야 한다는 실천적인 깨달음 을 얻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집단 은수 생활인 '공주(共住) 생활' (vita coenobitica) 형태의 수도 생활이 등장하였다.
성 파코미오 : 미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파코미오(290~346)는 군 복무 중 그리스도교 신자 병사들의 모범적인 봉사 생활에 감동하여 세례를 받고 은수 생활을 시 작하였다. 그러다가 은수 생활의 단점을 깨닫고 제자들을 모은 뒤 그들이 모여 살던 오두막집들을 울타리로 둘러막았다. 이로써 교회 역사상 첫 공주 생활이 시작되었 는데, 폐쇄나 격리를 뜻하는 수도승원(monasterium)이라는 말은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 수도승들은 각자의 직업에 따라 수십 명씩 여러 수도승원에 나누어 살면서 하루에 두 번 공동으로 기도하고 식사를 하였다.
파코미오의 이상은 사도 행전 2장과 4장에 나타나는 초대 교회의 형제적 생활(κοινωνία)을 재현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가장 중요시한 것이 바로 순명이었다. 이에 그는 수도 규칙서를 집필하면서 질서 잡힌 공주 생활의 구조, 복음적 유순함을 지향하는 깊은 영감, 특히 규율을 바탕으로 제시되는 모든 이에 대한 애덕의 정신 등을 강조하였다. 당시까지의 수도승 생활의 기원은 안토니오를 비롯한 문맹인들 아니면 반문화인들로 이루어졌으나, 오늘날 터키에 있는 가빠도기아인들로 인해 수도 생활은 문화에 바탕을 둔 전통의 상속으로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성 바실리오 : 가빠도기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은둔소에 은거하면서 하느님만을 찾는 생활을 하던 바실리오(329~379)는, 가이사리아의 대주교가 된 370년 이후 성서에 근거하여 새로운 수도 생활의 개념을 창출해 내면서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바로 수도 생활이라고 정의 내렸다. 즉 그에게 있어서 수도 생활은 복음적 권고들을 지키는 특수한 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이상을 실천하는 가장 좋은 생활이었다. 그래서 바실리오는 비교적 개방된 수도원을 세웠고,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등 자선 사업을 하였다. 그는 은수 생활보다는 공동 생활의 측면을 더 강조하였던 것이다.
〔수도승 생활〕 이집트의 수도승 생활을 서방 교회에 처음으로 알려 준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297~373)였으며, 암브로시오(340~397) · 예로니모(342~420) · 아우구스티노(354-430)에 의하여 수도 생활이 서방에서도 장려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에 의해 유럽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된 성 베네딕도(480?~547?)는 서방 교회 수도자들의 선조로서, 처음에는 은수자였으나 529년에 몬테 카시노에 큰 수도승원을 설립하였다.
베네딕도가 수도 생활의 새로운 개념으로 도입한 것은 정주(定住, stabilitas) · 수도승다운 생활(conversatio morum) · 아빠스에게 순명함이었다. 정주란 수도원에 들어와서 한 번 서원하고 나면 다른 수도원으로 옮겨 갈 수 없다는 의미이고, 수도승다운 생활이란 '회개' 의 삶을 약속하고 생활을 바꾸어 세속적인 생활과는 이별한다는 뜻이다. 또한 베네딕도에게 있어서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완덕의 길로 나아가는 데 안내를 받기 위해 영적 아버지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베네딕도 규칙서》는 서방 교회 최초의 수도 규칙도 아니고 유일한 수도 규칙도 아니지만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미친 영향은 다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리고 베네딕도의 공로는 동방 교회의 수도 생활 양식을 서방 교회의 조건에 적응시킨 데 있었으며, 그의 수도 규칙은 지나친 엄격성을 피하고 분별력과 신중성과 중용의 정신을 담고 있다.
