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기원전 313? ~238?)

荀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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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

순자.

전국 시대 (戰國時代, 기원전 475~221) 말기의 사상가. 이름은 황(況). 순경(荀卿) 또는 손경(孫卿)이라고도 한다.
〔생 애〕 순자는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를 이어 유가(儒家) 사상을 더욱 체계화시킨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사마천(司馬遷, 기원전145?~85?)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순자는 0세 때 제(齊)나라의 직하학궁(稷下學宮)에 들어갔고 양왕(襄王, 기원전 283~265) 때에는 직하 학자 중에서 최고의 관록을 인정받아 세 차례나 제주(祭酒, 직하학궁의 학장)를 지냈다고 한다. 이 직하
학궁에는 전국 시대 당시 유가를 비롯하여 묵가(墨家) ·도가(道家) · 법가(法家) 등에 속하는 다양한 학파, 즉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모여 자유로이 자기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였기에 학문이 크게 융성하였다. 순자는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제자백가의 여러 입장을 두루 섭렵하여 자기 학문의 영역을 폭 넓게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그는 모함을 받아 초(楚)나라로 망명하였고, 춘신군(春申君)의 도움으로 난릉(蘭陵, 현 강소성)의 지방 수령을 지내다가 춘신군이 죽자 관직을 사직하고 그 뒤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만년에는 제자들과 함께 저술에 전념하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의저서 《순자》는 본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손경자》(孫卿子) 33편"으로, 유향(劉向)의 《서록》(敘錄)에는 "《순경신서》(荀卿新書) 32편"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20권 32편의 체제로 정리된 것은 당(唐)나라 때 양경(楊倞)의 《순자주》(荀子注)에 이르러서인 듯 하다.
〔사 상〕 예론 : 순자는 인간을 강렬한 욕망을 갖고 있으나 지능이 서로 다른 여러 인간들과 함께 사는 사회적 존재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들의 사회적 삶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일정한 사회적 생산물의 생산과 분배를 전제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순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이란 결코 맹자가 주장한 것처럼 도덕적으로 선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인간은 태어 날 때부터 무한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욕구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회적 재화는 점점 더 줄어들게 되고, 따라서 궁핍해진 사회적인 재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야기시킨다고 보았다. 사회적 갈등의 원인을 삶의 방식과 지능이 다른 여러 인간들의 무한한 욕구의 추구에서 찾았던 것이다. 무절제한 욕구 충족에서 오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그는 인간의 욕구 절제를 통한 사회 생산물의 효과적인 생산과 확보를 요구하였다. 따라서 그는 사회적 생산의 강력한 촉진을 위해서는 사회적 분업 노동이 필수적이라고 보았고, 결국 인간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말하자면 '군자(君子)의 정신 노동' 과 '소인(小)의 육체노동' 이라는 맹자의 노동 분업의 원칙을 순자가 현실적으로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순자도 공자(孔子, 기원전 551/552~479)나 맹자와 마찬가지로 유능한 지식인인 군자를 통한 통치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맹자는 통치를 담당하는 군자들의 도덕성과 자율성의 확보에 초점을 맞추어서 '왕도(王道) 정치' 의 이상을 전개한 반면, 순자는 사회 문제의 해결을 단순히 지식인들의 도덕형 이상학이나 자율성의 문제와 연관 짓기보다는, 실제적인 사회적 갈등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사회적 제도의 확립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가 군자, 곧 지식인 엘리트의 자율적 · 지도적 역할을 강조한 것이 맹자와의 차이점이었다.
순자는 안정된 사회란 사회적 분업〔分〕과 사회적 정의〔義〕 사이의 조화를 통하여 실현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러한 이상적 조화가 구현된 사회적 질서 체제란 바로 군자를 중심으로 하는 상하 차등적인 전통적 사회 규범인 '예'(禮)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순자의 철학 사상은 객관적으로 타당한 '예'의 확립을 통한 안정된 사회의 성립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순자는 지식인들의 순수한 도덕성에 호소하는 통치보다는, '관적 사회 규범으로서의 예'에 의한 통치를 이상적인 통일 국가의 조직과 운용의 원리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 사회 규범인 '예'가 아무리 이상적이고 완벽하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훌륭한 사회 규범인 '예'를 현실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인간, 즉 '군자'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이다. 따라서 순자의 철학에서도 인간의 '주체적 능동성'의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 풀이의 핵심으로 등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안정된 사회의 실현과 유지는 처음부터 지능과 능력이 높은 군자들의 몫이지 결코 무식하고 무능한 백성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자는 "군자가 (통치하는) 법(法)의 근원"(君子, 法之原也)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런 '예'에 기초하는 사회가 실현되기 위하여 순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명'(正名), 즉 '실제와 명분의 확실한 통합'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순자는 <정명 편>에서 단순히 논리학적인 문제만을 다루지 않았다. '이름' 또는 '명분'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명'(名)은 사회에서 개개인들이 실제로 지켜 나가야 할 '객관적인 질서'의 기초 단위인 셈이다. 