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水源教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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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 20일, 주교 수품 직후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고 있는 초대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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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 20일, 주교 수품 직후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고 있는 초대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

한강 이남의 경기도 지역 중에서 수원시 · 과천시 · 광명시 · 군포시 · 성남시 · 안산시 · 안성시 · 안양시 · 오산시 · 용인시 · 이천시 · 의왕시 · 평택시 · 하남시 등 14개의 시와 시흥시 일부 지역, 광주군 · 화성군과 남한강 유역인 양평군 · 여주군 등 4개의 군을 사목 관할 구역으로하는 주교구. 주보는 평화의 모후와 한국 순교 성인들. 1963년 10월 7일 서울대교구에서 분리 설정됨과 동시에 서울 · 춘천 · 대전 · 인천교구와 함께 서울 관구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수원교구는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두번째로 많은 본당과 신자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여러 곳에 순교 사적지를 갖고 있다. 〔역대 교구장〕 초대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주교(1963. 10. 7~1973. 11. 7), 2대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주교(1974. 10. 5~1997.6.4), 3대 최덕기(崔惠基, 바오로) 주교(1997. 6. 4~현재). 〔교 세〕1964년 48, 253명, 1973년 67,990명, 1981년 107 882명, 1985년 157,257명, 1988년 205,435명, 1992년 291,117명, 1995년 373,089명, 1999년 484,389명 .
I . 복음의 전래와 순교자의 탄생
〔복음의 전래와 초기 공동체〕 현재 수원교구 사목 관할 지역 중에서도 한강 이남에 위치해 있는 양평군과 광주군 접경 지역은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 로, 한국의 복음사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에 전래된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 가운데 들어 있는 서학(西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새로운 신앙의 차원에서 인식되어 갈 무렵, 그 주체가 되는 일부 지식인들의 생활 근거지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 천주교회의 사도인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은 광주 땅에, 그의 스승이자 초기 신자 중의 한 사람인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아우 일신(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은 양근의 대감 마을(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이벽의 인척 정약용(T若鏞, 사도 요한)과 형 약전(若銓)은 양근의 마재(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의 馬峴)에서 살고 있었다. 특히 이벽과 정약용은 인근에 있던 천진암(天真菴, 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에서 자주 만나 학문을 토론해 오던 사이였다.
이후 1779년 겨울, 권철신을 스승으로 하는 녹암계(鹿菴系)의 신진 인사들은 대감 마을 인근에 있던 주어사(走魚寺, 현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에 모여 강학 모임을 가졌는데, 당시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으면서 권철신을 스승으로 하는 녹암계가 형성된 지 얼마 안된 시기였다. 이때 광주 땅에 살던 이벽은 강학 소식을 듣고 주어사를 찾았으며, 그의 참석으로 인해 이 모임에서 서학에 대한 토론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기원이 된 '주어사 강학' 이다. 이어 이벽은1781년경에 서울로 이주하였고, 1784년 봄에는 친구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자 그가 가져온 교회 서적들을 가지고 스승 권철신을 찾아가 다시 한번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런 다음 같은 해 겨울 이승훈 · 이벽 · 권일신 · 정약전 · 정약용 등이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첫 번째 세례식을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교회 창설 직후 녹암계의 대종인 권철신이 입교하였고, 충청도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과 전라도의 류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이 양근 대감 마을을 찾아와 권일신에게 세례를 받고 각각 고향으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였으며, 대감 마을에 살던 권철신의 제자 윤유일(尹有一, 바오로)과 그의 가족들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양근 공동체' 의 신앙은 남한강 줄기를 따라 충주 지역으로 전파되거나 광주 · 여주 지역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 공동체는 특히 향촌 양반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한편 1786년 무렵 초기의 지도층 신자들이 임의대로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조직하면서 권일신은 신부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이것이 폐지된 후에는 윤유일이 교회의 초대밀사로 선발되어 1789년과 1790년에 각각 북경을 왕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있은 1785년의 명례방 사건(明禮坊事件, 즉 을사 추조 적발 사건)과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de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내린 '조상 제사 금지령' 은 양근 공동체에 큰 영향을주었다.