베네딕도 이후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1090~1153)까지를 '수도자들의 시대' 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에 수도자들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역할을 하였다. 수도자들은 영성적 차원은 물론 지적 · 예술적 · 경제적 · 문화적 차원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수도 생활의 쇄신〕 9세기 말부터 10세기 초에 걸쳐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은 전반적으로 쇠퇴하였다. 즉 해적들에 의해 수도자들이 살해되었고, 파괴되지 않은 수도원들은 평신도들의 손에 넘어가 귀족과 영주들이 아빠스 역할을 하며 수도자들을 착취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부패가 심해지자 클뤼니(Cluny)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도 생활에 대한 쇄신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쇄신운동은 이 수도원 출신의 훌륭한 총원장들의 영향으로교회 내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적 힘을 지니게 되었다. 9세기에 수도 생활이 쇠퇴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수도 생활이 세속 권력과 교회로부터 부당한 간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수도 생활의 자율성을 강력히 주장하며 이를 위해 수도 규칙의 엄격한 준수와 고행을 통해 수도자 자신을 쇄신시켜 나갔고, 이들의 쇄신된 모습은 교회 쇄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네딕도회 내에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일어나 여러 수도승원들이 연합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베네딕도의 규칙을 엄격히 지키려는 수도승원들이 연합회를 구성하였는데, 10세기의 클뤼니 연합회, 1012년경의 카말돌리 연합회, 1084년의 카르투지오회 등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098년 몰렘(Molessme)의 아빠스 성 로베르토에 의해 시작된 시토(Cîteaux)회였다. 이 연합회의 제3대 아빠스였던 하딩(S.Harding)은 수도 생활 역사에서 최초로 작성되었고 또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사랑의 헌장》(ChartaCaritatis)을 작성했는데, 이 문헌에는 전체적으로 깊은 사랑이 배어 있으며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시오. 사실 남을 사랑하는 이는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 13, 8)라는 주제를 일관성 있게 다루었다. 시토회는 12~13세기에 크게 발전하여 황금기를 구가하면서 교회와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의전 수도회의 활동〕 교구 성직자들의 자유로운 생활이 여러 면에서 문제가 되자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메츠(Metz)의 주교 크로데강(Crodegang)은 750년경에 자신의 교구 성직자들을 위하여 《참사 위원 제도서》(Institutio Canonicum)를 만들었다. 이 수도 규칙서는 일반 수도자들과는 달리 성직자들의 개인 재산 소유를 인정하면서 공동 기도 · 공동 숙소 · 공동 식사 등을 정해 공동 생활의 체험을 통하여 성직
자들이 받기 쉬운 세속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함은 물론 영적 생활의 강화를 목표로 하였다. 이 회원들의 생활은 양쪽 생활, 즉 수도 생활과 사목 생활을 혼합하여 조화시키는 것이었는데, 과거의 수도 생활이 회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속으로부터 분리시킨 데 반하여 이들은 세속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회 안으로 파견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수도회로는 성 노르베르토(1080-1134)가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하면서 사목 특히 설교와 경고를 주 임무로 설립한 프레몽트레 수도회와 이단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설교를 주 임무로 하는 도미니코 수도회가 〔기사 수도회의 설립〕 기사 수도회들은 십자군을 계기로 설립되었는데, 이는 수도 생활과 군인 생활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였다. 대표적인 수도회로는 1120년에 기사 수도회로 개편된 '요한 기사 수도회' 와 프랑스 기사들이 1118년에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에서 설립한 '성전 기사 수도회' , 그리고 독일인들에 의해 병자 간호 사업의 형제회로 발족되어 1198년에 개편한 '독일 기사 수도회' 가 있다.
〔탁발 수도회들〕 12세기 후반부터 유럽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의 노력과 그 뒤를 이은 개혁으로 교회는 황제들의 권력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고, 13세기부터는 봉건 제도가 쇠퇴하면서 제후나 영주들의 지배에서 벗어난 농노들이 모여서 민주적 성격의 사회 조직(commune)을 만들었고 화폐 경제 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것을 계기로 사회가 개방적이고 활동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각 도시마다 시민 교육을 위한 학교를 만들어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문화의 세계는 교회와 수도원의 경계를 넘어 사회 전체에 퍼지게 되었고, 그 결과 사람들은 수도원보다는 사회 운동 단체의 영향을 더 받게되었다. 또한 5세기부터 사라졌던 이단적 사상들이 다시 생겨나 해이해진 교회 생활에서 발생하는 성직자들의 부패나 결점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여기에 동조하자 사람들을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변화와 요청에 부응하여 탄생한 것이 탁발 수도회(ordo mendicans)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프란치스코회 · 도미니코회 · 가르멜회 · 아우구스티노회 등 이었다. 이들은 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면서 동낭과 희사에 의지하여 살았고, 명상 생활과 함께 사목 직무나 사도직 수행을 임무로 삼았다.
