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M. Luther, 1483~1546)의 개혁 운동을 무력으로 저지하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Karl V, 1519~1556)에 반대하여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도시 대표들이 1531년에 슈말칼덴(Schmallkalden)에서 결성한 군사 동맹.
〔배 경〕 루터는 자신의 개혁 운동을 처음부터 제후들에게 의존하였다. 따라서 제후들의 보호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당시의 상황에서 루터의 개혁 운동은 정치와 혼합될 수밖에 없었고, 루터의 생각에 동조하는 소수의 제후들과 도시 대표들이 집단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526년에 열린 슈파이어(Speyer) 제국 의회에서는 가톨릭 제후들이 아주 적게 참석하여 공의회가 열릴 때까지 종교 문제는 영주에게 맡긴다고 결정하였다. 세계 공의회든 국가 공의회든 공의회를 열어서 루터 문제를 결정하고자 했던 가톨릭측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때부터 루터측 제후들은 자기 영지에서 가톨릭 교회를 파멸시키고 루터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영지 내의 수도원과 소속 토지들이 몰수되었고 가톨릭 신자로 남으려는 사람들은 추방당하였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영주의 힘으로 루터가 시작한 개혁이 강행되자, 1529년 슈파이어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는 1526년의 결정을 무효로 하고 다음 공의회가 열릴 때까지는 각 영지의 종교 문제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때 6명의 제후들과 14개의 남부 독일 도시의 대표들은 이 결정에 항의하고 거부하였다. 이 항의에 뜻을 같이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믿음의 사람들' 이라고 했지만 가톨릭에 반대하는 다른 집단이라는 뜻으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이들이 제국 의회와 황제의 반대 편에 서면서부터 이미 자신들의 결속을 다져야 하는 배경이 자연스럽게 마련되었다. 한편 1529년 4월 22일에 슈파이어에서는 비밀리에 보호 조약이 체결되었고, 나아가 헤센의 방백(方伯)인 필리프(Philipp, 1509~1567)는 황제를 거스르는 정치적 대연합을 스위스까지 확대하려고 했다. 그래서 같은 해 마르부르크(Marburg)에서 종교 토론회를 개최하여 루터와 츠빙글리(U. Zwingli, 1484~1531)의 신학적 견해 차이를 좁히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 두 종교 개혁가 간에 성체 문제에 대한 합의가 되지 않아 스위스 지역까지 포함한 대연합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동맹 결성의 또 다른 배경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황제의 가문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에서 가장 큰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카알 5세는 독일의 황제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스페인의 왕으로서 많은 적들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항하고자 한 슈말칼덴 동맹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동맹이었고, 군주들은 종교적인 이유 이외에 정치적인 이유로 동맹에 참여하였다. 당시 가톨릭 국가이며 가톨릭 왕이 집권하였던 프랑스도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적극적으로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
〔결 성〕 당시 카알 5세가 처한 상황은 매우 복잡하였다. 19세의 어린 나이인 1519년에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Ⅰ, 1493~1519)의 후임으로 황제에 선출되었을 무렵, 스페인과 그 식민지, 나폴리, 시칠리아 왕국과 저지대 지방이 그의 영토였다. 그는 종교 개혁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지만 정치적인 정적들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해결해야 될 다른 문제도 산적해 있었고, 따라서 늘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유럽으로 진격해 헝가리를 지나 빈까지 위협해 오는 터키 제국은 황제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고, 제국과 왕가의 반대편에 항상 서 있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1494~1547)와 도 전쟁을 해야 했다. 또 스페인과 광대한 남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를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독일 밖의 지역에서 지내야 했다. 따라서 그의 역할을 제국내에서 대신해 줄 사람을 두었는데, 그가 곧 그의 형제인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Ⅰ , 1503~1564)였다.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의 대공작이면서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을 겸하고 있었다.