〔박해와 순교자의 탄생〕 조상 제사 금지령이 조선에 전달되고, 이로 인해 1791년에 신해박해(辛亥迫害)가 일어나면서 양근 공동체를 형성하였던 양반 출신의 주요 인물들이 점차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이 무렵 양근의 정씨(丁氏) 형제들도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하였으나, 1786년경에 입교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만은 오히려 거처를 양근의 분원(현 광주군 남종면 分院里)으로 옮기면서까지 신앙을 굳게 지켰다. 또 권일신은 신해박해의 여파로 인해 체포되어 유배를 가다가 사망하였고, 교회의 밀사 윤유일은 동료들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에 노력하여 1794년 말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영입한 뒤 이듬해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이로써 윤유일은 경기도 출신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후 경기도의 신앙 공동체는 정약종을 비롯하여 권일신의 아들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 여주의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 ·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 등이 이끌어 나갔다. 또 그 뒤를 이어 김건순(金建淳, 요사팟)과 동료들이 입교하였고, 서울로 이주한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 · 윤운혜(尹雲惠, 루치아) 부부,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등은 주문모 신부를 도와 한국 천주교회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 정약종은 1797년 무렵부터 교회 지도층의 일원이 되었으며, 1799년경에는 명도회(明道會)의 초대 회장에 임명되어 주문모 신부와 함께 초기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경기도의 신앙 공동체가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였다. 그 후 경기도의 교회는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가 끝날 때까지 박해와 순교자의 탄생, 교회 재건의 노력이 계속되는 수난의 시기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이 수난은 역으로 비밀 공동체인 교우촌과 복음의 확대라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순교자들의 신앙은 언제나 교회의 튼튼한 반석이 되었다. 우선 신유박해 때 경기도 출신으로 서울에서 순교한 이들은 명도회 회장 정약종을 비롯하여 정광수 · 윤운혜 부부, 권상문 등이 있다. 또 윤점혜와 윤유오(尹有五, 야고보)는 양근에서 순교하였고, 최창주 · 이중배 · 원경도(요한) 등은 여주에서 순교하였으며,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광주 땅으로 이주해 살던 한덕운(토마스)은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신유박해 이후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까지 경기도의 신앙 공동체는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 기회에 충청도와 서울 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비밀리에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충청도에 거주하던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집안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집안이 각각 경기도의 골배마실 교우촌(현용인군 내사면 남곡리)과 수리산 교우촌(현 안양시 안양3동)으로 이주한 것도 이때였다. 그에 앞서 순교자 정약종의 차남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은 1816년 무렵부터 교회밀사와 지도층으로 활동함으로써 1831년 9월 9일 조선교구가 설정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1835년 말에는 프랑스인 모방(P.Maubant, 羅) 신부를 이 땅에 영입하였다. 또 1836년에는 최양업과 김대건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기해박해로 최양업의 부모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과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그리고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등이 순교하였고, 구산(현 하남시 龜山洞) 땅에 거주하던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와 시흥 봉천(현 서울 봉천동)에 살고있던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 모녀도 이때 순교했다.
이처럼 여러 곳의 교우촌이 수난을 당하고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도 지역의 교회는 그 터전을 잃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갓등이(현 화성군 봉담면 왕림리) · 미리내(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 한덕골(현용인시 이동면 묵리) · 손골(현 용인시 수지면 동천리)을 비롯하여 용인의 검은정〔巨文亭〕 · 굴암(窟岩) · 골배마실 ·은이〔隱里〕, 이천의 단내 · 동산리, 광주의 구산 · 하우고개 · 먹방리 · 새말 · 둔토리 · 뫼룬리 · 숫골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시흥 · 죽산 · 남양 등지에서도 신자들이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1845년에 다시 조국 땅을 밟게 된 김대건 신부는 골배마실을 중심으로 잠시 사목 활동을 하였고, 5년 뒤에 귀국한 최양업 신부도 경기도 지역을 순방하였다. 특히 손골 교우촌은 1850년대 후반부터 프랑스 선교사들의 사목 거점이자 휴식처로 이용되었다.
