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평양교구 소속 본당.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 관상리(館上里) 소재. 은산(殷山) 본당의 후신으로 1928년 8월에 설립되었다가 1944년 폐쇄되었다. 관할 구역은 순천군 전 지역과 맹산군 일부 지역이었으며, 관할 공소는 중평리(中坪里), 조산리(棗山里), 자산(慈山), 북창(北倉), 신창(新倉), 맹산(孟山) 등 6개소였다. 〔역대 신부〕 초대 크레이그(H. Crag, 奇厚根) 후고(1928. 8~1933) 2대 마컴(R. Markham, 馬) 레지날드(1933-1937), 3대 크래머(C. Kramer, 具) 치릴로(1937. 3~1939. 1), 4대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1939. 1~1942. 1), 5대 장두봉(張斗鳳) 안드레아(1944. 4~11).
〔은산 본당 시기〕 순천군 지역에 언제 공소가 설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지역이 섶가지〔薪枝里〕 본당 관할로 편입될 무렵인 1898년경에 은산의 김 베르나르도 사가(私家)에서 공소 예절을 드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늦어도 1890년대 말에는 은산 공소가 설립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900년대에 각지의 신자들이 문맹 퇴치 사업에 힘쓰게 되자 이곳 신자들도 합심하여 1908년 순천군 낙민면(樂民面)에 보덕(普德)학교, 선원면(仙院面)에 보창(普彰)학교, 풍전면(楓田面) 조산(棗山) 공소에 성명(聖明)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들은 재원(財源) 부족 등으로 1911년경 모두 폐교되고 말았다.
한편 평안도 지역 교구 설정 책임자인 번(P. Byrne, 方溢恩) 신부와 영유 본당 주임 모리스(J.Morris, 睦怡世)신부는, 평안남도 동북부 지방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은산 지방에 본당을 설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926년 5월 순천군 은산면 조산리에 은산 본당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설립 직후 김덕현(金德鉉, 안토니오) 회장을 비롯한 신자들의 노력으로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하였고, 선교 활동에도 힘을 기울여 1927년에는 신자수가2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던 중 교구에서는 평원선(平元線)과 만포선(滿浦線)의 분기점인 순천 지역이 지리적 요충지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교세 확장의 측면에서 볼 때 은산 지역보다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 결과 은산 본당 설립 2년 만인 1928년 8월에 본당을 순천읍으로 이전함에 따라 순천 본당이 설립되었
다.〔순천 본당 시기〕 초대 주임 크레이그 신부는 순천으로 이전하면서 관상리 일대에 부지를 매입하여 한식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이어 후임으로 부임한 2대 주임 마컴 신부는 교리 학교를 운영하여 신자들의 영적충실을 도모하였고, 각 공소의 강당을 신축하여 교리 공부와 문맹 퇴치 사업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다. 그러나 관할 구역이 너무 넓어 사목에 어려움이 뒤따르자, 1936년 5월에 성천(成川)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성천군 · 강동군 · 양덕군 · 맹산군의 일부 지역을 이곳으로 이관하였다. 그러나 1937년 3월에 3대 주임으로 부임한 크래머 신부는 신병으로 적극적인 사목을 전개하지 못하다가 1939년 1월 휴양차 귀국하였고, 이어 4대 주임으로 홍용호 신부가 부임하여 신자 배가 운동에 주력함으로써 1940년부터는 예비 신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그후 1944년 4월에 장두봉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이때는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어 사목 활동이 크게 위축되던 때였다. 같은 해 11월 평양 대목구에서 사목하던 서울 대목구 소속 사제 전원이 복귀함에 따라 장두봉 신부는 강계(江界) 본당으로 전임되었고, 순천 본당은 기림리(箕林里)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이후 순천 공소마저도 1949년 12월에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기림리 본당과 함께 폐쇄되어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 은산본당 ; → 평양교구 ; 침묵의 교회)
※ 참고문헌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天主教平壤教區史》, 분도출판사, 1981. 〔金成喜〕
② 광주대교구 소속 본당. (⇨ 저전동 본당)
순천 본당
順川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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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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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 성당 내부 모습(왼쪽)과 1937년의 순천 성당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