카알 5세는 페르디난트를 로마인들의 왕으로 선출하기 위해 1530년에 제후들을 모집하였는데, 이때 작센의 군주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1503~1554)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반대하는 가톨릭 군주들과도 합세하여 반대의 입장에 섰다. 황제가 로마인들의 왕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단 군주 회의를 그 해 12월 29일 쾰른에서 개최하기로하자, 작센의 군주는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을 12월 22일 슈말칼덴으로 불러모았다. 루터의 개혁 운동을 위해서, 그리고 로마인들의 왕 선출 문제로 위협받고 있는 자신들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2월 이곳에 참가한 독일 중북부의 7명의 제후들과 11개 도시의 대표들은 6년 기한의 동맹을 맺었고, 스위스와 남부 독일 지방들은 츠빙글리가 전사한 1531년 10월 11일 이후이 동맹에 참여하였다. 동맹에는 신앙에 관한 조건은 없고, 단지 제국의 법정이 그들 중 누구라도 공격하면 공동으로 대처하겠다는 것이었다. 슈말칼덴 동맹은 동시에 프랑스와 영국, 덴마크 등 합스부르크 왕가를 반대하는 국가의 지원을 받았으며,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도 행동 통일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동맹의 주도자인 작센의 군주와 헤센 지방의 방백 필리프는 매주 서로 정보를 교환하였다. 동맹의 회의체는 9명의 대표자, 즉 작센의 대표 2명, 헤센의 대표 2명 그리고 4명의 남쪽 도시 대표와 다른 제후들의 대표 1명으로 구성되었다. 군사적 동맹이기 때문에 군대 동원은 필요한 때에 즉각 소집하기로 하였고, 전쟁 비용은 미리 마련해 두었다. 또 북부 독일의 군대 사령관은 작센의 군주가 맡고, 남부 독일의 군대는 헤센의 방백이 사령관을 맡도록 결정하였다. 이 동맹은 1537년에 다시 그 기간을 10년 연장시키면서 반(反)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활동과 결과〕 군사적인 성격을 지닌 슈말칼덴 동맹은 항상 황제의 반대 편에서 군사를 동원시켰다. 하지만 황제는 헝가리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빈까지 위협하는 터키 제국 때문에 동맹측과 싸울 수 없었다. 더욱이 1532년 제국이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 때 군사적인 협조를 요청하였지만, 프로테스탄트측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에 황제는 그들이 몰수한 교회 재산 문제에 대한 소송을 각하하고, 다음 공의회가 열릴 때까지 종교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뉘른베르크(Nürnberg) 조약을 맺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로써 황제는 이후 터키 제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 치르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측은 슈말칼덴 동맹과 뉘른베르크 조약에 힘입어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들의 영지에서 새로운 교회를 창설하였다. 이후 이 동맹은 약 8년 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동맹의 후원으로 루터파는 더욱 확산될 수 있었다.
이후 황제는 동맹과 조약과 종교 회의를 통해 프로테스탄트측과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프랑스와 터키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적 원조를 위해서 프로테스탄트측에 많은 것을 양보하였다. 하지만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황제는 최후의 수단인 전쟁을 결심하게 되었다. 1544년 9월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이듬해 11월 터키와 휴전한 황제는 이제까지 슈말칼덴 동맹에 가담했던 가톨릭 국가인 바이에른의 협조를 약속받은 뒤 1546년 6월 16일 독일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동맹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동맹측은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패배를 맛보았다. 남부 독일의 도시들이 1546년에 항복한 데 이어 헤센의 방백도 무조건 항복하였다. 1547년에 뮐베르크(Mühlberg)의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는 동맹
을 완전히 와해시키기보다는 화합을 원하였기 때문에 양쪽이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은 어느 쪽에서도 수용되지 못하였지만, 동맹은 결국 해체되었고 추방된 주교들은 자신의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1551년까지 감금되어 있던 작센의 선제후 모리츠(Mourice)는 프랑스 왕과 비밀리에 반 합스부르크 왕가 동맹을 다시 결성하고, 프랑스 왕에게 메츠와 투르 지방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군사적인 원조를 약속받았다. 이후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는 전황이 달라졌다. 동맹측은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남부 독일 지방을 공격하였고, 그 결과 프랑스는 약속받은 땅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러한 때에 터키가 헝가리를 공격하자 황제는 인스브루크로 급히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551년 트리엔트에서 소집된 공의회도 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8월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측이 파사우(Passau)에서 맺은 조약을 통해 동맹 제후들은 자신들의 영지에서 완전한 자유를 인정받았다. 또 프로테스탄트가 점유하고 있던 부동산, 수도원 및 교회 건물 등도 계속 그들이 소유할 수 있었다.
1555년 9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황제와 동맹의 제후들 간에 '아우크부르크부크 강화 조약'(pax Augustana)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서 종교의 선택을 영주들과 도시의 선택에 맡기기로 결정함으로써 '영지의 종교는 영주의 종교 (cujus regio, eius religio)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동맹의 제후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바를 성취하였으나, 이 조약으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이후 30년 전쟁이라고 하는 1618년의 전쟁에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 루터, 마르틴 ;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 ; 종교 개혁 ; 트리엔트 공의회)
※ 참고문헌 E. Iserloh · H. Jedin, Riforma e Controrifoma, Storiadella Chiesa, vol. 6, Jaca Book ed., Milano, 1975/ H. Tüchle · C. Bouman, La Riforma, e la Controrifoma, Nuova Storia della Chiesa, vol. 3, Marietti, Torino, 1973/ K. Bihlmeyer · H. Tiichle, Storia della Chiesa(l'epoca dellerifome), vol. 3, Brescia, 1979/ J. Lortz, La Rifoma in Germania, Milano, 1981/ L. Cristiani, La Chiesa all' epoca del concilio di Trento, Storia della Chiesa, vol. 17, S.A.I.E. ed., Torino, 19771 H. Jedin, Chiesa della Fede, Chiesa della Storia, Brescia, 1972. 〔具本植〕
슈말칼덴 동맹
一同盟
〔독〕Schmalkaldischer Bund · 〔영〕Schmalkaldic lea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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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