경기도 지역의 교우촌이 다시 한번 수난을 당하게 된것은 병인박해 때문이었다. 여러 해 동안 지속된 이 박해때 경기도에서는 먼저 볼리외(B. Beaulieu, 徐沒禮) 신부가 뫼룬 교우촌(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뒷산에 있는 굴아위 동굴에서 체포되었으며, 동료인 도리(P. Dorie, 金) 신부는 손골 교우촌에서 체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처의 교우촌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수원 · 남한산성 · 죽산 · 남양 등지에서 순교하였고, 살아 남은 신자들은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여 다시 교우촌을 일구어야만 하였다. 이처럼 혹독한 시련을 겪고 나서야 경기도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II . 본당의 설립과 확대
〔신앙의 자유 획득과 본당 설립〕 박해가 끝난 뒤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입국한 것은 1876년부터였다. 이때 경기도 지역을 처음 순방한 선교사는 드게트(V.Deguette, 崔東鎮) 신부였는데, 그 무렵에는 비밀리에 재건된 교우촌들이 경기도 각처에 산재해 있었다. 그 후 조선이 구미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선교사들의 입국은 더욱 활발해지게 되었으며, 박해로 제천의 배론 신학교가 폐쇄되면서 중단되었던 신학생 양성 사업도 재개되었다. 그러나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 서쪽에 있는 페낭(Pennang) 신학교까지 보내는 데 무리가 따르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J. Blanc, 白圭三) 주교는 1885년에 로베르(A. Robert, 金保祿) 신부에게 새 신학교 터를 물색하도록 하였고, 그는 여주의 부엉골 교우촌(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초가 신학교 건물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신부가 부엉골에 부임하여 그 해 10월 28일 소신학교인 "예수성심신학교"를 개교하였다.
부엉골의 신학교는 한불조약(韓佛條約)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1887년 3월에 서울 용산으로 이전되었으며, 부엉골 본당은 이후 부침(浮沈)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 무렵 경기도 지역을 순방한 선교사는 블랑 주교와 뮈텔(G. Mutel, 閔德孝) 신부였다. 그러다가 교우촌과 신자수가 점차 증가하면서 본당을 신설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블랑 주교는 1888년 7월 갓등이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갓등이(현 왕림) 본당' 을 설립함과 동시에 앙드레(J. André, 安學古)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 본당이 한강 이남의 경기도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본당이었다. 그러나 앙드레 신부는 부임한 지 1년 반만에 사망하였고, 이어 2대 주임으로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가 부임하여 1893년에 삼덕의숙(三德義塾)을 설립하였다. 당시 갓등이 본당의 사목 관할 지역은 수원을 비롯하여 광주 · 진위 · 안성 · 용인 · 시흥 등을 포함하는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갓등이 본당 설립 이후 경기도 지역의 공소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1896년 4월 26일 갓등이 본당에서 '미리내 본당' 을 분리 ·설립함과 동시에 그날 서품된 한국인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미리내 본당의 관할 구역은 광주 · 안성 · 용인 등지였다. 이어 1900년 9월에는 하우현 공소가 '하우현 본당' 으로 승격되면서 샤플랭(O. Chapelain, 蔡)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하우현 본당의 관할 지역은 갓등이 본당과 미리내 본당의 관할 지역에서 분리되었으며, 그 결과 광주 지역의 남쪽 공소들은 대부분 이 본당 소속이 되었다.
한편 지금의 안성 · 평택 일대의 공소들은 충남의 공세리 본당과 갓등이 본당 관할 아래 있다가, 1900년 10월'안성 본당' 이 설립됨과 동시에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면서 모두 이 본당 소속이 되었다. 이에 앞서 1897년 수원읍 북수리(北水里)에 큰 가옥을 매입한 알릭스 신부는 본국으로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갓등이 본당 4대 주임으로 부임한 다음, 1901년에 기와집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고 이듬해 11월 22일 뮈텔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가졌으며, 1908년에는 수원 북수리 공소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다가 다시 갓등이로 옮겨진 것은 5대 주임 르 각(C.LeGac, 郭元良) 신부 때인 1912년에 와서였다. 1908년 3월 5일에는 조제(J. Jaugey, 楊秀春) 신부가 양평에 부임하여 퇴촌 본당' (현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양평 · 용문 본당의 전신) 을 설립하였는데, 이 본당은 그 후 덕동으로 이전되었다가 1911년에 다시 마내현 용문면 마룡리로 이전되었다.