프란치스코는 20세 때 기사가 될 작정으로 전쟁에 참가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감옥 생활을 한 후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과거의 생활 습관을 멀리하고 기도와 사색의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여러분의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지니지 마시오. 길을 떠날 때에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시오"(마태 10, 9-10)라는 성서 말씀에 감명을 받아 복음을 삶의 원칙으로 삼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는데, 그의 영성은 '소수성' (minoritas)과 '가난' (paupertas)의 강조에 있었다. 그는 회칙에서 "형제들은 집이나 장소나 어떤 물건, 그 어느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Regula Bullata, 6, 1)라고 하면서, 수도원은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이 세상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순회 설교자로 살아가면서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와 그 제자들의 모습을 재현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들의 겸손하고 열렬한 생활은 기성 교회에 실망하고 있던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교회 쇄신과 선교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수행 성직자 수도회의 설립〕 성직자 생활을 한 후 수도자 생활을 하는 수행 성직자 수도회는 16세기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때 생겨났는데, 대표적인 수도회가 테아티노회(Theatim)와 예수회였다.
특히 로욜라의 이냐시오(1492~1556)는 전통적인 수도생활 형태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수도원을 수도자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개념에서 탈피하여 복음 선포를 위한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고, 전통적으로 수도 신분의 필수적인 표지로 여겨지던 수도복 · 가대(歌隊) · 수도원 전례 및 형제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개념에서 벗어나 고도의 기동성(mobility)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고안한 '영성 수련' 을 통하여 공동체에서 이탈된 상태에서도 영적인 활력을 충전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이런 예수회의 정신과 조직은 그 후 창설되는 수도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하지만 예수회는 탁발 수도회보다 더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였으며, 회원들의 철저한 순명과 학문 연구를 요구하였다.
〔단순 서원 수도회의 설립〕 16세기 이후 장엄 서원 수도회의 재속 3회가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기한부 서원을 하고 만기가 되면 다시 기한부 서원을 하는 신심 단체로 발전하였다. 이 신심 단체들은 단순 서원을 하는 수사회와 수녀회로 발전하였는데, 병자 간호를 주 임무로 하는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신심 고취를 위해 노력하는 예수 고난회, 청소년 교육을 주 임무로 하는 살레시오회 등이 대표적인 수도회이다. 이 수도회들 중 일부는 성직자 없이 수사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여성들의 수도 생활〕 중세 시대 남녀 수도자들의 비율은 현재와는 반대로 5 : 1 정도로 여자들이 열세였는데, 그 이유는 여자들의 수도 생활은 오직 봉쇄 생활 안 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복음을 살고자 하는 동정녀들의 단체는 초기 교회부터 있었다. 바실리오의 여동생 마크리나(Macina)는 오빠가 시작한 복음적 삶에 동참하기 위하여 어머니와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자기 가족 소유지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고, 베네딕도의 여동생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오빠의 도움으로 수녀원을 창설하였으며, 중세 시대에 성녀 글라라는 영적 스승인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와 영성에 동참하는 수녀원을 창설하였다.
또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지키는 수녀회와 아우구스티노의 수도 규칙을 지키는 수녀회, 그리고 가르멜 수녀회등이 생겨났다. 그러나 모두 다 봉쇄 생활을 하였으므로, 여자들이 봉쇄 생활을 벗어나 현대와 같이 사도적 생활에 자유롭게 투신하기는 어려웠다.
여자 단순 서원 수도회는 이탈리아에서 메리치(Angela Merici, 470/1474~1540)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녀는 가정에서 동정 생활을 하면서 버려진 어린이들과 여성들을 돌보며 복음을 살아가는 모임을 시작하였다. 당시에 수녀는 봉쇄 수녀원의 수녀들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여건에서 세상 안에서 수도 생활을 하려는 그녀의 이상은 많은 어려움과 도전을 받았다. 하지만 지혜로운 처신과 조직으로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그녀의 이상과 완전히 부합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 안에서 사도적 삶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우르술라(Ursula)회를 창설하였다. 이들은 르네상스 이후 급격히 세속화되어 가던 유럽 사회에 필요한 복음적 봉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것이 여성 활동 수도회의 효시가 되어 현대에 와서는 과거와 정반대의 현상으로 많은 회원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 후 여러 창설자들에 의해 여성 수도생활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면서 시대가 요청하는 복음적 징표의 증거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베네딕도 14세 교황(1740~1758)이 단순 서원 수녀회를 승인한 이후 매우 많은 수녀회들이 설립되었으며, 남자 수도회와 같은 정신에 따라 생활하는 수녀회들도 많이 설립되었다.
