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에(Jean-Jacques Olier, 1608~1657) 신부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정한 신학교 관련 법에 부응하여 1642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한 사제회.
〔인가와 사도직〕 쉴피스회의 기본 회칙은 창설자 올리에가 마련하였으나, 이후 그의 후계자인 브르통빌리에(Alexandre Le Ragois de Bretonvilliers)가 이를 다시 작성하여 1664년 8월 5일에 교회의 승인을 받았고, 그 뒤 내용이 보완 · 수정되어 1921년에 교황청의 잠정 인가를 받았다. 최종 승인을 받은 것은 1931년 7월 8일 교황비오 11세(1922~1939)에 의해서였다. 쉴피스회의 고유목적과 사도직은 "젊은이들을 신학교에서 교회 생활과성품성사를 받기에 합당한 자들이 되도록 준비시키고, 사제직의 품위와 성사 수행을 하기에 필요한 지식과 덕성을 지닌 자들로 양성"하는 데 있다.
〔창설과 역사〕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뜻을 모은 올리에와 그의 동료 신부 두 명은, 1641년 12월 29일 파리 근교의 보지라르(Vaugirard)에 작은 집 한 채를 매입한 뒤 몇 달 동안 시험 운영을 하였다. 당시 이들의 목적은 단순히 성직 지망자들을 교육하는 작은 공동체를 설립하려는 것이었는데, 좋은 반응을 얻자 이듬해 4월부터 정식으로 신학생들을 받기 시작하였다. 신부들과 신학생들은 함께 노동하고 연구하며, 기도 생활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올리에가 파리의 포부르 생 제르맹(Faubourg St. Germain)에 있는생 쉴피스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자 이들 12명의 신학생과 4명의 신부 모두는 그를 따라 이곳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공동체가 스스로를 '생 쉴피스의 사제회' 라고 칭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신학생들은 정해진 본분을 수행하면서 본당 활동에도 참여하였고, 상급반 신학생들은 소르본 대학교의 신학부에 등록하였다.
이후 이 공동체는 점차 확대되어 신학교로 사용할 두 개의 건물을 매입할 정도로 회원수가 늘어났다. 올리에 신부는 신학생 가운데 학교에 계속 남아 자신과 같이 학교 운영에 참여할 후보자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는데, 이들은 신학교의 중추를 이루는 동시에 쉴피스회의 핵심 요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쉴피스회는 1645년에 정식으로 정부 인가를 얻어 다른 수도회들과 동등한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1647년 부터는 교구 신학교를 창설하기 위해 적절한 책임자를 찾고 있던 지방 교구 주교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생 쉴피스 신학교 출신의 사제들이 프랑스 각 지방에서 일하게 되었다.
1652년에 올리에는 신학교를 위해 자신의 여생을 헌신하고자 본당 사제직을 사임한 뒤, 쉴피스회 회원들에게 낭트(Nantes) · 비비에(Viviers) · 르 퓌(Le Puy) · 클레르몽(Clemonnt)에 있는 신학교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올리에 신부는 1657년 4월 2일 파리 근교의 이시(Issy)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훗날 이곳으로 파리의 쉴피스회 신학교가 이전하였고, 청원자들의 수련소도 이곳에 마련 되었다.
올리에가 사망한 뒤 갈리아주의(Gallicanismus)와 얀센주의(Jansenismus)가 신학교 생활을 저해하는 요소로 등장하면서 널리 퍼졌다. 그러나 쉴피스회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점진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프랑스 대혁명(1788~1789) 직전에는 회원수가 155명에 이르렀지만, 대혁명으로 쉴피스회도 다른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신학교는 폐쇄되었고,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진 박해를 받았다. 더욱이 '성직자 공민 헌장' 에 대한 선서를 거부한 18명의 회원들은 사형을 당하였다. 프랑스 내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된 쉴피스회는, 1791년에 미국의 볼티모어에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또 영국 정부에 의해 1763년부터 몬트리올에 고립되었던 쉴피스회의 회원들을 돕고자 1794년에는 캐나다로 회원들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쉴피스회는, 특히 1800년부터 대혁명 기간에 치른 희생을 회복하고자 했고,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쉴피스회의 정신과 활동을 최대한 완벽하게 복구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7세기의 것과 동일한 규율 · 건축 양식 · 교재 등을 성직자 양성에 사용하였다. 이전과는 달리 신학교를 교구에 하나씩 설립하였지만 제도적인 면에서는 17세기와 비교해서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학교와 신학생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지만, 나폴레옹에 의해 억류되어 있던 교황에게 호의를 보였다는 이유로 나폴레옹의 칙령으로 1811년 10월 8일에 다시 해산되었다가 나폴레옹의 제국이 종식될 무렵인 1814년에 재건되었다. 그리고 1816년 4월 3일 루이 18세(1814~1824)로부터 승인을 얻은 후 발전을 거듭하여 1900년에는 회원수가 약 400명 정도에 이르 렀고, 파리와 이시에 있는 신학교 외에도 프랑스의 23개 교구 신학교와 5개의 신학 대학교를 운영하였다.