〔본당의 확대와 성장〕 1913년 5월 17일 미리내 본당에서 '압고지〔前垡里〕 본당 (현 용인시 포곡면 전대리, 용인본당의 전신)이 분리 · 신설되면서 정규량(鄭圭良, 레오)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1927년 9월에는 미리내 본당에서 '남곡리(南谷里) 본당' (현 양지 본당의 전신)이 분리됨과 동시에 박동헌(朴東憲, 마르코)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1930년에는 신자수
감소로 압고지 본당이 이곳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안성본당의 공베르 신부는 1909년 1월 15일 초등학교인'사립 공교 안법학교 (현 안법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고, 1914년 갓등이 본당 6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그 해 기존의 삼덕의숙을 4년제 신명의숙(新明義塾, 1946년에 광성국민학교로 인가, 1981년에 폐교)으로 변경하여 인가를 받았다.
1923년 11월 수원의 북수리 공소가 '수원 본당' (현 북수동 본당의 전신)으로 승격되면서 르 메르(L.LeMeme, 李類斯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데 이어, 1925년 6월에는 진위에 '가마골〔赤峰里〕 본당' 이 설립되었으나 초대 주임 김영근(金永根, 베드로) 신부가 1927년에 양평의 마내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폐쇄되고 말았다. 또 1926년 12월 6일에는 '병점 본당' 이 설립되면서 몰리마르(J. Molimard, 牟)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1928년 4월 14일에 자신의 거처를 진위의 비전리(현 평택시 碑前洞)로 이전하여 '평택 본당' 을 설립하였다. 이후 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평택 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몰리마르 신부가, 1934년에 서정리에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한 뒤 격주로 이곳을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1938년 10월에 '서정리 본당' 이 설립되면서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평택 본당에는 이듬해 멜리장(P. Mélizan, 梅履霜) 신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한편 수원 본당 4대 주임 폴리(D. Polly, 沈應榮) 신부는 1934년 10월 2일에 '소화 학술 강습소 (현소화초등학교의 전신)를 개설하였고, 서정리 본당 3대 주임 류수철(柳秀徹, 도미니코) 신부는 1953년 5월에 효명고등공민학교' (현 효명중 · 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했다.
이 무렵까지 미리내 본당과 남곡리 본당 관할 아래 있던 용인 · 이천 · 여주 · 광주 지역의 공소들은 1940년에 이천 본당, 1950년에 여주 본당, 1958년에 경안(현 광주) 본당이 설립되면서 새 본당 소속으로 각각 분리되었다. 반면에 광주군 북쪽에 있던 구산 · 숫골(현 서울시 양재동) · 둔전말(현 성남시 수정구 둔전동) 공소들은 1893년 1월 20일 갓등이 본당에서 서울의 약현(현 중림동) 본당 관할로 변경되었다가 1927년에 서울의 백동(柏洞, 현 혜화동) 본당 소속이 되었다. 이후 구산 공소는 하남 구산 본당의 전신, 둔전말은 성남 수진동 본당의 전신이 되었다. 또 수원 인근 지역에서는 1953년에 안양(현 중앙) 본당이 설립된 데 이어 1957년에는 발안 본당이 설립되었으며, 1959년에는 수원(현 북수동) 본당에서 고등동 본당이 분리되었다. 이에 앞서 1951년 7월 5일에는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캐롤(G. Carrol, 安) 주교에 의해 설립되어 시흥 광명리(현 광명시)에 자리잡고 있던 나환우들의 구호소가 시흥 오전리(현 의왕시)로 이전되었다. 이것이 현 '성 라자로 마을' 의 시작으로, 1952년 3월에는 이경재(李庚宰, 알렉산델) 신부가 초대 원장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일제 시대부터 1950년의 6 · 25 한국 전쟁기를 거치는 동안 서울교구는 1920년에 원산교구(대목구)를 분할했으며, 1927년에는 평양교구(지목구)를, 1939년에는 춘천교구(지목구)를, 1958년에는 대전교구(대목구)와 청주교구(대목구)를, 1961년에는 인천교구(대목구)를 각각 분리하였다. 이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회기 중인 1962년 3월 10일에는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 제도(敎階制度)가 설정되면서 기존의 포교지 교구들이 정식 교구로 승격되었으며, 서울 · 대구 · 광주는 대교구가 되었다. 경기도 남부 지역의 분리 움직임이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Ⅲ 1. 수원교구의 설정과 변모
〔교구 설정과 초기 현황〕 여러 차례의 교구 분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울대교구의 사목 관할 구역이 넓은데다가 경기도 남부 지역의 교회 발전이 예상되자, 이 지역에서 사목하고 있던 성직자들은 1962년에 서울대교구장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대주교에게 교구 분할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주한 교황 사절 주디체(A. del Giudice) 대주교가 수원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963년 10월 7일 마침내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수원교구' 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되어 한국인 성직자 교구로 설정됨과 동시에 윤공희 신부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때 고등동 본당(주보 : 성 요셉)이 주교좌로 설정되었다.
