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회(Societas Ver-bi Divini) 소속 신부. 종교 인류학자. 언어학자.
1868년 2월 16일 독일 베스트팔렌 주의 회르데(Hörde, 현재의 Dortmund-Hörde)에서 자물쇠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부터 선교사로서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15세 때 신언회 부속 선교학교인 네덜란드의 '슈타일(Steyl) 김나지움'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 근처의 뫼들링(Mödling)에 있는 신언회 성 가브리엘 수도원의 선교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음악 방면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그가 작곡한 곡 중 몇 곡은 오늘날까지도 교회에서 널리 불려지고 있다.
1892년에 신언회의 사제로 서품을 받은 뒤 '슐레지엔(Schlesien) 선교 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라틴어 · 프랑스어 · 지리 · 세계사 · 성서 · 미술 · 음악 등을 가르쳤다. 1893~1895년에는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동양학을 공부하면서 셈족어를 연구하였다.
그 후 슈미트는 뫼들링 성 가브리엘 수도원의 선교 신학교에서 선교사 양성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유일한 선교사 교육 기관이었던 이 신학교에서 그는 주로 언어학과 인류학을 가르치며 약 43년 간 활동하였다. 그가 이때 강의한 '세계의 기수법(記數法)'은 그가 언어학과 인류학 연구를 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슈미트는 또한 비교 언어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남태평양과 동남 아시아의 원시 종족의 언어를 비교 연구하면서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관계를 발견하였다. 또 빈의 인류학자 사쿨과 친분 관계를 가지면서, 문화의 총체적 체계 · 문화 요소의 역사적 이동 경로 · 종교적 기원 문제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1902년 빈에서 인류학회가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슈뢰더가 발표한 논문 <원시 민족의 고신(高神, Hochgott)>에 상당한 자극을 받은 슈미트는, 이를 계기로 남은 여생 동안 이 분야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슈미트는 1920년부터 빈 대학의 강사를 역임하였으며, 1927년에는 교황 비오 11(1922~1939)가 라테란 궁전 안에 설립한 '교황청 민족 · 선교 박물관'(Pontificio Museo Missionario-Ethnologico)의 초대 관장으로 임명되어 1939년까지 활동하였다. 또 1932년에는 성 가브리엘 수도원의 신학교에 '안트로포스(Anthropos) 연구소'를 창설하여 초대 소장을 겸임하면서 인류학 연구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고, 인류학 전문 학술지 《안트로포스》를 창간하였다. 이로써 빈은 인류학과 문화사학파의 요람지로 부각되었고, 인류학을 공부하려는 외국의 유학생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1938년 3월 나치에 의한 오스트리아의 합병으로 '안트로포스 연구소'와 함께 추방당한 슈미트는 스위스의 프리부르(Fribourg) 대학으로 이주하여 1939년부터 1951년까지 이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저서 《인종과 민족》(Rasse und Volk, 1927)에서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나치 인종론을 전적으로 부정하였기 때문이었다. 슈미트는 스위스 이주 이후부터 1954년 2월 10일 사망하기 직전까지 왕성한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고, 1952년에는 빈에서 개최된 국제 인류학회 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사상 및 저서〕 슈미트는 1908년에 그래프너(Fitz Graebner, 1877~1934)와 안커만(Bernhard Ankermann, 1859~1943)에 의해 확립된 인류학의 문화사적 방법론을 접한 뒤, 영미권 인류학계에서 발전된 이 문화사적 방법론을 아프리카 · 남아메리카· 동남 아시아 · 오세아니아 · 오스트레일리아의 사회학 · 종교사 연구에 원용하였다. 슈미트는 '원민족'(原民族, Urvölker) 즉 인류학적으로 보아 인류의 기원 상태를 가장 오랫동안 보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민족의 종교 연구를 자신의 종교 인류학 연구의 최대 과제로 삼았다. 