〔사도 생활단〕 근대에 들어와서는 수도회와 비슷하지만 공식적인 수도 선서를 하지 않고 공동 생활을 하는 단체 즉 사도 생활단이 생겨났다. 1625년에 프랑스에서 설립된 선교 수도회를 비롯하여 빈천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1633), 파리 외방전교회(1658), 메리놀 외방전교회(1911), 골롬반 외방선교회(1917) 등이 여기에 속한다.
[재속회] 수도 생활은 시대의 복음적 요청에 대한 하느님의 해답이며,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창설자들을 통해 변화된 시대 상황 속에서 꼭 필요한 증거의 삶을 살아갈수 있도록 안배하신다. 프랑스 대혁명 후 교회에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이 요청되었을 때 재속회가 탄생한 것도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재속회는 기존 수도회처럼 복음을 살기 위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복음적 삶을 사는 것이다. 프랑스 예수회 회원인 드 클로리비에르 DeCloriviere, 1735~1820) 신부가 1791년 교구 활동을 위해 성직자 중심의 재속회를 조직한 것을 효시로 20세기에 들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여러 재속회들이 생겨났는데, 그중에서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제멜리(Agostino Gemelli) 신부가 창설한 '그리스도 왕직 사도회' (Le Missionarie della Regalità di Nostro Signore Gesu Cristo)가 현대 세계에서 재속회의 위상을 부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제멜리 신부는,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는 수도 생활은 수도원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디서나 가능하다는 것과 극단적인 세속화로 치닫고 있는 현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여느 사람들처럼 가정 안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주위에 복음적 증거와 향기를 풍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당시 재속회에 대한 지식이나 계획이 전혀 없었던 교회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재속회를 시작하였으며, 현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복음적 삶의 양식을 세상에 제시하였다. 현대에 들어와서 지역 사회의 특성이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수도회나 소외되었던 선교지에 봉사하기 위한 수도회, 특히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도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며 살고자 하는 수도회들이 다양하게 탄생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캘커타의 데레사 수녀(1910~1997)가 인도에서 만든 '사랑의 선교 수녀회' (Missionaries fChanty)인데, 이러한 수도회들은 시대가 필요로 하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통해 복음적인 영향력을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증거하고 있다.
II . 수도 생활 신학
수도 생활은 더 고귀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 염원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인간들을 초대하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을 온전히 따르고 싶은 열망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서약을 통해 세례성사의 의미를 심화하고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수도 생활은 복음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꾸렸던 삶을 서약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느님 아버지의 부르심과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며 갈라지지 않은 마음 (1고린 7, 34)으로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려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특별한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사도들처럼 그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고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그들은 하느님과 형제 자매들을 섬기는 봉사에 자신을 바치려고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봉헌 생활> 1항).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수도자뿐만 아니라 성직자나 평신도들도 나름대로 고유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 평신도는 그들 소명의 세속적인 성격으로 육화하신 말씀의 신비를 반영하며, 성직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가운데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목자의 역할을 위해 부름을 받는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만물이 지향하는 종말론적 목표이시고, 그 앞에서는 모든 빛이 바래는 광채이시며, 홀로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무한히 아름다운 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부름을 받는다.
수도자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전인적 투신을 통해 그리스도께 전 실존을 동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과 추종을 실천하고 표현하는 것이다(<봉헌 생활> 16항). 수도자들은 복음적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자신들 삶의 모든 의미로 삼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이 지상 생활을 통해 보여 주신 그 생활을 자신들이 몸담고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재현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고유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더 우월하게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할 수는 없는것이다. 즉 모두 하느님 나라를 서로 다양한 방법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모든 수도회 창설자들은 그들이 살던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영성과 삶을 일으킴으로써 교회 안에 필요한 생기를 불어넣었다. 창설자의 삶과 영성을 따르는 수도자들의 삶은 항상 새로움을 증거할 수 있으며, 수도자들은 창설자의 삶과 영성을 자신들의 상황에서 재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수도 생활의 유일한 기준점과 당위성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수도자들이 복음적 권고의 서약을 통해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복음서에서 명백하게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구절들은 발견할 수 없다. 청빈과 정결과 순명을 권고하는 구절들은 있지만 반드시 수도자들에게만 한정된 내용은 아니며, 모든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거나 아니면 독신의 권고(마태 19, 10-12)처럼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복음을 총체적으로 살고자 하였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는 수도 생활 형태의 생활을 찾게 된다.
