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의 교회사가이자 성인 전기 작가. 세베로는 자신의 성이 '술피치오' 라고 했는데(《서한》 3), 그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대부분의 이야기는 젠나디오(Gennadius,+5세기경)의 《명인록》(De viris illustribus, 19)과 그의 친구였던 바울리노(Paulinus de Nola, 353~431)의 《서한》을 통해서이다.
〔생 애〕 360년경 아귀타니아(Aquitani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보르도(Bordeaux)에서 고전과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바울리노를 만난 것 같다. 공부를 마친 뒤 변호사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부유한 집정관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였으나 부인이 일찍 사망하자 곧 공직 생활을 청산하고(Paulinus de Nola, 《서한》 Ⅴ, 5) 389년 경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394년경에는 모든 재산을 다 청산하고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요인은 부인이 일찍 사망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술피치오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투르의 마르티노(Marinus Tourenus, 316?~397)의 권고와 바울리노의 모범에 의한 것이었다(Vita Martini, 25).
이후 술피치오는 엘루소(Eluso)에 머무르다가 자신을 위해 일부 재산을 남겨 두었던 프레물리아쿰(Premuliacum)이라는 마을에 은둔하며 영성 생활과 저술 활동에 열중하였다. 이 마을은 툴루즈(Toulouse)와 카르카손(Carcassonne) 사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었다. 또 그는 이 은둔 장소에 마르티노가 세운 수도원과 유사한 공동체를 형성하여,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장모인 바술라(Basula)와 함께 생활하였다. 바술라는 술피치오에게 물질적인 도움은 물론 영성 생활로 나아가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술피치오가 순교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었다. 406년 12월 갈리아가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았을 때 프레물리아쿰도 황폐화되었는데 술피치오는 이때 무사히 피신하여 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또 420~425년 사이에 프리밀락(Pimillac)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젠나디오는 술피치오가 펠라지우스주의(Pelagianismus)의 오류에 빠져 생애 말기에 보속 행위로 죽을 때까지 저술을 중단하고 절대 침묵의 삶을 살았고(De virisillustribus, 19), 그 당시의 저자들이 술피치오가 평신도라고 전하는 것과는 달리 사제직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하고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저서와 사상〕 술피치오의 문체와 언어는 살루스티우스(Sallustius, 기원전 86~34)나 타치투스(Cornelus Tacitus, 55?~120)처럼, 베르질리우스(M.P. Vergilius, 기원전 70~서기 19)에서부터 대다수의 라틴 문학가들에게 이르는 문학 양식이 드러나는 고전적 유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살루스티우스'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그는 화려하게 장식된 수사학적 문체를 선호하기보다는 주로 문학적이고 성서적인 내용을 인용하였다. 특히 《마르티노의 생애》(Vita Martini)에서는 매우 매혹적인 구술을 선보였다.
《연대기》(Cronica) : 400년경에 두 권으로 출판되었으며, 세상 창조부터 서기 400년까지의 역사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칠십인역 성서를 주요 자료로 이용하여 성서 본문들이 의도하는 바를 분석하고 있는데, 이외에도 율리오 아프리카노(Sextus Julius Africanus, 160~240)와 히폴리토(Hippolytus, 170~236)의 《연대기》들,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339)의 《연대기》 라틴어역본, 타치투스의 《역사》와 《연대기》, 바울리노의 《서한》 31 등이 원천 자료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내용상 유대인, 로마인, 그리스도교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권부터 2권 중반까지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광범위한 '유대인' 부분은 구약성서의 역사를 요약한 것으로, 세상 창조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 탄생까지의 유대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역사는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그 역사가 지니는 위대함 때문에 작가가 감히 요약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는 '로마인' 부분에서는 박해 당시의 그리스도교와 로마 제국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약술하였고, 그리스도교 부분에서는 자신과 동시대의 교회 상황과 천년 왕국설(millenarismus) 아리우스주의(Arianismus), 프리쉴리아누스주의(Priscllianismus) 등 종교적 논쟁들을 다루었다. 술피치오는 이 저서에서 신학보다 연대기에 더 치중하였는데, 이단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이후 어떠한 일이 생겼는지까지 기록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프리쉴리아누스주의의 역사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며, 저자의 비판 정신과 더불어 여러 자료들 중에서 적절한 자료를 선별한 저자의 능력을 엿보게 한다는 면에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르티노의 생애》 : 술피치오의 저서 중 가장 걸작으로 꼽히며, 마르티노 성인이 살아 있을 당시 바술라의 도움을 받아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397년에 바울리노에게 보낸 이 전기는 400년부터 계속해서 첨가 · 보완되었는데, 바울리노는 397~398년 사이에 쓴 편지에서 이 전기에 대해 매우 만족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술피치오는 이 작품을 저술할 때 아타나시오(Athanasius, 295~373)가 저술한 《안토니오의 생애》(Vita Antonii)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하며, 예로니모(Hieronymus Eusebius, 341?