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르바란, 프란치스코 데 Zurbarán, Francisco de(1598~1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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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체다리오회 소속 성인을 그린 <성 세라피오>(왼쪽)와 전쟁화 <카디스 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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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체다리오회 소속 성인을 그린 <성 세라피오>(왼쪽)와 전쟁화 <카디스 해전> .

스페인의 전통적인 화풍을 가장 충실히 전수한 대표적인 화가로, 예수 그리스도와 유명한 성인들의 성화(聖畵)를 많이 남겼다.
1598년 11월 7일 스페인 엑스트레마두라(Extremadura)의 푸엔테 데 칸토스(Fuente de Cantos)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화가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이에 바스크(Basque) 출신의 소매상이었던 아버지 루이스(Luis de Zurbarán)는 이를 키워 주기 위해 세비야(Sevilla)로 보내 화가수업을 받도록 하였다. 1614년 1월 15일 당시 세비야의 이름난 화가였던 페드로 디아스 데 빌라누에바(Pedro Diaz de Villanueva)의 문하에 들어가 3년 동안 미술을 배운 수르바란은, 페드로 디아스의 수업을 받은 지 2년 만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스페인의 개인 소장)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수르바란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페드로 디아스로부터 당시 널리 유행하기 시작한 명암법을 배운 뒤, 1619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몇 달 후 레레나(Llerena)에서 마리아 페스(María Páez)와 결혼을 하고 그곳에서 작업장을 열어 작품 활동을 하였다.
1623~1639년에는 주로 세비야의 여러 수도원들을 위하여 종교적인 주제를 담은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는데, 1623/1624년에 부인이 사망하자 1625년에 베아트리스(Beatriz de Morales)와 재혼하였다. 이 시기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한편 이 기간 중인 1634~1639년에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의 추천을 받아 마드리드(Madrid)의 부엔레티로(Buen Retiro) 궁전으로 초청을 받은 수르바란은, 스페인의 왕 필립 4세(1605~166)로부터 왕실 화가로 임명되어 궁전의 왕실 장식화에 참여하였다. 이후에는 세비야의 여러 수도원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수도 생활이나 성인들을 비롯한 종교적인 주제의 성화를 많이 그렸으며, 1639년에 부인 베아트리스가 사망하자 1644년에 자녀가 딸린 과부 레오노르(Leonor de Tordera)와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주로 세비야에서 활동하던 그는 점차 재정적인 난관에 봉착하자 가족들을 세비야에 남겨 두고, 1658년에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작품 활동을 계속하던 중 1664년 2월 28일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작품 및 화풍〕 수르바란은 그의 생전에 스페인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주로 세비야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펼쳤던 그는 특히 벨라스케스, 리베라(Jusepe de Ribera, 1591~1652), 에레라(Francisco Herrera, 1585/1590~1657) 등의 화가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많은 수도자들 과도 친분 관계를 가지면서 수도 생활과 종교적인 주제를 담은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그는 스페인이 정치적 · 경제적 패권을 잃고, 벨라스케스가 스페인 화단에서 새로운 명성을 얻기 전까지 리베라나 에레라와 함께 스페인 특유의 전통적인 화풍을 지켜 나갔는데, 이들은 17세기 전반까지 서유럽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친 카라바조(Caravaggio) 화풍에 속해 있었다. 대부분 정적인 분위기를 드러내는 그의 작품들은 가톨릭의 반(反)종교 개혁사상의 선상에 있는, 철저히 가톨릭적인 미술이었다.
수르바란은 1620년에 7명의 사도들이 포함된, 실제인체 크기의 <그리스도의 순교와 기증인>(리스본 미술관소장)을 제작했는데, 이는 에레라의 명암법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이었다. 또 1621년에 세비야의 산 파블로(San Pablo) 도미니코 수도회를 위해 제작한 21점의 그림들은 리베라의 그림과는 달리 더욱 섬세한 회화 기법을 보여주었으며, 1625년에는 세비야 주교좌 성당 내의 베드로 경당 제단화를 완성하였다. 수르바란은 1630년대까지 당시 널리 애용되던 카라바조 화풍의 명암 대조법을 이용하다가 다소 명암 차이가 약화된 색채와 채도가 높은 색채를 선택하였다. 그는 주로 규모가 큰 연작들을 주문받았던 1620년대에 이미 완벽한 예술적 성숙함을 완성해 내었는데, 1628년에 세비야의 메르체다리오회를 위해 완성한 메르체다리오회의 창설자 성 베드로 놀라스코
(Petrus Nolascus, 1182~1256)의 생애를 담은 연작과 또 같은 수도원 소속의 수도자 5명의 초상화들(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아카데미 소장)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밖에 메르체다리오회 소속 성인을 그린 작품 <성세라피오>(미국 하트퍼드의 와즈워스 학술원 소장)가 유명하 다.
이후 수르바란의 회화 양식은 1630년대 들어 더 다양해지고 대범해지기 시작하였다. 풍부한 삶에 대한 그의 열정은 종교적 작품과 수도자의 세계 그리고 세속적인 주제나 정물화에 큰 관심을 갖게 하였으며, 1630년대 초에는 오렌지와 레몬 등을 소재로 한 정물화와 고요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인체를 명확한 형태의 구성으로 그려 내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조용한 생활〉(마드리드 프라
도 박물관 소장, 1635~1640)이다. 그가 왕실 화가로 선정된 후에는 부엔 레티로 궁전을 위한 전쟁화 <카디스 해전>과 '헤라클레스의 생애' 를 담은 연작을 제작하였으며(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소장), 1640년대까지 수많은 종교적 주제의 작품들도 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1631년에 제작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광>(세비야 미술관 소장), 세비야의 카르투지오회를 위해 제작한 <성인들과 망토의 성모>(세비야 미술관 소장), 1636년에 헤레즈 드 라 프론테라(Jerez de la Frontera)의 카르투지오회를 위해 제작한 연작(현재 카디스 미술관과 그레노블 미술관에 일부 소장), <성 프란치스코)(바르셀로나 카탈루나 미술 박물관 소장, 1631~1640) 등이 있다. 그리고 과달루페(Guadalupe)의 성 예로니모 수도원을 위한 작품들과 자프라(Zafra)의 로스 레메디오스(Los Remedios) 경당 제단화 및 당시 스페인령 남아메리카 국가였던 페루의 리마(Lima)에 있는 라 엔카르나시온(La Encarnaciόn) 수녀원을 위해 제작한 성녀들의 초상화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현재 각국의 미술관에 분산 소장)들을 제작하였다.
수르바란은 자신의 독특한 양식을 1650년대 중반까지 지켜 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1645년 이후부터 스페인 화단은 무리요(B.E. Murillo, 1617~1682)의 부드럽고 따뜻하며 전반적으로 풍속화적인 취향에 매료되기 시작하였으므로, 수르바란은 뒤로 밀려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수르바란은 1650 1660년대에는 감상적이며 시대의 분위기와 다소 절충적인 양식을 보여 주려 시도하였는데, 이 시대에 제작된 대표적인 작품들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와 세례자 성 요한' 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비야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였다.
※ 참고문헌  Kindlers Malerei Lexikon, Bd. 15 dtv, Miinchen, 1982/Norbert Schneider, Porträtmalerei, Köln, 1994/ Malerei. Lexikon von A bisZ, Lingen-Verlag, Köln, 1986/ Lawrence Gowing, Die Gemäldesammlungdes Louwre, Köln, 1988. 〔洪珍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