20세기 들어 프랑스에서는 다시 가톨릭 교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조짐은 1902년에 프랑스 총리가 된 콩브(J.L.E. Combes, 1835~1921)가 교육 문제에서 교회가 맡고 있는 주요 기능을 빼앗는 법률을 제정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쉴피스회는 이런 억압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비밀스럽게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1905년 12월에 프랑스에서 정교 분리법이 채택되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이후부터 성직 지원자들의 수는 점차 감소하였지만, 쉴피스회는 1920~1930년대에 베트남 · 일본 · 중국 등지에 대규모의 신학교를 창설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1950년 이후에는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지에 진출하였다. 1996년 현재 37개의 분원에서 379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영성의 변모〕 창설자의 영성 : 올리에는 자신이 창설한 소공동체와 관련하여 그의 저서 《신학교 신심》(Pietas Seminarii)과 수많은 미완성 초고들을 통해 강력한 영성 강령들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그는 이 공동체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며, 그러한 삶을 통해 예수의 성심이 우리의 가슴속에 깊숙이 파고들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성직자들이 수행해야 할 근본적인 직무는 "성체성사에 헌신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성사는 성직자들로 하여금 예수만이 가장 영광스러운 유일한 사제이며, 거룩한 삼위 일체의 최고 위엄에 기초한 진정한 전례와 신앙이 가득 찬 교회에서 가장 거룩한 성사를 확립한 분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인성은 이러한 찬양을 받을 만하며 겸손함과 소박함으로 가득한 예수의 어린 시절에 특히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마리아와 요셉에 순종하였던 어린 예수의 삶은 결국 성직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봉사자로서 순명의 삶을 실천하게 하는 모범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올리에에 의하면, 신학교가 지향하는 것은 '사도학교 이며, 이를 위한 모범은 곧 예수의 사도들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신학교는 "사도들의 규범을 연구하고, 그들의 정신을 원용하며, 그들의 품행을 본받고 그들이 우리에게 알려 준 복음의 내용에 따라 합당하게 살기 위해 모인 곳이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경멸,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수용하고 예수의 말씀과 모범, 고통을 통한 희생 즉 십자가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와의 일치는 "성령의 살아 있는 활동" 에 충실함으로써 추구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판단과 의지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17세기 : 올리에의 저술과 증언들이 수록된 《회고록》(Mémoires)과 그의 전기 《생애》(Vie)가 이 시기에 제자들에 의해 저술 · 발간되었고, 그의 단상들을 모은 《영적편지》(Lettres spirituelles)도 출판되었다. 쉴피스회의 도서관에는 수많은 자필 원고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내용들에는 주로 세속적인 일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과 고행을 강조하는 공통점이 나타나 있다. 브르니에(Antoine Brenier)를 비롯한 17세기의 쉴피스회 장상들은 회개의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쉴피스회는 지나치게 맹목적이었던 페넬롱(Francois de Salignac de La Mothe Fénelon, 1651~1715)의 신비주의를 지지하는 동시에 그리뇽 드 몽포르(Louis Marie Grignon de Montfort, 1673~1716)의 과도한 고행 생활을 따르는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영성 지도자들은 기도와 영성체로 구성된 올리에의 단순한 기도 생활의 모범을 더욱 발전시켜 《묵상 기도의 방법》(Méthode de I'oraison mentale) 《기도를 잘하기 위한 방법과 조건》(De I'oraison, méthode et condition pour bien prier) 등 영성 훈화 작품들을 저술하는 등 신학생들을 기도 생활로 인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겸손, 기도 생활의 훈련, 엄격한 고행 및 신앙심을 강조하는 교육 방침은 이후 프랑스의 성직자상을 만들어 내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 이 시기에 와서 쉴피스회는 더 안정적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1743~1789년에 파리의 '생 쉴피스 신학교 는 프랑스의 주교 중 절반을 배출할 정도였고, 전에 비해 수적으로 증가한 쉴피스회 회원들은 수준높은 교의 신학과 윤리 신학에 관련된 저서들을 많이 집필하였다. 하지만 영성 관련 저서들은 이전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 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올리에의 풍부한 저술들을 재편집하는 작업이 갑작스럽게 단절된 것 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1700년부터 1725년까지 쉴피스 회의 총원장을 지낸 르샤시에(François Leschassier)는 전통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올리에의 저서들을 재편집하는 구태의연한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생활 양식을 지향하고자 하였다. 그는 "쉴피스회의 정신은 열성적인 기도와 은둔 생활로부터 나오며, 세속에 대한 경멸, 십자가에 대한 사랑, 자기 형제들에 대한 친절 및 성직자들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가슴속에 새겨진 겸손, 애덕 및 그리스도교적 소박함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고 하였다.
19세기 이후 : 19세기에는 올리에를 비롯한 초대 창설자들의 영성이 새롭게 조명되고, 그들의 저서들이 재편집되었다. 현대에 와서 사회와 교육의 발전 및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나타난 새로운 교회의 요구에 따라 쉴피스회 역시 이전에 비해 그 기능이 감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영성이나 교육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현대적 교육 방법에 맞추어 쉴피스회의 전통적인 영성과 교육 방법 또한 새로운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 올리에, 장 자크)
※ 참고문헌 Irénée Noye, 《DSp》 14, Pp. 170~181/ C.J. Noonan, 《NCE》 13, pp. 785~787. 〔편찬실〕
쉴피스회
一會
〔라〕Congregatio Sulpitiensis · 〔프〕Compagnie des Prêters de Saint-Sulpice(P.S.S.) · 〔영〕Society of Priests of St. Sulpice(Sulpic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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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