이 연구 성과는 《신 관념의 기원》(Der Ursprung der Gottesidee, 총 12권, 1912~1955)에 집약되어 있는데, 각 권이 1,000여 쪽에 이르는, 기존의 인류학 · 종교사 연구를 총망라한 대작(大作)이다. 여기에서 슈미트는 인류학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종교 형태와 그 역사적 전개를 고찰하였다. 종래의 종교사적 연구가 주관적인 접근 방식으로 종교 현상을 논리적 · 심리학적으로 비교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둔 반면, 슈미트는 문화사적인 방식으로 각 민족들의 문화를 '문화권'(Kulturkreis)으로 정리하고, 각 문화권을 특징짓는 종교 형태를 분석하여 종교 형태의 발전 과정을 문화권의 발전에 따라 구성하였다. 또 애니미즘(amis-mus) · 토테미즘(totemismus) · 다신교(polytheismus) 등 원시적 종교 형태에서 유일신 사상(monotheismus)으로 나아가는 종교의 기원과 전개를 설명한 당대의 진화주의적인 입장과는 달리, 종교 형태가 고신(高神)이라는 유일신 사상에서 거꾸로 저급한 단계의 형태로 '퇴화'(degeneration)되어 간다는 '종교 퇴행론'을 주장하였다. 이 이론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종교 퇴행론 : 원문화권에서 원민족은 모두 고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고신 신앙에 따르면, 고신은 인간의모습을 하고 인격을 가졌지만, 인간의 지각에는 미치지 못하는 존재이다. 고신은 예전에 지상에서 인간과 함께 생활하고, 인간에게 선한 삶의 방식과 윤리적 규범을 주었지만, 인간이 범한 죄 때문에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원민족에게 있어 하늘은 고신이 거처하는 곳이며, 번개는 고신의 무기, 천둥 소리는 그의 분노로 표현된다. 고신의 이름은 외경(畏敬)하는 마음을 가지고 불러야 하며, 불필요하게 입에 올려서는 안된다. 그의 이름은 아버지 · 창조자 · 하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고신은 영원한 존재로서 죽지 않으며, 전지전능한 존재로서 항상 최고의 윤리 법칙을 체현한다.
이러한 고신 신앙은 원문화권에서 보여지는 일반적인 종교 형태인데, 제1차 문화권 이후에 이러한 신 관념은 변모 혹은 퇴화하였다. 모권 농경 문화권에서는 여성이 사회 · 경제상의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고신은 여성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모(地母) 신 관념 · 달을 여자와 동일시하는 달 신화 · 애니미즘이 발달하면서 원래의 고신 신앙은 퇴색하였다. 부권 토테미즘 문화권에서는 남성을 태양으로 간주하는 태양 신화가 생겨났고, 고신의 아들은 아침 해로, 노쇠한 고신은 저녁 해로 등장한다. 부권 목축 문화권에서는 원민족의 고신 관념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여기서 고신은 실제의 하늘과 동일시 될 정도로 천신(天神)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사회 질서의 계층화와 함께 고신 밑에 하위 개념의 신들이 나타났다. 제2차 · 제3차 문화권에 이르러서 고신 종교는 천체 신화 · 애니미즘 · 주술 등과 뒤섞여 더욱 쇠퇴하였고, 고대 고문화(高文化) 단계에 이르러 종교는 외면적으로 현란한 것이 되었지만, 종교 본래의 내면적인 힘은 고갈되었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퇴화' 되어 가는 것이다.
슈미트는 《신 관념의 기원》 외에 많은 학문적인 업적을 남겼는데, 논문이 710편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그 밖에 대표적인 저서로는 《제민족과 제문화》(Völker und Kulturen, 1924) · 《비교 종교사 입문》(Handbuch der vergleichenden Religionsgeschichte, 1930) · 《인류학의 문화사학적 방법론 입문》(Handbuch der kulturhistorischen Ethnologie, 1937) 등이 있다.
※ 참고문헌 Josef Franz Thiel, Religionsethnololgie, Grundbegriffe der Religionen schriftloser Völker, Berlin, Dietrich Reimer Verlag, 1984/ Walter Hirschberg ed., Neues Wörterbuch der Völkekunde, Berlin, Dietrich Reimer Verlag, 1988. 〔成始政〕
슈미트, 빌헬름 (1868~1954)
Schmidt, Wilhe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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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빌헬름 슈미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