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트, 크리소스토모(1883~1962)

Schmid, Chrysost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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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소스토모 슈미트 총아빠스.

크리소스토모 슈미트 총아빠스.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의 총아빠스. 베네딕도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서울 및 덕원(德源) 수도원 초대 원장. 세례명은 블라시오. 한국 이름은 김시련(金時練). 1883년 2월 3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교구의 베스텐도르프(Westendorf)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13세 때 베네딕도회 스테펜(Stephen)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1년 7월 성 오틸리엔 선교 신학교에 들어가 2년 간 선교사로서의 기초 자질을 배운 뒤 1903년 6월에 딜링겐(Dillingen)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베버(N. Weber, 1895~1956) 총아빠스로부터 '요한 그리소스토모'라는 수도명을 받았고, 1904년 10월 2일 첫 서원을 하였다. 이때부터 철학 공부를 시작하여 로마의 성 안셀모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어 신학 과정도 수료하였다. 1908년 7월 26일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선교 신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고, 수도원 내의 철학 과정 강의를 하면서 수련장과 부수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2월 한국 선교사로 파견되어 서울 백동(柏洞,현 혜화동) 수도원에 머무르면서 한국어와 풍습을 배우던 중,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로부터 신학교 교수 겸 수도원 초대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1월 중순경 경기도 안성 본당에서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한국어 공부를 한 후, 그 해 4월 팔도구(八道溝) 본당 4대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같은 해 11월 원산 (元山) 본당 1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25년 5월 한국인 수사들에게 피정을 지도한 뒤 약 한 달 동안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체류하였으며, 1927년까지 전교활동과 함께 덕원 수도원의 부지 매입에 힘썼다. 그 결과 원산 북쪽 1시간여 거리에 위치한 농업 지대인 덕원(德源)의 임야 약 100헥타르와 밭 15헥타르, 그리고 논 7헥타르 등을 매입했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를 수도원에서 약 200m쯤 떨어진 곳에 건립할 수 있도록 계획했고, 이에 필요한 부지로 4헥타르의 논과 3헥타르의 밭을 추가로 매입함으로써 수도원 자립을 위한 물질적 토대를 확보하였다. 그런 반면에도 그는 수도원 대지 내 각처에 산재해 있는 외교인들의 묘지를 철거하기 위해 흥정과 협상을 여러 차례 해야만 하였다. 이 시기에 슈미트 신부는 1921년에 설립된 해성학교(海星學校)의 운영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1925년 11월 21일 원산에 도착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소속 4명의 수녀들에게 한국어를 지도해 주었다. 1927년 11월 20일에는 덕원 수도원장 겸 부감목으로 임명되어 수도회 운영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신학교에서 물리학 · 철학 · 교리 등을 강의하여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기여하였다. 그 밖에 덕원 본당의 미사를 담당하였고, 1928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원산대목구의 부감목으로서 대목구장 사우어 아빠스를 대리하여 교구 행정을 이끌어 나갔다. 1929년 9월 11일부터 슈미트 신부는 중국 북부 지역의 선교 활동을 시찰하기 위해 몇몇 중심지를 방문하였는데, 약 한 달의 여행 기간 동안 그는 값진 체험을 하였다고 한다. 즉 선교의 성공과 방해되는 요소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6월 17일 독일 모원의 보좌 대수도원장 로 임명되어 7월 11일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1931년 4월 초 베버 총아빠스가 수도원 재정상의 실수로 사임함에 따라 4월 14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의 총아빠스로 선출되어, 이후 수도회의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반면에 그는 덕원과 연길 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회원들 때문에 정신적 · 물질적인 고통도 많이 받았다. 우선 브레허(T. Breher, 1889~1950) 아빠스가 연길교구 신부 · 수사 수녀들의 3년 동안의 양식과 귀국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 상인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것이 슈미트 총아빠스에게는 큰 어려움이 되었다. 하지만 후에 교황청에서 이 빚을 갚아 주어 수도원은 피해를 모면할 수 있었다. 또한 1946년 이후 만주 지역과 북한에 공산 정권이 수립됨으로써 수도원 장상들과 신부 · 수사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큰 정신적 고통이 되었다. 특히 독일인 신부 6명과 한국인 신부 5명이 처형되었고, 사우어 아빠스를 비롯한 신부 · 수사 18명이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또 42명의 독일인 신부 · 수사들은 1954년 1월 22일에나 본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이들이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동안 슈미트 총아빠스는 독일 정부와 교황청의 도움을 받아 구명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그 기간 동안 많은 수사와 신부들이 사살 또는 옥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환한 선교사들이 프리들란트(Friedland) 피난민 수용소에 수감되자 그는 직접 방문하여 1954년 1월 23일 그곳 성당에서 감사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때 총아빠스는 귀환을 매우 기뻐하면서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지만, 많은 회원들이 사망한 사실에 대하여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74세 때인 1957년 5월 15일 고령으로 총 아빠스직을 사임한 뒤 디센(Diessen) 수도원에서 휴양하다가, 1962년 초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끝에 9월 28일 사망하여 모원 내 성당에 묻혔다. (→ 덕원 면속구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一,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1/ 성 베네딕도회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死亡者 名簿》, 1990/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88/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은혜의 60년(1931~1991)》,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95/ A. Kaspar · P. Berger, HWAN GAB(還甲), Münsterschwarzach, 1973/ Godfrey Sieber, The Benedictine Congregation of St. Ortilien, Eos Verlag Erzabtei St. Ottilien, 1992.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