~420)가 쓴 《테베의 바오로의 생애》(Vita Pauli Tebarum), 《말코의 생애》(Vita Malci), 《힐라리오의 생애》(VitaHilarii) 등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마르티노의 생애》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언과 주교 선출 전까지의 제1부, 주교직을 수행하는 동안 행한 업적을 언급한 제2부, 그리고 마르티노의 성격과 습관 등에 대해서 세심한 주의를 곁들이며 마르티노의 인격에 대해 서술한 결언 등이다. 이 작품의 첫머리는 아귀타니아의 귀족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한 데시데리오(Desiderius)에게 이 책을 헌정한다는 내용의 서한이 장식하고 있다. 여기서 술피치오는 그에게 이 작품을 출판하는 것에 대한 의혹을 드러내면서, 모든 이들이 이 작품의 사본을 원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표현은 당시 주교들과 성직자들의 수도 생활을 반대하는 움직임에 대한 작가의 반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술피치오가 이 작품을 많은 이들에게 널리 보급하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서언에서는 이교도 세상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는 소크라테스(Sokrates, 기원전 469~399) 같은 위대한 인물을 제시하면서 참된 지혜, 천상적 온유함, 신적 덕행을 지니고 있는 마르티노를 소개하였다. 마르티노가 체험한 군대 생활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이 작품에 따르면, 마르티노는 병역 의무가 끝날 무렵 수도 성소를 열망하기 시작하여 그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작품에는 아미앵(Amiens) 성문에서 망토를 두 조각으로 나눈 유명한 일화, 푸아티에의 힐라리오(Hilarius Pictaviensis, 315~368)를 만나면서 수도 생활에 전념하겠다고 결심하고 제대한 이야기, 아리우스주의와 논쟁하고 리귀제(Liqugé) 수도원을 설립한 이야기 등도 소개되어 있다. 또 이 작품에 따르면, 마르티노는 370년 주교가 된 이후에도 계속 수도자로 생활하면서 사목적 권위와 수도 생활 그리고 자선활동에 조화를 이루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또 이교 사상과 계속 싸우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들의 복음화에 전념하였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마귀에 걸린 이들에게서 사탄을 쫓아내는 등의 기적도 행하였다. 이 작품의 결언은 마르티노를 영적 스승이요 수덕가이며 성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르티노의 생애》는 단순히 마르티노의 삶을 널리 소개하는 데만 기여한 것이 아니라, 순교 문학의 증진에도 크게 기여하였고 중세 성인전의 모범이 되었다. 중세에는 《작은 마르티노》(Martinellus)라는 제목으로 널리 읽혀졌고,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영성을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로 꼽혔다.
<서한> : 젠나디오는 술피치오가 쓴 많은 서한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특별히 누이인 클라우디아(Claudia)와 바울리노에게 보낸 서한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서한은 3통에 불과하다. 이 서한들은 397~398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마르티노의 생애》를 보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서한들의 수신자들은《마르티노의 생애》 수신자와 마찬가지로 귀족 출신의 개종자들이고, 모두 마르티노의 추종자들로 수덕 생활에 대한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서한 중 첫 번째 것은 사제이며 마르티노의 제자로 훗날 주교가 된 에우세비오에게 보낸 것(Ad Eusebium)으로, 《마르티노의 생애》가 출판된 이후 쓰여졌다. 여기에는 마르티노를 중상 모략하는 이들에게 반박하는 내용과 성인의 삶을 위협했던 화재 사건, 그리고 《마르티노의 생애》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화 등이 적혀 있다. 두 번째 서한은 아우렐리오 부제에게 보낸 것(Ad Aurelium diaconum)으로, 구성이 뛰어나고 마르티노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시성의 편지' (lettera di canonizzazione)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세 번째 서한은 그의 장모 바술라에게 보낸 것 (Ad Bassulam parentem)으로, 마르티노의 마지막 여정과 사망 그리고 장엄한 장례식 등이 담겨 있는데 장례식 조사(弔詞)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서한에서 그는 마르티노를 순교자로 소개하고 있다.
《대화록》(Dialogus) : 이 작품의 주제는 술피치오가《마르티노의 생애》에서 많이 다루지 않았던 마르티노가 행한 기적들이다. 사막 교부들의 생애 중에서 특히 《안토니오의 생애》에서 문학적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술피치오는 마르티노가 행한 기적들을 제시하면서 이집트의 훌륭한 수도자들 못지않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404년경에 두 권으로 출판되었으며, 갈로(Gallus)와 포스투미아노(Postumianus)가 2일 동안 행한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갈로는 마르무티에(Marmoutiers)의 원로 수도자로서 마르티노의 제자이며, 포스투미아노는 아귀타니아의 부유한 귀족으로 술피치오의 친구이자 이집트 수도자들에 대한 열렬한 흠모자이다. 술피치오는 이 두 수도자들의 입을 빌려 이집트의 수도자들과 마르티노가 행한 경이로운 일들을 소개하였는데, 젠나디오는 이 책의 제목을 《포스투미아노와 갈로에게 보낸 위로 편지》 (Consolatio Postumiani et Galli)라고 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예로니모의 작품 중 몇 구절을 들어 술피치오가 천년 왕국설의 추종자로 고발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 주장은 교황 젤라시오 1세(492~496)가 494년에 주재한 로마 교회 회의에서 그의 《대화록》이 《포스투미아노와 갈로의 소책자》(Opusula Postumiani et Galli)라는 이름으로 위경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는 데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 마르티노, 투르의)
※ 참고문헌 《PL》 20/ Institutum Patristicum Augustinianum (a cura di Angelo di Berardino con presentazione di Johannes Quasten), Patrologia, vol. 3, Marietti, Roma, 1992/ G. Bardy, 《DTC》 28, pp. 2760~2762/ S.A. Bennett, 《DCB》/ G. Bosio · E. dal Covolo · M. Maritano, Introduzione ai Padri della Chiesa, Secoli IV e V, Societ Editrice Internazionale, Torino, 1995/ J. Fontaine, 《DPAC》/ Cirillo Vogel, 《EC》/ 《ODCC》, pp. 1556~1557. 〔邊宗燦〕
술피치오, 세베로 (360?~420/425?)
Sulpicius, Severu
글자 크기
8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