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인, 에디트 (1891~1942)

Stein, Ed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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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에디트 슈타인.

성녀 에디트 슈타인.

성녀. 순교자.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한 가르멜회 소속의 유대인 수녀. 독일 현대 철학과 여성론(feminismus) 그리고 그리스도교 사상을 연구한 철학자. 수도명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다(Teresia Benedicta a Cruce). 축일은 8월 9일.
1891년 10월 12일 독일 동북부 지역의 브레슬라우(Breslau)의 전통 유대인 가정에서 11번째 아이로 태어난 그녀는 두 살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 지그프리트(Sieg-fried Stein, 1843~1893)를 일사병으로 여의고, 열심한 유대인이었던 어머니 아우구스트(Auguste Stein Courant, 1849~1936)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거행되는 유대교 전통 예식을 보며 자랐고, 유달리 고집스럽고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는 학구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11세 때 숙부의 갑작스런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그리고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 정말 존재하는지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또 가족과 친지들의 형식적인 유대교 의식과 기도에 실망하여 더 이상 참석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14세 때에는 갑자기 학업을 중단하고 약 1년 동안 함부르크의 큰언니 집에서 지냈는데, 학교 교육만으로는 삶의 의미와 가치관, 세계관에 대해 탐구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그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녀는 1911년까지는 브레슬라우에서, 그리고 1913년부터는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 심리학 · 철학 · 역사학 · 독일어학 등을 공부하였다. 브레슬라우에서 심리학을 연구하던 슈타인은 19세기 심리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당시의 심리학이 '영혼이 없는' 학문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환멸을 느껴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학문을 탐구하고자 괴팅겐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그리고 학기가 시작된 후 '괴팅겐 학파' 에 가입하기 위하여 당시 후설(E. Husserl, 1859~1938)의 조교였던 라이나흐(A.Reinach, 1883~1917)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는데,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라이나흐는 그녀에게 현상학(現象學, Phianomenologie)에 관심을 갖도록 도와 주었다.
라이나흐는 비록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주제에 대하여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종교적인 영역의 탐구 즉 신(神)과 초월의 문제에 접하는 학문적인 전향을 이루도록 영향을 미친 최초의 사람이었다.
또 슈타인은 괴팅겐 철학회에서 1910년부터 1911년까지 강의를 맡았던 셀러(M. Scheler, 1874~1928)를 알게되었다. 이때 그녀는 그의 강의를 관심 있게 경청하였는데, 온통 가톨릭적인 이념으로 채워져 있는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의 정신 세계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곧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많은 학우들이 징집되자, 슈타인도 1915년 4월부터 약 6개월 동안 모라비아에 있는 백색 교회 병원'에서 적십자사 소속 간호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고그의 개인 조교가 되었다. 1917년에는 라이나흐가 플랑드르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가 그의 부인이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1918년 가을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위해 슈타인은 후설의 개인 조교직을 그만두고, 이듬해 <심리학과 정신과학의 철학적인 기초를 위한 기고>(Beiträge zur philoso-phischen Begründung der Psychologie und der Geisteswissenscha-ften)를 교수 취임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그녀는 교수로 취임하기를 진실로 바랐고 후설이 직접 추천서까지 작성해 주었으나,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기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실패는 그녀에게 커다란 상처가 되었고, 그 후 브레슬라우로 돌아와 계속 철학 연구 논문들을 집필하였다. 1921년 여름 같은 괴팅겐 학파 친구인 콘라트 마르티우스(H. Conrad-Martius, 1888~1966)와 그녀의 남편이 경영하던 농장에 머무르던 슈타인은, 친구 부부가 외출한 어느 날 서재에서 우연히 손에 잡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를 빼내 읽기 시작하였다. 슈타인은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이 오랫동안 실존적으로 회의하고 있었던 신(神)이 그녀를 사랑해 왔으며, 그녀가 전 인격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다려 왔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 후에 그녀는 평화를 얻었고, 이듬해 1월 1일 데레사 베네딕다(Teresa Benedicta)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그녀는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할 의지를 확고히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와 지도 신부의 만류로 이를 연기하였다. 그 대신 지도 신부의 제안으로 1931년까지 슈파이어(Speyer)에 있는 성 막달레나 수도원 교사 양성 학교와 도미니코 수녀회의 여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또 베네딕도회 보이론 연합회의 발처(R. Walzer) 아빠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성의 존엄과 활동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한 여성학 학술 강연으로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 당시 그녀는 뉴먼(J.H. Newman, 1801~1890) 추기경의 서한과 일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의 《진리론》(Quaestiones Disputatae de Veritate)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점차 후설의 관념론적인 철학 노선을 떠나 그리스도교 철학의 실재론적인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브레슬라우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를 원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간 뒤부터 슈타인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발전된 가능태와 현실태 등의 철학 개념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뮌스터 대학 부설 교육 연구소 강사로 재직하면서 왕성한 교육 및 학문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년 뒤 반 유대주의 정책으로 인해 그녀 역시 강의 금지를 당하고 말았다. 그 후 발처 아빠스로부터 가르멜 수도원 입회를 허락받고 어머니와 힘겨운 이별을 나눈 뒤 1933년 10월 14일 쾰른의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입회 후에도 그녀는 가르멜 수도원 원장의 적극적인 학문 지원에 힘입어 《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Endlichess und EwigesSein)를 저술했다. '존재의 의미로의 상승'(Versuch eines Aufstiegs zum Sinn des Seins)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후설의 현상학적인 철학 방법과 그녀가 그 동안 연구하였던 그리스도교 철학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존재론에 관한 방대한 철학서이자 신학서이다.
