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산 본당

谷山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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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1925년 황해도 수안에 설립된 사창 본당(社倉本堂)의 후신. 1928년 5월 사창 본당이 황해도 곡산면 장림리(長林里)로 이전하면서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소화 데레사 곡산지역은 병인박해(1866) 때 서흥(瑞興)에 살던 교우고(高)첨지 부부가 잡혀와 순교한 곳이며, 박해 후 평양에서 이주해 온 황천일(黃千一)의 가족과 노성구(盧成九, 요한 : 황천일의 사위이며 노기남 대주교의 부친)의 가족이 숨어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한 곳이다.이 일대에 널리 복음을 전한 사람은 1878년 제6대조선교구장 리델(Ridel, 李福明) 주교가 체포된 후 이 지역으로 피신해 온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였다. 이후 곡산 지역은 1896년 강원도 이천(伊川) 땅에 포내 본당(浦內本堂)이 설립되면서 그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가 1925년 사창 본당이 분리 설립되면서 다시 이 본당의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이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사람은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신부였는데, 그는 이 지역이 본당의 발전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1928년 5월 본당을 곡산군의 중심지인 곡산읍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박정렬 신부는 곡산 본당을 설립한 즉시 곡산면 장림리(長林里) 일대의 과수원 1,500여 평을 매입,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1929년 10월 3일 축성식을 가졌다. 이어 2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구천우(具天祐, 요셉) 신부는 1931년 5월부터 1941년 10월까지 약 10여 년 동안 사목하면서 소화 유치원을 개설하고, 성당을 증축하는 한편 부인들의 모임인 명도회를 비롯하여 가톨릭 청년회 · 소년회 등 여러 신심 단체를 조직함으로써 본당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9년에는 사창 공소를 다시 본당으로 승격, 분리하였다. 그러나 3대 주임 강주희(姜周熙, 방그라시오)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한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신부 재임 시절부터 가중된 일제의 교회 탄압으로 본당의 발전은 중지 상태가 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북한 공산 정권의 탄압이 계속 이어지면서 유치원과 성당마저 빼앗기는 형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과 함께 본당을 지키던 임충신 신부는 6 25 동란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유엔군이 일시 곡산에 진주하게 되자 사목 보고차 상경했다가 1 · 4 후퇴로 귀임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써 곡산 본당은 침묵의 본당이 되고 말았다. (→ 침묵의 교회)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