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도회 소속 한국 선교사. 수도명은 코르비니아 노. 한국 이름은 주성도(周聖道) .
1901년 1월 31일 독일 바이에른(Bayern) 주(州) 다하 우(Dachau) 시에서 11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1907년 5 월 1일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오델츠하우젠(Odelzhu- sen) 본당의 복사도 하였다. 1912년 9월 15일 슈아이에 른(Scheyern) 소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한 뒤 1917년 9월 15일 뮌헨-프라이징(München-Ferising) 대교구의 소신학 교에서 지내면서 프라이징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다. 교 구 신부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진 이 학교를 졸업할 즈음 그는 전교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21년 6월 21일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입회하여 그 해 7
월 3일 베버(N. Weber, 1870~1956) 총아빠스의 주례로 수 도복과 수도명을 받았다. 1922년 7월 4일 첫 서원을 하 였고, 1924년 7월에 수도원 내에 개설된 시립 대학교에 서 철학 과정을 수료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뮌헨 대학교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1925년 8월 9일 종신 서원을 한 데 이어 10월 18일에 차부제품, 이듬해 3월 7일에는 부제품을 받았다. 이어 1927년 4월 3일 사 제 서품을 받은 뒤 이듬해 3월 31일 뮌헨 대학교 신학부 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슈레플 신부는 5월 28일 4명의 동료들과 함께 이탈리아 제노바 항을 출발 하여 중국 상해(上海)를 거쳐 7월 13일 대련(大連)에 도 착하였다. 이곳에서 기차로 서울에 와서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를 만난 뒤 다시 기차로 덕원(德源) 수도원 에 도착하였다. 그는 철학을 공부할 때 베버 총아빠스가 쓴 한국 기행문 《조용한 아침의 나라》(Im Lande der Mor- genstille)와 기록 영화 등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언어, 풍 속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갖고 있 었다.
이해 7월 19일 연길 지목구(延吉知牧區)가 설정되고 그 사목권이 베네딕도회에 위임되자,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던 슈레플 신부는 2명의 신부와 함께 연길로 파견되었 다. 이곳에서 그는 브레허(T. Breher, 白化東, 1889~1950) 신부로부터 한국어를 더 배운 다음 1929년 10월 4일 두 도구(頭道溝) 본당이 설립되자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 다. 그리고 1931년 10월 5일 옹성라자(甕聲砲子)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부녀자들에게 예비 신자 교리를 가르 치는 반일 학교(半日學校)를 개설하는 한편, 초등 교육 기관인 해성학교(海星學校)의 운영에도 관심을 기울였 다.
1932년 6월 4일 대령동 본당의 아쇼프(S. Aschoff, 安)
신부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1934년까지 매주 본당을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하였고, 지목구장 브레허 신부의 지시로 해북진(海北鎮)의 선목 농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해 주기도 하였다. 1935년 봄에 는 본당 이름을 명월구(明月溝) 본당으로 바꾸었고 12 월에는 성당과 교실 및 교무실 등을 완공하여 봉헌하였 다. 1936년 8월에 신참(新站) 본당을 분리시키면서 초 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그 해 말 용정 하 시(龍井下市)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슈레플 신부는 본당 재임 중 본당을 네 구역으로 나누어 남녀 한 명씩 구역장 을 두었으며, 그 위에는 본당위원회를 두어 신자들이 직 접 본당 운영에 참여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도록 조직을 강화하였다. 또 해성학교의 발전을 위해서도 많 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1944년 일본의 정책으로 국유화되고 말았다. 광복 후 연길 지역이 공산 정권에 점령되어 어려움을 겪던 중, 1946년 5월 22일 중국군에 의해 체포되어 동료 선교사 와 수사들과 함께 남평(南坪) 수용소에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그 해 9월부터 연길 상시(延吉上市) 본당에서 생 활하였다. 1947년 가을에는 연필을 만드는 기술자란 이 유로 용정에 가서 생활하였는데, 이듬해 5월 중국 공산 당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자 용정 본당에서 사목을 하 였고, 1949년 4월 연변 의과대학 교수로 채용되어 처음 에는 독일어를, 나중에는 라틴어를 가르쳤다. 본국으로 의 강제 귀환에 따라 1950년 12월 24일 용정을 떠나 이 듬해 1월 독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돌아간 슈레플 신부는, 1953년 11월부터 약 6개월 간 영국 런던에서 유학을 하였다.
1954년 9월 한국 선교사로 재임명되어 11월 23일 부 산에 도착하였고, 이후 부산 성 분도병원 지도 신부로 있 으면서 수련자 교육을 위해 헤르베겐(Ildefons Herwegen) 아빠스의 저서 《성 베네딕도의 성격 묘사》, 《성 베네딕도 가 주신 성훈의 진수》, 《성 베네딕도의 성규》 등을 번역 하였다. 그리고 그레고리안 성가집에서 주일과 대축일의 성무 일도를 발췌한 성가집을 새로 만들어 사용하도록 하였고, 수녀원이 병원 신축으로 어려움에 빠졌을 때에 는 직접 건축 공사를 지도하고 현장에서 노동까지 마다 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된 왜관 (倭館) 수도원의 부원장으로 1964년 5월 15일에 부임 하면서, 분도출판사의 책임을 맡아 해박한 신학 지식으 로 《천주와 인간과의 역사》(1967), 《구약과 신약의 파스 카》(1968), 《하느님 장막》(1971) 등을 번역하였고, 1969 년에는 《수도자의 기도》를 편찬하였다. 1969년 9월에 신동 본당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고, 1973년 3월 12일 에는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지도 신부 로 재부임하였으며, 1977년 4월 3일에는 사제 서품 금 경축 기념 미사와 축하식을 왜관 수도원에서 가졌다. 이 후 고령으로 일선 사목에서 은퇴하여 왜관 수도원에 머 무르던 중 1980년 1월 10일 중풍으로 쓰러졌는데, 투병 중 자신의 일대기를 기록하여 4년여 만인 1984년 11월 말에 자서전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를
출판하였다. 1990년 2월 18일 왜관 수도원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수도원 묘지에 묻혔다. (→ 연길교구 ; 명월구 본당 ; 용정 하시 본당)
※ 참고문헌 주성도,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주성도 신부 자서전》, 분도출판사, 1993/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 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부산 올 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은혜의 60년 (1931~1991)》,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 1995/ 《교회와 역사》 273호(1998. 2), 한국교회사연구소, pp. 8~12. 〔편찬실〕
슈레플, 코르비니안 (1901~1990)
Schräfl, Corbin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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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코르비니안 슈레플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