1936년 9월 14일 슈타인은 첫 서원을 하였다. 그렇지만 바로 그 해에 그녀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그녀는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지녀 왔던 유대교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1938년 4월 21일에는 종신 서원을 하였다.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위협은 날로 심해져 갔고, 슈타인은 이를 피하기 위해 수도원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그녀의 언니 로사(Rosa)와 함께 네덜란드의 에히트(Echt) 가르멜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저서 《십자가의 학문》(Kreuzeswissenschaft)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때 네덜란드의 주교들이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비난하였고, 이에 화가 난 히틀러는 모든 비(非)아리안계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1942년 8월 2일 언니 로사와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슈타인은,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 수용소를 거쳐 베스터보르크(Westerbork)로 끌려갔다. 그 해 8월 7일 이들 중 987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두 자매는 이틀 후인 8월 9일에 가스실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상과 신앙〕 슈타인 철학의 첫 출발점은 현상학이었다. 그녀의 현상학은 처음부터 후설의 현상학처럼 단순히 '의식'(意識, Bewußtsien)의 현상학적인 분석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격'(人格, Person)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으며, 후설뿐만 아니라 셀러와 하이데거(M. Heideggar, 1889~1976)와 펜더(A. Pfaender, 1870~1941), 그리고 콘라트 마르티우스의 현상학을 대폭 수용한 것이었다. 후설의 현상학이 '초월적 현상학' 이라면, 그녀의 현상학은'세계와 인간의 현상학' 즉 인격 주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전제로 한 '관계의 현상학' 이었다. 더 나아가 슈타인의 인격 분석은 정신을 넘어서 영혼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인격을 분석하면서 보다 내밀한 자아의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였고, 이를 위해 아빌라의 데레사(1515~1582)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사상을 세밀히 분석하였다. 그녀는 현상학적으로 자아를 기술하고 경험론적인 심리학과 펜더의 인격의 심리학을 기술하면서 동시에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 사상을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그녀는 초월론적으로 순화된 의식의 영역만을 철학 탐구의 영역으로 삼는 후설의 철학에서는 추구되지 못했던 존재론을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찾았다. 그녀는 1929년에 발표한 논문 <후설의 현상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Husserls Phänomenologie und Philosophie des hl. Thomas v. Aquin)에서 '영구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의 주제인 진리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그녀의 사유는 점차 현상학뿐만 아니라 스콜라학을 토대로 하였는데, 이러한 사유는 계시로써 이성을 보충하려 한 연구였고 연구 목적은 존재의 의미를 지향하기 위해 '진실한 존재' 쪽으로 방향을 짓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슈타인은 마침내 일반적인 종교적 세계관, 특히 그리스도교적인 가톨릭 세계관의 기초를 쌓았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토마스 아퀴나스나 토미즘(Thomismus)만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노(354~430)와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1265~1308)와 수아레스(Francisco Suárez, 1548~1617)의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녀는 그리스도교 철학의 과제가 인간이 경험하고 믿고 사랑하고 있는 것을 반성하고 해명하는 데에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현대 철학이 회피하고 있는 참된 철학적인 자세란, 단지 관념적인 사유가 아니라 실존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색은 사랑과 신앙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는 굳건한 신념을 지녔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인 세계관이 결정적으로 반영된 저서가 《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인데, 그녀는 이 책을 통하여 근대와 현대의 철학이 회피하고 있던 근원적인 존재론을 탐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존재로 오르는 상승의 길로 인도하려고 하였다.