윤공희 신부는 그 해 10월 20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사목 표어로 주교 서품식을 하고 돌아온 뒤 12월 21일 착좌식을 가졌으며, 이듬해 1월 12일에는 장금구(莊金龜, 요한 그리소스토모)신부를 초대 총대리로 임명하였다. 당시 수원교구의 관할 지역은 경기도의 수원시를 비롯하여 부천 · 시흥 · 화성 · 평택 · 광주 · 용인 · 안성 · 이천 · 양평 · 여주군 등 1개 시 10개 군이었으며, 총 신자수는 42,548명, 본당 수는 24개, 공소수는 205개, 성직자수는 본당 신부 27명과 성가회 지도 신부 1명, 대신학생수 26명, 소신학생 수 31명이었고, 수도회는 인보 성체 수도회 · 성가 소비녀회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 반(半) 관상 수도회인 성모 영보 수녀회가 진출해 있었다. 이 중에서 성모 영보수녀회는 1967년에 본원을 과천으로 옮겨 왔다. 1965년 1월에는 독일 파더보른(Paderborn)에 모원을 둔 성 빈센트 드 뿔 자비의 수녀회가 수원에 진출한 뒤 병원 신축에 착수하여 1967년 6월 3일 지금의 '성 빈센트 병원'을 개원하였으며, 1966년 7월 6일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지금의 작은 형제회)가 세류동에 진출하였다.
윤공희 주교는 고등동 성당에서 거처하다가 인근의 가옥을 매입하여 이주하였으나, 교구청으로 사용하기에는 비좁았다. 이에 교구청에서는 1966년 화서동에 있는 부지를 매입한 뒤, 이듬해 10월 20일 새 교구청사(연건평 437평, 옛 청사)를 신축 이전하고, 12월 28일에는 '천주교 수원교구 유지 재단 을 설립하였다. 윤공희 주교는 1967년 3월 24일부터 이듬해 4월 27일까지 공석이었던 서울대교구장직을 겸임하였으며, 1970년 1월 1일에는 교구 관할 구역을 조정하여 교통이 불편한 소사읍(현 부천시)을 인천교구로 이관하였다. 이어 같은 해 7월 신학생 후원회인 '우술라회' (현 사제 양성회의 전신)가 창립되었고, 1968년 5월 10일에는 병인 순교 복자 기념 성당인 서둔동 본당이 설립되어 이듬해 9월 16일 이를 완공하였다.
1969년 3월 23일 수원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창립된 데 이어 1971년 12월 1일에는 교구에서 월보<사목>을 창간하였으며, 이듬해 7월 19일에는 교구청 행정 기구가 개편되어 총대리 아래에 사무국 · 사목부·경리부 · 비서실 등 4개의 실무 기구로 편성되었다. 동시에 교구에서는 평신도 교육 3개년(1972~1974년) 계획을 수립하여 실천해 나가는 한편, 1973년에는 각 본당별로 사목 협의회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또 같은 해 7월 17일에 교구 가톨릭 농민회가 창설되었고, 9월 30일에는 미리내 성지에서 교구 설정 10주년 행사를 겸한 순교자 현양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0월 16일에는 가톨릭 농촌 사회 지도자 교육원을 설립하고 1974년 여름에 교구청사를 증축하면서 이곳에 자리를 마련하였다(1983년 2월 22일 수원교구 교육원으로 개칭됨). 그러던 중 윤공희 주교는 1973년 11월 7일 광주대교구장에 임명됨으로써 대주교로 승품되어 수원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에 이듬해 10월까지 2대 총대리 정덕진(丁德鎮, 루가) 신부가 교구장 직무 대리로 선출되어 교구를 이끌어 가게 되었다.
