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 본당

水流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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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주임으로 부임한 페네 신부가 1907년 8월에 한국의 고전적 건축 양식으로 완공한 수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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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주임으로 부임한 페네 신부가 1907년 8월에 한국의 고전적 건축 양식으로 완공한 수류 성당.

전주교구 소속 본당. 전북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 223소재. 1889년 봄에 배재〔梨峴〕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 10월 초 성당을 이전하면서 본당 이름을 수류 본당으로 바꾸었다. 주보는 성모 성탄. 관할구역은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상화 · 율치), 금성리(평지 · 시목 · 복호), 정읍군 산외면 상두리(구장) 일대. 관할 공소는 구장리 공소 1개소. 〔교 세〕 1966년 1,498명, 1972 년 1,071명, 1977년 1,558명, 1983년 1,057명, 1988년 823명, 1993년 423명, 1997년 571명. 〔역대 신부〕 초대 베르모렐(J. Vermorel, 張若瑟) 요셉(1889~1893. 4) ,2대 조조(M. Jozeau, 趙得夏) 모이세(1893. 4~1894. 7), 3대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마르첼로(1895. 5~1900.5), 4대 페네(C. Peynet, 裴嘉錄) 샤를르(1900. 5~1920. 6) ,5대 뤼카(L. Lucas, 柳嘉鴻) 루이스(1920. 6~1930. 12), 6대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1930. 12~1935. 6), 7대 최민순(崔玟順) 요한(1935. 6~1937. 2), 8대 석종관(石鍾寬) 바오로(1937. 2~1938. 6), 9대 최재선(崔再善) 요한(1938.6~1942. 2), 10대 이약슬(李若瑟) 요셉(1942. 2~1947. 3), 11대 김영태(金永泰) 도미니코(1947. 4~1950. 4), 12대김후성(金厚星) 프란치스코(1950. 4~1951. 2), 13대 김반석(金盤石) 베네딕도(1960. 3~1961. 4), 14대 김동언(金東彥) 베드로(1961. 4~12), , 임시 범석규(范錫圭) 마티아(1961. 12~1962. 3) , 15대 권영균(權寧均) 안토니오(1962.3~1966. 4), 16대 김반석(1966. 4~1969. 12), 17대 김영신(金英信) 바오로(1969. 12~1974.2), 18대 김정원(金正元) 토마스(1974. 2~1976. 8), 19대 김병엽(金炳燁) 베드로
(1976. 8~1979. 1) , 20대 이순성(李順成) 베드로(1979.1~1982. 2), 21대 유종환(俞鍾桓) 마태오(1982. 2~1985.1), 22대 이성우(李成雨) 마티아(1985. 1~1988. 1), 23대 문선구(文宣求) 비오(1988. 1~1992. 1), 임시 김준호(金俊鎬) 십자가 바오로(1992. 1) 24대 김용태(金容泰) 베네딕도(1992. 1~1995. 9), 25대 박대덕(朴大德) 스테파노 (1995. 9~현재).
〔배재 본당 시기〕 수류 본당은 1889년 베르모렐 신부가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安德里)에 설립하였던 배재 본당이 그 모태로, 이곳 배재에 공소가 설립된 것은 1882년 가을 리우빌(A.Liouville, 柳達榮) 신부에 의해서였다.
그 후 베르모렐 신부가 고산 빼재(完州郡 雲洲面 九梯里, 일명 秀峙)에 거주하면서 1888년 가을부터 1889년 1월까지 전라도 남쪽 지방의 공소 판공을 치렀다.
한편 베르모렐 신부는 이곳 배재가 자신이 담당하는 공소들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사목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외교인들과의 문제도 없어 본당을 설립하기에 편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베르모렐 신부는 1889년 봄에 금구(金構) 배재 공소에 거처를 정하게 되었고, 배재 공소는 곧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56명을 영세시킨 데 이어 안수룰(수류) 공소를 설립하였다. 1893년 4월에는 조조 신부가 후임으로 본당에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있었던 갑오 농민 전쟁으로 인해 7월 27일 성환(成歡)에서 청나라 패잔병들에게 체포되어 공주에서 마부 정보록(바오로)과 함께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한동안 보두네 신부와 비에모 신부가 배재 본당을 임시로 맡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5년 5월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라크루 신부는 본당 발전을 위해서 굳이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같은 해 10월 초, 면 소재지가 위치한 수류로 성당을 이전하였다.
