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도회 소속 한국 선교사. 교회 건축가. 한국 성(姓)은 안(安) .
1904년 5월 29일 독일 남부 슈바벤(Sch-waben) 지방의 슈파이킹겐(Spaichingen)에서 태어 나 라벤 부 르 크(Ravenburg)와 밖르츠부르크(Würzburg)의 김나지움을 졸업했으며, 1927년 문헨(Mün-chen)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뒤 베를린의 빌헬름 대학과 빈(Wien) 대학에서 조형 미술을 공부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931년 5월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호(Münsterschwarzach) 수도원에 입회하여 이듬해 첫 서원을 하였고,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밖 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936년 3월 1일 사제 서품을 받은 슈미트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듬해 5월 6일 연길(延吉)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해 4월 13일 연길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고, 9월 5일에 는 초대 대목구장인 브레허(T. Breher, 白化東, 1889~1950) 아빠스의 주교 성성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주교좌 성당이 될 연길 성당은 비좁고 초라하여 주교 성성식을 위해 크고 넓은 단층의 임시 성당이 신축되었는데, 슈미트 신부는 연길 도착 직후 이 성당의 내부 장식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 9월부터는 슈레플(C. Schräfl, 周聖道, 1901~1990) 신부가 주임으로 있던 용정 하시 성당의 내부 수리를 맡아 제대 주변에 그가 직접 그린 그림들로 장식하였다. 중앙 제대 왼쪽 소제대에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과 마리아의 생애 가운데 중요한 4개의 사건을 그렸고 오른쪽 소제대에는 성 요셉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들은 조선식으로 그려져 신자들에게 많은 감명과 친밀감을 주었다고 한다.
슈미트 신부는 1년 동안(1938~1939) 용정 상시 본당의 주임으로 있다가 1939년에 용정 하시 본당 보좌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한국어에 능숙하지 못하여 주일에 자전거로 대교동 공소와 하교동 공소에 가서 미사를 봉헌하고 짤막한 강론을 더듬거리며 할 정도였다. 하지만 부드럽고 사랑이 깊은 성격으로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과 쉽게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1940년에는 용정 하시 본당의 신자들을 위해 상여 마차를 고안하였는데, 연길 수도원 목공소에 부탁하여 마차의 상부구조는 조선 기와집 모양으로 꾸미고, 색칠은 직접 부잣집 모양으로 칠했다고 한다. 이 상여 마차는 멀리 떨어진 성당의 공동 묘지까지 유해를 쉽게 운구할 수 있게 함으로써 신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1943년 9월 용정 상시 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다가 광복 이듬해인 5월 20일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공산군에 체포되어 남평(南平)과 하얼빈(哈爾賓) 감옥에 투옥되었고, 1949년에 독일로 추방되었다.
이후 뮌스터슈바르차흐 수도원에 있는 중학교 미술 교사로 미술과 제도 등을 강의하면서 벽화 제작 등에 참여하였지만, 교회 건축 설계는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건축 개념은 너무 혁신적이어서 바로크 양식을 옹호하던 당시 독일 수도원의 책임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담(F. Damm, 卓世榮, 1900~1964) 신부의 요청으로 1958년에 김천 평화동(平和洞)성당의 설계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렌하르트(A. Lenhard, 盧) 신부의 의뢰로 문경 점촌동(占村洞) 성당을 설계하였는데, 이때 그는 한국적 상황에 맞춘 실용적 설계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슈미트 신부는 1961년 12월 15일 한국에 재입국하여 수도 신부로서 건축 설계와 미술 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 17년 동안 전국에 걸쳐 성당 79개 · 공소 30개 · 부속 성당 14개 · 학교 · 병원 등 총 184개의 신축 설계와 9개의 증축 설계를 담당하였으며, 성당 내부 벽화를 비롯하여 제대 · 감실 · 고해실 · 의자 등 가구 및 공예품 등도 설계하였다. 특히 그는 서양 석조 건물의 장점과 한옥의 지붕 형태와 처마 곡선을 접목시킴으로써 교회 건축 설계에 있어서 토착화를 이루었다.
슈미트 신부의 성당 건축에 관한 신학적 원칙은 <가톨릭 성당 건축에 대한 신학적 원칙>(Theologische Grundlagen des Katholischen Kirchenbaues)에, 사회학적 원칙은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에 있어서 하나의 신기원>(Eine neue Epoche des Katholischen Kirchenbaus in Korea)이란 그의 글에 잘 언급되어 있다. 그는 성당을 하느님의 집이 아닌 인간적인 모든 관심사를 위한 고향으로 생각하여 신자들의 공간을 제대 부근으로 넓게 둘러 배치하였으며,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공개된 "신자들의 공동체 중심"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가 설계한건물은 일체의 장식을 배제하고 구조와 재료를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성당 내부의 벽화도 장식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더욱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한국 성당 건축의 근대화와 토착화에 기여한 슈미트 신부는 75세 때인 1978년 11월 17일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하여 수도원 묘지에 묻혔다. 그는 세상을 떠난 그 한 해 동안에도 8개의 성당 설계를 담당하였을 정도로 이 땅에 "하느님의 집"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연길교구)
※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201 · 202 합병호(1992. 2~3), 한국교회사연구소, pp. 24~25/ 성 베네딕도회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死亡者 名簿》 1990/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은혜의 60년 (1931~1991)》,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95/ 《교회와 역사》 273호(1998. 2), pp. 8~12/ 김정신,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사》, 한국 가톨릭문화사 대계 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편찬실〕
슈미트, 알빈 (1904 ~ 1978)
Schmid, Al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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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알빈 슈미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