〔교구의 안정과 변모〕 1974년 10월 5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제2대 수원교구장에 임명된 김남수 신부는, 그 해 11월 21일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를 사목 표어로 정하고 고등동 성당에서 주교 서품식 및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당시 교구의 총 신자수는 67,736명, 본당수는 31개였다. 한편 김남수 주교는 1976년 4월 한국순교 복자들의 시복 시성 촉진을 위한 책임 주교로 선임 되어 전 교회 차원의 시성 운동을 추진해 나가기도 했다.
교구가 점점 성장함에 따라 고등동 주교좌 성당에서 교구 행사를 치르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자, 교구에서는 1974년 11월 28일 '조원동 주교좌 성당 신축위원회' 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주교좌 성당 건립지는 이후 북수동 성당으로 변경되었다가 1976년 4월 2일에 다시 조원동으로 변경되는 등 그 결정에 우여곡절이 뒤따랐다. 같은 해 7월 공사에 착수하여 11월 조원동 본당을 설립하였으며, 1977년 5월 18일에는 김남수 주교 집전으로 주교좌 성당 봉헌식(주보 : 평화의 모후)을 거행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여러 수도회가 교구 지역 안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먼저 1975년에 노틀담 수녀회가 진출하였고(1980년 교구 인가), 이듬해 9월에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가 설립되었으며, 1977년 말에는 포교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성남에 진출하였다. 한편 1975년부터는 천진암 성역화를 위한 자료 조사 및 순교자들의 무덤 이장 작업 등이 시작되었고, 1978년 9월 16일에는 현재의 천진암 터가 확보되었다.
1977년 4월 5일 수원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4년 만에 다시 발족되었으며, 같은 해 9월 16일에는 구산에 순교 복자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현양비가 건립되면서 성역화 작업이 추진되었다. 이어 1980년대에 들어서는 그 해 4월 16일에 매리지 엔카운터(M.E) 수원 협의회가 창립되었고, 12월 8일에는 교구 가톨릭 여성연합회가, 1981년 1월 20일에는 교구 가톨릭 의사회가 발족되었으며, 같은 해 3월 19일에는 교구 '천지의 모후' 꼬미시움이 레지아로 승격되었다. 천진암에서 제1회 한국 천주교회 창립 행사가 개최된 것도 1981년 6월 24일이었고,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전국 신앙 대회가 개최된 것도 같은 해 10월 18일이었다. 반면에 이 시기에는 1979년의 10 · 26 사태와 이듬해 5월의 광주 민중 항쟁으로 인해 각 본당이나 단체별로 구국 기도회 및 구호품 모금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하였다.
1980년 1월부터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에서는 1984년에 맞이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행사를준비해 나가는 한편, 시성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또 1982년 5월에 열린 주교 회의 춘계 정기 총회에서 수원교구에 제4 대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교구에서는 그 해 8월 1일 대신학교 설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1월 17일에는 200주년 기념 교구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1983년 6월 20일에 재구성), 1983년 2~9월에는 본당 · 수도회 · 단체별로 한국 순교 복자 유해 순회 기도회를 실시하였다. 동시에 김남수 주교는 1982년 11월 2일자로 황익성(黃益性,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제3대 총대리에 임명하였고, 이듬해 4월부터 대신학교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그 해 12월 7일 문교부로부터 '수원 가톨릭대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84년 3월 2일 개교하였다. 이에 앞서 1983년 9월 4일에는 교구 합동 주보인 <수원 주보>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1984년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대회 및 103위 시성식이 거행된 해였다. 이에 교구 56개 본당에서 47,000여 명의 신자들이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이 행사에 참여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교구에서는 9월 30일 미리내에서 103위 한국 순교자 시성 경축 대회를 개최하였다. 또 같은 해 2월 2일에는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가 설립되었으며, 8월에는 신언회, 이 듬해 10월에는 천주의 섭리 수녀회, 12월 8일에는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가 각각 수원에 진출하였다. 1984년10월 30일에는 성체 분배권자(수도자) 교육이 처음 실시되었으며, 그 해 11월부터는 수원교구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한 성직자들의 무덤이 미리내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1986년 5월 10일에는 전 교구 차원의 성령 쇄신 대회가 수원 실내 체육관에서, 6월 1일에는 교구 성체 현양대회가 수원 공설 운동장에서 각각 개최되었다. 이어 6월 24일에는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위원회가 조직되었고, 7월에는 안성의 교구 묘원 허가를 받아 12월 10일에 이를 준공하였으며, 이듬해 9월에는 수원 가톨릭대학 신축 교사가 완공됨으로써 1988년 5월 6일 축복식을 가졌다. 또 1987년 9월 15일 이천의 어농리와 단내 성지 축복식이 있었고, 이듬해 4월 14일에는 양병묵(楊柄默, 루가) 신부가 제4대 총대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부터 전 사회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민주화 운동에 발맞추어 교구에서도 1987년 5월에 전 사제단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 기도를 실시하고 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다.