즉 수도 생활은 복음을 철두철미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요청되는 삶의 형태이다. <교회 헌장>(LumenGentum)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다 성덕에 부름을 받고있다는 성화 성소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42항), 보다 완전한 신자로서의 삶의 형태로 수도 생활을 제시하고 있다(44항). 이처럼 수도 생활은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 바치면서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세례의 의미를 심화하여 살아가는 삶이다.
현대에 와서는 수도 생활을 비유의 관점에서 보기도 한다. 성서에서는 예수가 말씀으로 들려준 비유 외에 행동으로 보여 준 비유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최후 만찬에서 자신이 가르친 봉사의 의미를 확인시키기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이나 잔치에 가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한 것 등이다. 예수의 이러한 모든 비유적인 행동은 하느님 나라의 증거를 겨냥한 것이므로, 이런면에서 수도 생활 역시 하나의 비유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수도자들의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도 생활은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는 힘차고 설득력 있는 비유이다. 이런 관점에서 수도 생활이 다른 생활과 구분되는 특징은, 어떤 특별한 내용을지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은유적 표현을 통하여 복음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는 것이다.
Ⅲ . 수도 선서
수도자들은 복음적 권고의 실천을 위하여 '복음 삼덕'(福音三德)이라고도 하는 청빈 · 정결 · 순명의 서약을 하게 된다. 이것은 복음을 더 철저하게 살고자 하는 염원들이 역사의 흐름 안에서 집약된 것으로, 이를 선서하는 목적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주권을 회복하여 하느님이 원래 요청하신 사랑의 삶으로 초대하는 데 있다. 그렇지
만 수도 생활의 역사에서 수도 선서가 등장한 것은 후대에 와서였다. 초기 수도자들은 자유롭게 의지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을 의무로 실천한다는 데에 부담을 느껴 선 서를 하지 않았었다.
수도 선서는 생활 양식을 정하는 서원이었고,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것을 극단적으로 구현하는 약속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수도 생활을 '축성 생활' (vita consacrata)이라고 부르듯이 수도자는 하느님의 뜻대로 쓰이기 위해 하느님의 몫으로 따로 떼어 축성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수도자란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성된 사람이고 하느님께 헌신된 사람"이라고 하면서 전적인 축성이 되도록 세상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는 뜻을 포함시켰다. 이집트의 공주 수도자들은 이런 관점을 포기(apotaxia)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수도 선서는 인간 삶의 세 가지 중요한 요소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것으로, '청빈 서약' 을 통해서는 인간의 삶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요청되는 물질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정결 서약' 을 통해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상호성의 차원을 심화시키며, '순명 서약' 을 통해서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성을 규명한다. 이 세 가지 서약은 하느님을 향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자 하는 단일한 헌신으로 집약되며, 이 서약은 인간들이 착안해 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온전히 살고자 했던 역사의 많은 시도들을 통하여 얻어진 결실이다. 복음 권고는 청빈 · 정결 · 순명의 삶을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삶에 동참하도록 일부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이 권고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동화되고자 하는 명백한 열망을 요구하고 또 그 열망을 드러내 준다(<봉헌 생활> 18항). 이것은 또한 예수의 생활 방식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실천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삼위 일체적 차원을 수용하고 있다. "복음 권고는 성령과 일치 안에서 성부께 대한 성자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봉헌된 사람은 복음 권고를 실천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특징인 삼위 일체적 · 그리스도론적 차원의 삶을 강도 높게 살아갑니다"(<봉헌 생활> 21항).
〔청 빈〕 청빈은 인간 욕망의 근간인 소유를 포기함으로써 하느님을 삶의 우선순위로 선택하는 것이다. "청빈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인간의 참 부요임을 선포합니다. '부요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신' (2고린 8, 9)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청빈을 실천할 때, 그것은 하느님의 세 위격이 서로 내어 주시는 완전한 자기 봉헌이 됩니다. 이 완전한 자기 봉헌은 창조 안으로 넘쳐 들어가고, 말씀의육화와 그 구속 행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납니다"(<봉헌생활> 21항).
