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소속 본당. 서울시 은평구 증산동 221-1소재. 1909년 5월 21일 약현(현 중림동) 본당 관할 공소 에서 행주(幸州)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957년에 성당을 이전하면서 이름을 '수색 본당' 으로 바꾸었다. 주 보는 예수 성심이며, 관할 구역은 증산동, 수색동, 상암동 전 지역과 북가좌동, 중동 일부 지역 및 고양시 향동동, 덕은동, 현철리 일대. 〔교 세〕 1909년 682명, 1917년 871명, 1922년 555명, 1967년 1,915명, 1972년 1,900명, 1977년 3,665명, 1982년 3,924명, 1988년6,202명, 1993년 5,838명, 1997년 5,295명. 〔역대 신부〕 초대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1909. 5~1917.9), 2대 김휘중(金輝重) 요셉(1917. 9~1918. 11), 3대 황정수(黃貞秀) 요셉(1919.~1923. 5), 4대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1923. 5~1926.5), 5대 박우철(朴遇哲) 바오로(1926.5~1932. 9), 6대 윤의병(尹義炳) 바오로(1932. 9~1935. 1 ,7대 이종순(李鍾順) 요셉(1935. 1~1936), 8대 김유룡(金裕龍) 필립보(1936. ~1942. 1), 9대 김성환(金成煥) 빅토리노(1948. 2~1952. 4), 10대 임충신(林忠信) 마티아(1953.11~1968. 12) , 11대 최서식(崔瑞植) 라우렌시오(1968. 12~1969. 9), 12대 김윤상(金允相) 베네딕도(1969. 9~1974.5), 13대 김택암(金澤岩) 베드로(1974. 5~1979. 6), 14대 박성종(朴成鍾) 프란치스코(1979. 6~1983. 4), 15대 전용선(田溶先) 사도 요한(1983. 4~1985. 4), 16대 김창훈(金昌薰) 바오로(1985. 4~1990. 9) , 17대 홍인수(洪仁壽) 요한(1990. 9~1993. 11), 18대 김득권(金得權) 굴리엘모(1993. 11~1998. 9) 19대 탁현수(卓鉉洙) 아우구스티노(1998. 9~현재).
〔행주 본당 시기〕 현 수색 본당의 전신은 1909년에 설립된 행주 본당이다. 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행주 포구는 한강을 통한 수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거주 인구가 제법 많은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1899년 당시 약현 본당 주임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는 이곳에 행주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당시 신자수는 52명이었으나 공소 설립 1년 만에 102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교세 성장과 더불어 이 지역은 또 약현 본당 관할의 경기도 서부 지역, 즉 김포군 · 통진군 · 고양군 · 양천군 · 양주군 · 파주군 등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공소들을 관할하기에도 적격이었다. 그러자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1909년 5월 21일 행주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김원영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김원영 신부는 그 해 8월 성모 승천 대축일 직후에 고양군 주도면 행주외리 197번지에 성당을 마련하고 주보를 성모 승천으로 정하였으며, 1922년에는 성당을 증축하면서 사제관도 신축하였다.
그 후 행주 본당은 일제 말기에 선교사 추방 등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질 무렵인 1942년 1월, 8대 주임이었던 김유룡 신부가 대전 목동 본당으로 전임된 후 신부가 파견되지 않음으로써 한때 공소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광복이 된 후 1948년 2월에 9대 주임으로 김성환 신부를 맞이함으로써 본당으로 부활되었다.
〔성당 이전과 성장〕 본당으로 부활된 후 공동체는 활기를 되찾았으나, 얼마 못 가 도시화 현상으로 신자수가 감소하자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임충신 신부는 그 보완책으로 1957년에 수색동 205번지로 성당을 이전하고, 본당 이름을 '수색동 본당' 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68년 8월 응암동(應岩洞) 본당을 분리한 데 이어 1971년 9월 17일에는 가좌동(加佐洞) 본당을 분리하였다. 그런 가운데 1970년 8월 2일 현재의 증산동 부지를 마련한 뒤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8월 12일 대지 425평에 연건평 232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3대 주임 김택암 신부 때에는 평신도의 자질 향상을 위한 각종 교육을 마련하고 선교지 《너와 나의 하느님》을 제작하였으며, 수색동 철거민 돕기 · 인권 문제 · 추곡 수매 문제 등 사회 정의 구현 운동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관할 구역이 너무 넓어 사목상 어려움이 따르자 1978년 11월 8일에 대지 500평을 마련하여 능곡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 후 1981년 8월 10일 능곡 공소 강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8월 26일 이를 신축함과 동시에 능곡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14대 주임 박성종 신부는 성지 순례 · 성령 기도회 등으로 신자들의 신심을 함양하는 데 주력하였고, 15대 주임 전용선 신부는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활성화에 중점을 두고 사목하였으며, 16대 주임 김창훈 신부 때에는 신자 재교육의 일환으로 교육용 비디오 상영 및 5분 교리 등이 시도되었다. 또한 판공 성사 때 참회 예절을 중시하였고, 회개가 나눔의 생활로 드러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매년 사순절에 성미 모으기 운동을 벌여 연중 불우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하였다.
한편 수색 본당에서는 교세가 날로 증가하자, 1988년 4월에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990년 5월 26일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의 성당(907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또 1992년 이후부터는 1년에 여러 차례에 걸쳐 관할 구역 내 불우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오고 있으며, 고양동 · 염리동 · 풍납동 성당 건립 기금도 자발적으로 모금하는 등 나눔 실천에도 앞장서 왔 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신앙 강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으며, 참 부모가 되는 길' · '참 부부가 되는길' 의 성가정 교육을 마련하는 등 교육과 신심 활동 강화에도 주력하고 있다. (→ 서울대교구 ; 중림동 본당)
※ 참고문헌 《경향잡지》 422호(1919. 5) ; 797호(1935. 1) ; 825호(1936.5) ; 942호(1942. 1) ; 997호(1948. 4)/ 《교회와 역사》 78호( 1982. 1) ; 98호(1983. 8) ; 225호(1994. 2)/ 신월동 본당 10년사 편찬위원회 편, 《신월동 본당 10년사》, 천주교 신월동 교회, 1995. 〔金成喜〕
수색 본당
水色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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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