슈타인은 단순히 학문적이고 순수 사변적이며 관상적인 추구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으로써 이러한 신념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고자 하였고, 그래서 가르멜 수도원을 택하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르멜의 삶이란 '세상 밑으로'(weltabwärts)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들 같은 동족과 하느님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느님 앞에 서기 위해 백성으로부터 분리되고 박해받는 고독을 선택하는 것, 곧 백성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이 고독을 선택하는 삶이었다. 십자가를 자신의 동족과 하느님의 백성이 처한 운명으로 이해하였던 그녀는, 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는 소명을 실천하고자 자신의 수도명을 '십자의 데레사 베네딕다'로 하였다. 그녀의 삶은 유대인으로서 또 독일의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학살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과 함께 살해된 하느님의 딸로서 백성들과 함께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진 그녀의 죽음에서 상징적이고도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공경과 의의〕 그녀가 사망한 지 20년 만인 1962년 1월 4일 쾰른의 대주교 프링스(Josef Frings) 추기경은 슈타인의 시복을 위한 소송을 제기하였고, 1980년에는 독일주교 회의를 거쳐 로마에서 시복 절차를 위한 공식적인 청원이 이루어졌다. 그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독일을 방문하였을 때인 1987년 5월 1일 쾰른에서 순교자로 시복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로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편 그녀가 저술한 여러 철학과 영성 서적들은 1950년부터 브뤼셀에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시성식에서 타인을 "이스라엘의 탁월한 딸이자 전세계를 위한 성인으로서 교회의 충실한 딸"이라고 칭송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듬해 10월 1일자의 교서를 통하여 시에나의 가타리나(Catharina Senensis, 1347?~1380) 성녀와 스웨덴의 비르지타(Birgitta, 1303~1373) 성녀와 함께 유럽 대륙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그녀의 죽음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고 피할 수도 없었던 운명이었다. 그 죽음은 동족의 죽음을 중단시키는 것도 못 되었고, 학살자들에게 종교적 의미를 주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족과 하느님 백성을 위해 그 연대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유대교를 떠났지만 결국 유대인으로서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 죽음으로 동족들과 다시 결합한 그녀를 가톨릭 교회
는 '아우슈비츠의 순교자'로 공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죽음에 대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에서 "새로 탄생한 성인의 증거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 간의 상호 이해를 위한 더욱 굳건한 가교가 될 것임을 기대하며 오늘날 고통으로 가득 찬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녀의 삶은 하나의 모범이 될 것" 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재확인시켜 주었다. (⇦ 에디트 슈타인)
※ 참고문헌  Maria Amata Neyer, Edith Stein Ihr Leben in Dokumen-ten und Bildem, Echter, 1987, pp. 8, 57~581 W. erbstrith, Edith Stein,Hrsg. von Emerich Coreth···, Christlich Philosophie im Katholischen Denken des 19. und 20. Jahrhunderts II, Verlag Styria, 1988, pp. 650~665/一, Edith Stein. Ein neues Lebensbild in Zeugnissen und Selbstzeugnisen, Freiburg im Breisgau, Herder, 1983, pp. 28~291 - Aus der Tiefe Leben, Miinchen, 1988, p. 241 Freda Mary Oben, Edith Stein the Woman, ed. John Sulibvan, O.C.D. Carmelite Studies, ICS Publications, Washington DC.,1987, p. 71 Edith Stein, Welt und Person, Freiburg, Herder, 1962, pp. VIII~IX/一, Endliches und Ewiges Sein. Versuch eines Aufstiegs zum Sinn desSeins, Freiburg im Breisgau, Herder, 1986, pp. 46~54/ 一, La phéno-ménologie de Husserl et la philosophie de Saint Thomas d' Aquin, tarduit par Philibert Secretan, hénomenologie et philosophie chréitienne, Paris, 1987, pp. 31~55/ Richard Jerome, People Magazine, 1997. 5. 19, pp. 161~162/ 수자와 카오리, 최경식 역, 《에디트 슈타인一사랑과 진리의 불길》, 분도출판사, 1996, Pp. 221~230/ 梁蕙貞, ,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1994, pp. 5~26/ F.M.Oben, 유재옥 역,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사상一학자, 여성론자,성녀》, 성바오로출판사, 1991, pp. 21~76/ 장 드 파브레규, 대구 가르멜 수녀원 역, 《실존주의의 선구자 에디트 슈타인의 전향》, 계성출판사, 1987, pp. 75~86/ 최영철, <에디트 슈타인 십자가의 학문과 인격적 증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보》 63호(1990. 1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72~74/ S.M. Batzdorff, 정병조 역, <성녀 에디트 슈타인>, 《사목》 243호(1999. 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 139. 〔梁蕙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