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천 본당

肅川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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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룬켓 신부가 지은 숙천 본당 사제관(왼쪽)과 1937년 9월 1일의 성신유치원 개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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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룬켓 신부가 지은 숙천 본당 사제관(왼쪽)과 1937년 9월 1일의 성신유치원 개원식.

평양교구 소속 본당.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 당하리(堂下里) 소재. 1931년 영유(永柔)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42년 2월에 다시 공소로 격하된 뒤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관할 구역은 평원군 북부와 안주군 서부 일부 지역이었고, 관할 공소는 섶가지〔薪枝里〕, 광천리(廣川里), 어파(興雲里), 성교리(城橋里), 입석리(立石里), 용흥리(龍興里) 등 6개소였다. 〔교 세〕1932년 570명, 1937년 1,100명. 〔역대 신부〕 초대 플룬켓(T. Plunkett, 朴) 토마스(1931~1936. 11), 2대 월시(J.Walsh, 위) 요한(1936. 11~1938), 3대 바론(E. Barron, 潘) 에두아르도(1938-1939), 4대 양기섭(梁基涉) 베드로(1939~1942. 2)
숙천 지역에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5년경으로, 문(文) 루가를 비롯한 몇 명의 신자가 공소 강당을 마련함으로써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 숙천공소는 꾸준히 유지는 되었으나 크게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929년에 당시 영유 본당 주임 모리스(J.Morris, 睦怡世) 신부가 장차 숙천에 본당을 설립할 계획으로 숙면 당하리에 2,400여 평의 부지를 마련한 뒤, 강봉길(姜奉吉, 요한)을 숙천 공소에 파견하였다. 강봉길은 이곳에 야학을 설치하여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숙천 공소가 날로 성장하자 이듬해 모리스 신부는 60평 규모의 성당을 신축하고, 1931년에 초대 주임으로 플룬켓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숙천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플룬켓 신부는 이듬해 2층 규모의 연와제(煉瓦製) 사제관을 신축한 데 이어 50평 규모의 한식 강당을 지어 야학을 확장하였다. 이처럼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전개한 결과 1932년 한 해 동안 영세자가110명에 달하였으며, 1935년에는 160명이나 배출되었다. 한편 1934년 9월 26일에는 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평양 지목구 가톨릭 운동 연맹 숙천 지회가 조직되었는데, 종래의 악습을 타파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어 부임한 2대 주임 월시 신부는 1937년 9월 1일에 '성신유치원' 을 개원하였고, 본당 합동으로 실시해 오던 청년 수양회와 교리 강습회를 1937년부터는 공소별로 나누어 개최함으로써 공소 활성화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를 관할하던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일제로부터 수난을 받으면서 성직자 부족에 따른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이에 따라 4대 주임 양기섭 신부가 진남포(鎮南浦) 본당으로 전임된 뒤 후임 신부가 부임하지 못함으로써 숙천 본당은 영유 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었고, 이후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 평양교구 ; 침묵의 교회 ; 영유 본당)
※ 참고문헌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天主教平壤教區史》,분도출판사, 1981. 〔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