IV . 교구의 성장과 현재
〔교구 설정 25주년과 교세 확대〕 교구 설정 25주년인 1988년을 맞아 교구에서는 먼저 2월 29일에 중 · 고등학생 신앙 대회를, 5월 8일에는 어린이 신앙 대회를 수원 실내 체육관에서 개최하였으며 9월 10일에는 청년신앙 대회를 배론 성지에서 개최하였다. 이어 10월 9일에는 수원 공설 운동장에서 "빛이 되어" 라는 주제 아래교구 신앙 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고, 10월 30일에는 교구 성가 경연 대회를 시민 회관에서 개최하였다. 이처럼 교구가 설정된 지 25주년이 되는 1988년의 교구 현황을 살펴보면, 총 신자수가 205,435명으로 교구 설정 당시에 비해 4.8배 이상 증가하였고, 본당수는 66개로 2.75배, 성직자수는 135명으로 4.8배나 증가하였다. 당시 교구청 직제는 사무처 아래 사목국 · 관리국 · 교육국을 두고 다시 그 아래에 총무부(사목과 · 경리과 · 서무과 · 교육과)를 두는 체제였으나, 1987년에 성소국이 교육국에서 분리 · 신설되었다.
교세 확대와 함께 새 수도회의 진출이 꾸준히 계속되었고, 사회 복지 시설도 크게 증가하였다. 먼저 이 시기에 교구에 진출한 수도회로는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수련원)를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 수녀회(수련원) · 천사의모후 수녀회 · 예수 마리아 성심 전교회 · 사랑의 씨튼 수녀회 · 팔로틴 수도회 등이 있었고, 1990년 2월 26일에는 한국 외방선교회 신학원(화성군 봉담면 왕림리 소재)이 신축되었으며, 같은 해 6월 21일에는 성 빈센트 드 뿔 자비의 수녀회의 수원 모원이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수도회가 중심이 되어 교구 관할 각처에 빈민 · 장애인 · 노인 · 미혼모 · 청소년들을 위한 사회 복지 시설들을 설립 및 개원하였는데, 이에 발맞추어 교구에서는 1985년 11월에 농아 선교회를, 1989년 6월에 맹인 선교회를,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가톨릭 지체 장애 선교회를 창립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도시 빈민을 위한 활동과 자연사랑 운동 · 생명 존중 운동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또 신도시의 발전으로 본당의 관할 구역이 여러 차례 조정되었으며, 본당 신설 작업이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90년 12월 6일 정지웅(鄭址雄, 요셉) 신부가 제5대 총대리로 임명되었으며, 12월 8일에는 '남양 순교 성지' 가 성모 순례 성지로 지정되었다. 1993년 9월 26일에는 천진암에서 교구 설정 30주년 기념 순교자 현양 대회 및 천진암 대성당 정초식이 개최되었고, 이듬해 10월 10일에는 정자동 578번지에서 새 교구청사 신축 기공식이 있었다.
수원교구는 현대화의 기틀을 하나씩 다져 나가기 시작하면서, 특히 한국 천주교회의 현대화 작업과 소공동체 운동에 발맞추어 본격적으로 본당 분할 작업을 추진해나갔다. 그 결과 1993년에 요한 · 목감 · 태평리(가남) 등 3개 본당을 신설한 데 이어 1995년 1월 1일에는 가남 · 던지실 · 도일 · 목감 · 수지 · 정동 등 6개 준본당을 본당으로 승격시켰으며, 2월 8일에는 다시 야탑동 성 마르코 · 분당 성 마태오 · 비전동 · 상록수 · 산본 · 서신 · 원천동 · 평촌동 등 8개 본당이, 9월 14일에는 월피동 · 반월동 등 2개 본당이 신설되었다. 이처럼 본당이 신설될 수 있었던 것은 1990년에 11명, 1992년에 17명, 1993년에 11명, 1994년에 19명, 1995년에는 13명이 새 사제로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1996년 1월 25일 최덕기 신부가 부주교로 임명되어 2월 22일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향하여"를 사목 표어로 주교 서품식을 가짐으로써 제6대 총대리를 겸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1일에는 수원 가톨릭대학이 '수원가톨릭대학교 로 이름이 바뀌었다.