청빈은 또한 지상의 그리스도가 살았던 삶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필립비서의 그리스도 찬가' (2, 6-11)에 나타나는 것처럼 그분은 더
없이 풍요로운 하느님의 아들이었지만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열악하고 빈곤한 처지에 동참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이 점을 이렇게 강조하였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당신의 가난으로 여러분이 부요하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2고린8, 9). 여기에서부터 모든 실제적인 외적 가난의 뿌리, 즉 인간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재물과 자신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가난의 외적인 증거가 드러나게 된다. 이런 가난이나 빈곤은 하느님 아버지와 자기의 형제가 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위해 자발적인 포기를 선택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청빈은 또한 예수가 선택한 봉사의 삶의 진면모이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 러 왔습니다"(마르 10, 45). 예수는 이러한 결단을 통하여 최고의 가난뱅이가 되었고, 누구도 그분을 따를 만큼 이런 포기를 실천한 사람은 없다.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1고린 1, 23)인 십자가의 죽음에서 가난의 절정을 사셨다. 물질적 가난뿐만 아니라 인간적 · 사회적 · 정치적 모든 면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기본적인 품위나 권리조차 다 포기하고, 정치적으로는 빌라도에게, 종교적으로는 산헤드린에서, 심지어는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았기에 외롭지 않다고 했던(요한 16, 32),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신 성부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는 극도의 절망감도 체험하였다. 수도자들의 청빈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함으로써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계승하게 한다.
청빈은 사회적 빈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과 함께 재물에서 이탈하도록 하기 때문에 극단의 궁핍과 풍요를 아울러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게 만든다.
"나는 궁핍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나는 어떤 일,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게 힘을 주시는 분을 통해서 나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필립 4, 12-13). 이처럼 복음적인 가난은 결핍이나 옹색함만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의 양면성을지니고 있다.
또한 수도자의 청빈은 외적인 것 이전에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살았던 삶의 내적인 중요한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키는 가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로서 특히 현대에 존중되는 것이다. 수도자들은 이 청빈을 열심히 수행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새로운 양식으로도 표현할 것이다"(수도13항). 수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른 청빈을 살아감으로써 가난과 비참에 시달리고 있는 주위 사람들의 절박한 요청에 응답하면서 세상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악과 비참으로서의 가난 추방에 동참하게 된다. "빈자들의 호소는 일부 수도자들을 움직여 가난한 이들과 같은 처지에서 같은 고통을 겪도록 요구한다.··마침내 빈자들의 호소는 수도자들에게 현세 사물의 사용을 직무 수행에 불가결한 정도로 한정하기를 요구한다"(교황 바오로6세의 교황 권고 <복음의 증거> 18항). 또한 현대 수도자들은 가난의 표현을 수덕적인 차원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적 차원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 결〕 정결은 마태오 복음 19장에 언급된 하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결혼을 포기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본받으며 따르려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그리스도의 독신이 매력적인 부분으로 와 닿게 되는데,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 7장에서 독신 생활에 대한 권고를 피력하였다. 이것은 그의 서간에서 독신 생활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부분으로, 그는 여기에서 결혼 생활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독신으로 하느님의 일에 온전히 헌신하며 살고 있는 자기 삶의 보람을 전하면서 이렇게 권고하였다. "내 마음 같아서는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각자는 하느님께 제 나름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7, 7). 또한 그는 종말의 임박한 상황을 생각해서 독신자들은 독신 상태로 지내는것이 더 낫다고 권고하고 있다. "결혼하는 이도 잘하는 것이며, 결혼하지 않는 이는 더 잘하는 사람입니다" (7,38). 이처럼 하느님의 일에 온전히 몰두하기 위해 수도자들이 선택하는 정결은 종말론적이며 교회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수도자들은 "누구나 이해하지는 못하고 오직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이해" (마태 19, 11)할 수 있는 독신의 권고를 정결 서약으로 수용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해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수도 생활을 평가하며 새로운 쇄신을 향한 길잡이로 작성한 교황 권고 <복음의 증거>에서 수도자들의 정결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수도자들이 독신 생활로 지켜 오는 정결의 가치와 풍요성은 다른 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느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 모친 동정녀의 생활, 사도적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교회는 변함없이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정결은 의심 없이 일정한 사람에게만 허락하시는 성부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인간의 약함 때문에 깨지기 쉽고 상하기 쉬운 것이며, 인간 이성으로는 때에 따라 모순같이 여겨지고, 육화하신 말씀께로부터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마태 10, 39 ; 16, 25 : 마르 8, 35 : 루가 9, 24 ; 요한 15, 25)라는 진리를 계시받지 못한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해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15항). 수도자들은 정결 서약을 통해 사도 바오로가 "모든 이에 대해서 자유로운 몸이지만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하여 나 자신 모든 이의 노예가 되었습니다"(1고린 9, 19)라고 한 말처럼 자유로운 모습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 자매로 수용하는 우주적 사랑의 삶을 살게 된다.