〔수류 이전과 본당 초기 현황〕 새 성당 소재지를 물색하던 라크루 신부는 이영삼 진사의 수류 재실(齋室)을 매입한 뒤 안채를 사제관으로, 행랑채는 임시 성당으로 개조하였으며, 1897년 9월에는 남교우청과 여교우청에 각각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였다. 이처럼 수류에 성당이 마련되자, 그 동안 제대로 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던 각처의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옴으로써 수류는 이제 완전한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에 이어 1900년 5월 4대 주임으로 부임한 페네 신부는 1906년 1월에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8월(음) 48칸의 목조 성당을 완공한 뒤 10월 1일 드망즈 신부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수류 본당은 김제 · 부안 · 정읍 · 순창 · 고창 · 담양 · 장성 일대에 걸친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다. 또 본당에서는 교육 사업으로 1909년 3월에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설립했는데, 설립 당시 학생수는 65명이었고 교사는 3명이었다. 인명학교는 1913년에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1918년에는 여학교도 개교했으나 재정 상태가 빈약하여 학교 유지가 어려워짐에 따라 결국 1928년에 재인가를 받지 못하고 폐교하고 말았다.
한편 5대 주임 뤼카 신부 때에는 성가회(聖家會)에 가입하여 그 규칙을 지키는 가정이 100여 세대나 되는 등 신앙 생활에 열심한 가정들이 많았으며, 그 후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세가 급성장하자 본당에서는 인근의 본당들과 피정 · 성체 거동 행사 등을 합동으로 추진함으로써 공동체 활성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30년 초에는 4곳에 공소를 신설하였으며, 1935년 1월에는 김 토 마스와 최 시몬이 율치 공소에 야학을 설립하여 한글과 경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1937년 2월에 8대 주임으로 부임한 석종관 신부는 이듬해에 원평 공소를 설립하고 공소 강당을 마련하였고, 9대 주임 최재선 신부는 교세 증가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1940년 1월에 있은 김제 · 금산 · 수류 지역 회장과 유지들의 피정 때 각 지역별로 전교사 1명을 더 두기로 결정하였다.
일제 말에 이르러서는 지역민 400여 세대가 모두 신자가 되자 주민 교육은 곧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되었다. 이에 따라 10대 주임 이약슬 신부는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돕는 한편, 관내 유일의 초등학교이던 '화율초등학교 학생들의 교육을 전담시킬 목적으로 1944년 8월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초청하였다. 그러나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본당 신자 50여 명이 사망하였고 성당마저 화재로 소실되었다.
〔성장과 변모〕 한국 전쟁으로 인해 수류 본당 관할 지역은 1951년부터 13대 주임 김반석 신부가 부임해 오는 1960년 3월까지 김제 본당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지역 신자들은 1959년에 성당 · 사제관 · 수녀원을 건립하는 등 본당 승격을 위해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961년 4월 25일 교구의 지시에 따라 김반석 신부는 성당을 교통이 편리한 원평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1966년 4월 8일에 다시 수류로 환원되었는데, 이때 격하된 원평 공소를 1977년 12월에 본당으로 승격시키면서 금산면 · 봉남면 · 금구면 · 정읍군 옹동면 지역을 이관하였다. 한편 15대 주임 권영균 신부 때는 가톨릭 구제회의 지원으로 상화와 복호에 저수지 축조 사업을 벌여 극빈 신자들을 위한 구제 사업을 전개했고, 1980년 6월에는 사제관이 신축되었으며,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을 폐쇄한 지 30여 년 만인 1982년 3월에는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 를 초청하였다. 그리고 1986년 3월에는 성당 내에 생필품 구판장을 마련하여 그 이익금을 주일학교 후원금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1988년 1월에 부임한 23대 주임 문선구 신부는 본당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심 교육을 실시하고 기도 모임을 개최하였는데, 문선구 신부가 이끌어 온 각종 기도모임과 신심 행위가 가톨릭의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다고 판단한 교구에서는 이런 행태를 금지할 것을 지시하면서 1992년 1월 14일자로 문선구 신부를 교구청 대기로 인사 이동하고 사목국장 김준호 신부를 임시 주임으로 겸임 발령하였다. 그리고 바로 있은 1월 27일자 사제 인사발령에서 24대 주임으로 김용태 신부를 임명하였다. 김용태 신부는 흩어진 신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어수선한 본당 상황을 정리하는 데 상당히 오랫동안 주력해야만 했다. 이어 25대 주임 박대덕신부는 1997년 1월에 부지 20,000여 평을 조성한 뒤 청소년 야영장 건립 공사에 착수하여 1999년 말에 이를 완공하였다. (→ 전주교구 ; 배재 본당)
※ 참고문헌  호남교회사연구소 엮음, 《전주교구사》 Ⅱ, 천주교 전주교구, 1998/ 전동 성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 호남교회사연구소, 《전동 성당 100년사》,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 교회, 1996/ 전동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사업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전동 본당 100년사 자료집》 1집, 천주교 전동 교회, 1992/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연표》, 호남교회사연구소, 1993/ 一, 《天主教全州教區史研究資料集》 1집(1882~1911, 地名調查報告書), 호남교회사연구소,1987/ -, 天主教全州教區史 研究資料集》 2집(1882~1986, 教勢統計表), 호남교회사연구소, 1987/ 김구정 · 김영구, 《天主敎 湖南發展史》, 천주교 전주교구, 1964. [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