〔교구의 현재〕 1996년에 3개 본당이 신설된 데 이어 이듬해 정자동 본당을 비롯하여 다시 12개 본당이 신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기간에 새 사제 31명이 탄생하였다. 1997년 1월 1일에는 교구청 직제가 현재와 같이 1처(사무처) 3국(복음화국, 청소년국, 관리국)으로 개편되었고, 2월 3일에는 교구청이 화서동에서 정자동 새 청사로 이전되면서 기존의 교구청사는 청소년 문화원으로 조성 되어 8월 27일에 개원식을 가졌다. 이어 그 해 6월 4일 최덕기 주교가 제3대 교구장직을 승계하여 9월 25일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7월에는 사제 평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구의 관할 지역이 모두 13개 지구로 개편되었다. 또 7월 29일 교황청 인류 복음화성에서 정자동 본당(주보 : 한국 순교 성인들)을 주교좌로 설정함에 따라 8월 20일 축성 미사가 봉헌되었고, 8월 22일에는 최재용(崔在鎔,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제7대 총대리에 임명되었다.
전국에서 두 번째 큰 교구로 성장한 교구의 사목을 원활하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 최덕기 주교는 우선 본당 신설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그 결과 1998년에 12개 본당이 신설된 데 이어 이듬해 1월에 6개 본당이, 2000년에는 다시 9개 본당이 신설되었다. 아울러 최덕기 주교는 각처에 분산되어 있는 순교 성지에 담임 신부를 임명하여 성역화 사업에 힘쓰도록 했고,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성소 계발, 도 · 농 본당의 자매 결연 활동과 환경 운동, 도시 빈민과 불우 이웃들을 위한 사회복지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교구 사목의 올바른 방향을 정립하기 위하여 시노드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1998년 7월 2일 시노드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어 같은 해 10월 1일에 교구 사목 목표 설정을 위한 성직자 · 수도자 · 평신도 합동 총회를 개최하였고, 1999년 1월 26일에는 김영옥(金榮玉, 가브리엘) 신부가 제8대 총대리로 임명되었으며, 그 해 7월 17일 "자, 일어나 함께 가자" 라는 표어 아래 시노드 개막 미사를 봉헌함과 동시에 제1차 총회를 개최하였다.
수원교구는 교구 설정 33년 만인 1999년 말 현재 총 신자수 484,389명, 본당수 119개(2001년 현재 128개로 증가), 공소수 55개, 성직자수 282명(외국인 및 수도회 소속 포함), 진출 수도회 49개를 기록하는 교구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장과 함께 증가해 온 냉담자나 소외 계층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있어 왔고, 교회쇄신과 소공동체 운동에 대한 갖가지 의견이 제시됨에따라 이를 통해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도 안게 되었다. 교구에서 2000년대희년을 기해 시노드를 개최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시노드의 결과를 바탕으로 현대화의 작업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함과 동시에, 복음의 정신에 입각하여 지역 사회와 함께 공유와 나눔의 질서를 이끌어 나가는 활동을 꾸준히 추진해 나가야 할 것 이다. (→ 한국 천주교회)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상 · 중 . 하/ 《경향잡지》/ 〈<가톨릭신문>/ <평화신문>/ 《가톨릭 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본당별교세 <계표>(필사본) 韓國敎會史研究所 편, 《서울大教區敎區總覽》, 가톨릭출판사, 1984/ 韓國敎會史研究所 역편, 《서울敎區年報》 I · II, 明洞天主敎會, 1984 · 1987/ 旺林本堂史編纂委員會 편, 《천주교 왕림(갓등이) 교회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집》 Ⅰ, 한국교회사연구소, 1990/ 천주교 수원교구, 《수원교구 30년사》, 천주교 수원교구 사무처, 1993/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 천주교회 연감》, 1994/ 《북수동 본당 70년사》, 천주교 북수동 교회, 1994/ http://www.casuwon.or.kr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