순자는 이러한 '명분' 또는 '이름'의 의미가 제멋대로 해석되어 객관적으로 타당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면, 안정된 사회의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는 <정명 편> 첫머리에서 옛날 성왕들이 '명'을 제정한 의의를 설명한 다음 명변론자(明辯論者)들에 의한 멋대로의 해석(詭辯)을 크게 비판하였다. 사실 전국 시대 말기에는 특히 혜시(惠施, 기원전 380~310)와 공손룡(公孫龍, 기원전 320?~250) 등과 같은 명변론자들이나 장자(莊子, 기원전 4세기경)의 상대주의적인 인식 이론 등이 상당히 풍미하였었다. 이들은 명사(名辭)의 세밀한 분석이나 사변적 논증을 통하여 절대적 · 객관적 인식의 틀을 부정하는 변증론(詭辯)들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순자는 이에 대항하여 현실 사회의 혼란을 막고 유가적인 지식인 중심의 사회 질서 체제의 확립을 분명하게 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정명'의 문제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인성론 : 순자는 <성악 편>(性惡篇)에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정반대의 입장에서 인성(人性)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인간이 지닌 본능적 욕망을 그대로 방치하면 세상은 서로 다투어 어지러워진다고 보고, '성'(性)에 반대되는 '위'(僞)를 제시하였다. '위' 는 '인'(人, 사람)과 '위'(爲, 행위)의 합성 개념으로 "후천적 · 인위적인 노력"을 뜻한다. 그리고 이 '위'의 극치가 바로 옛날 성왕(聖王)들이 제정한 예의(禮義)라고 하였다. 순자는 바로 이 예의 즉 사회 규범이 바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이라고 보았는데, 이런 그의 사상적 면모는 <왕제 편>(王制篇)과 <예론 편>(禮論篇)에도 잘 설명되어 있다. 요컨대 순자에 의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룰 수밖에 없고 사회 질서의 유지는 예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하며, 그 예의 는 사회 질서의 혼란을 막기 위해 성인(聖人)이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예의는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인간 관계의 상하 차등에 상응하는 질서를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순자는 세습제나 가족적 결합에서 주어지는 종족의 '혈연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지식인 엘리트인 현인(賢人)의 발탁과 기용을 통해 존현사능(尊賢使能)의 원칙을 크게 설파하였다는 점이다. 결국 순자는 사회적 분업과 사회 정의의 조화 속에서 지식인의 주도적 역할을 통한 사회적 갈등의 해결을 모색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자연관 : 공자나 맹자의 사상과 구별되는 순자 철학사상의 고유한 특질은 순자의 자연관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 고대 철학 사상의 발전을 '천'(天)에 대한 '의인적 사고'(anthropomorphismus부터)부터 인간 중심의 '주체적 인본주의'로의 발전 과정이라고 한다면, '탈의인적 사고'의 첫걸음은 도가(道家) 사상가들의 자연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적인 '자연'개념은 유가 사상가 중에서 순자에게서 비로소 만나게 된다. 따라서 순자의 '천론'(天論)은 공자나 맹자보다 크게 진일보한 사유적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자와 맹자로 이어지는 순자 이전의 유가 사상에서는 그들이 이상으로 하는 도덕적 이상의 권위가 '천' 에 근거하려는 의인적인 사고의 전형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순자 이전의 유가 사상에서 '천'이란 만유 위에 군림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적 권위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순자의 '천'은 더 이상 '인격화된' 점이 없으며, 인간의 사회적 · 도덕적 범주와 원칙적으로 구분되는 단지 물리적인 '자연 세계' 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자연에는 자연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고, 인간과 사회에는 그 나름의 법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
에서 벌어지는 각종 길흉화복(吉凶禍福)과 빈곤 질병(貧困疾病)은 '천'이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 현상에서 나타나는 기괴한 변화나 사회적 · 정치적인 선악도 '천'과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순자는 천을 '자연적 · 물리적' 자연으로 파악함으로써, 종래의 신비적인 '의인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는 인간 주체적인 인본주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천'이 물질적인 존재임을 논증하여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신비주의를 배격하였고, 동시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 대응을 부정'하고 맹목적으로 '자연 세계에 대한 함몰을 통해 인간 문명의 의미를 부정' 하는 노장일파(老莊一派)의 관념적 숙명론까지도 비판하였다. 이렇듯 순자 사상의 주체적 · 능동적인 인본주의 사상은 '천'론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체적 인본주의 사상의 생성에는 당시 사회 생산력의 상당한 발전,특히 천문학과 농업 생산 지식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인 중심의 주체적 인본주의의 유가적 관점에 따라 순자는 <해폐 편>(解蔽篇)에서 당대의 다양한 철학적 조류, 즉 제자백가들에 대하여 체계적인 비판을 하였다. 즉 유가를 제외한 제자백가들은 진리, 곧 '총체적 인본주의의 의의'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고립된하나'의 입장만을 천착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평가와 의의〕 순자의 철학 사상에는 맹자와 마찬가지로 군자 즉 엘리트 지식인 중심의 '왕도' 이상론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통일된 중앙 집권적 절대 군주 제국의 출현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부국 강병을 지향하는 '패도' (覇道)의 정치 원리도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는 맹자가 군주의 독단적인 지배를 비판하면서 민생에 기초한 민본(民本)의 왕
도 사상을 개진한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순자의 철학 사상에는 법가 · 도가 등 제자백가들의 철학 사상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새롭게 등장하는 통일된 군주 중심의 관료제 국가 체제에서 유가 사상이 지배적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립될 수 있을 만큼 크게 집대성되어 있다. (→ 극기 ; 유교)
※ 참고문헌  荀子, 《荀子》/ 司馬遷, <孟子荀卿列傳>, 《史記》. 〔宋榮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