현대 신학자 보프(Leonardo Boff)는 그의 저서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증언하는 사람들》에서 정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순교가 생명에 대한 멸시가 아니 듯이 정결도 결혼에 대한 멸시가 아니다. 결혼은 새로운 생명을 낳아 주는 이들이 걷는 길, 미래에로, 새로운 인류에 대한 약속에로, 종말론적 인류에로 가는 길을 마련하는 이들이 걷는 길이라면 그 대신 정결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체험이다. 그 영원한 생명이 이미 세상에 현존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결정적으로 드러났음을, 아울러 미래를 현재로 당겨 오고, 약속을 벌써 지금 이 자리에 실현시키고 있음을 믿는 체험이다. 따라서 정결은 더없이 철저하게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증거요 그 신앙이 살과 피로 구현되는 현상이다."
〔순 명〕 성서 어디에도 인간에게 순명하라는 말은 없으나 수도 생활의 근저에는 항상 순명이 자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부르심은 사랑의 초대이며, 이에 대
한 응답이 바로 순명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수도자들은 순명을 통해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필립 2. 8) 그리스도의 모범 을 따르게 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권고 <구원의 은총>에서 수도자의 순명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순명의 복음적 권고는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이러한 순명으로부터 나오는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는 말씀으로 표현된 이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공의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십자가 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시어, 인류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신(수도 14항 참조)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순명의 복음적 권고를 따라 삶으로써, 그들은 구원 경륜 전체의 심오한 본질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권고를 이행함으로써 그들은 그 '한 사람' 의 순종으로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될' 그분의 순종에 특별히 참여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13항).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수도 생활을 하려는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을 "순명 생활로 받아들인다"라고 할 만큼 순명은 수도자들이 선택해야 할 우선적인 덕목으로 보았다. 수도자들은 인간 사이의 질서와 공동체라는 현실적인 구조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수도자의 순명은 다른 인간 집단의 순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곳에는 어디서나 명령하는 사람과 복종하는 사람의 관계성이 생긴다. 하지만 수도 공동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형제들이 모인 공동체이므로, 수도 공동체의 장상은 사회 집단의 으뜸과는 전혀 다른 역할, 즉 자신에게 맡겨진 형제들이 하느님의 뜻을 더 명백히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자신도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자들은 순명 서약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공동으로 탐색하며 살아가야 한다.
또한 순명 서약을 통해 사도 바오로가 제시한 십자가의 역설(1고린 9, 1)을 살아가게 된다.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시오"(로마 13, 8)라는 말씀을 따르는 신자들은 그 어떤 사물에도 매이지 않고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으나, 동시에 모든 사람의 종이며 모든 사물들의 보호자이다. 순명은 장상이나 다른 사람의 원의에 대한 피동적이거나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원의나 요청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유의 행사이다. 순명을 살아가는 수도 공동체의 권위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외적인 명령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위(auctontas)라는 말의 어원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의 음성과 계획을 귀담아 듣게 만들고 명령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한 인격체로 성장하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명은 내적인 자유의 특별한 표현이 된다.(⇦ 복음 삼덕 ; → 가난 ; 기사 수도회 ; 도미니코 수도회 ; 동정성 ; 베네딕도회 ; 봉헌 생활 ; 성전 기사 수도회 ; 수도 규칙서 ; 수도 선서 ; 수도자 ; 수도회 ; 요한
기사 수도회 ; 예수회)
※ 참고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수도 생활에 관한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6/ Leonardo Boff,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증언하는 사람들》, 분도출판사, 1990/ 《봉헌 생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7/ 앙드레 루프, 《사랑의 학교》, 분도출판사, 1987/ R.F. Smith, 《NCE》 12, pp. 287~2941 John M. Lozano, Discipleship. Claret Cemerfor Resources in Spirituality, Chicago, 1985/ Vita Consecrata, Rogate, 1996. [李宗漢]
수도 생활
修道生活
〔라〕vita religiosa · 〔영〕religious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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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은수자인 이집트 출신의 성 바오로와 은수자 중 가장 유명한 성 안토니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