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토스, 파이트 (1447/1448~1533)

Stoss, v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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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토스의 대표적인 작품인 크라쿠프의 성모 마리아 성당 주 제단.

슈토스의 대표적인 작품인 크라쿠프의 성모 마리아 성당 주 제단.

독일의 조각가. 목각이나 동판화를 제작한 판화가. 화가로도 유명하다.
1447~1448년경 네카어(Neckar)의 호르프(Horb)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작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각가로서의 자질은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ów)로 이주하여 목각 전문가로 활동하기 이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1477년부터는 크라쿠프에서 살았는데, 1477~1485년에 그의 대표적 작품인 크라쿠프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위한 <주 제단>과 두 편의 <게쎄마니 동산>, 그리고 1485년에 사암(砂巖) 부조 등을 제작하였다. 슈토스는 1485년에 잠시 독일 브레슬라우(Breslau)에 있다가 1486~1487년에는 뉘른베르크(Nürnberg)에 체류하였으며, 1492년에는 폴란드 황제 카지미르 4세(Casimir IV Jagellon, 1427~1492)를 위한 붉은 대리석 묘비와 올레스니키(Zbigniew Olesnicki) 대주교의 묘비 등을 제작하였다. 독일에서 충분한 재력을 확보하고 존경받는 작가로 인정받은 슈토스는 이렇다 할 이유 없이 1496년에 크라쿠프로 이주했다가 1499년에는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슈토스는 뉘른베르크의 여러 성당들을 위한 장식을 제작하였는데, 즉 1500년에 뉘른베르크의 성라우렌시오 성당을 위해 <십자가 처형>을, 그리고 1500~1503년에는 스위스 티롤 지방에 <요한과 마리아의 목조
상>을 제작하는 등 다수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1503년에 슈토스는 바너와 슈타르체델이라는 두 상인의 꾐에 넘어가 문서를 위조하였다가 구속되었다. 이로 인해 공개적으로 불에 그을린 인장을 몸에 찍히고 자유 시민권마저 상실되자, 이듬해 뮌너슈타트(Münners-tadt)로 도주한 뒤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왔다. 그 후 다시 징계를 받았지만, 1506년에 막시밀리안 1세(1459~1519) 황제로부터 사면을 받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1505년에는 뮌너슈타트에서 리멘슈나이더(Tilman Riemenschneider, 1460~1531)가 제작한 성 막달레나 성당의 제단을 보완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려 넣었고, 1507년에는 인스부르크에 있는 황제 묘를 장식하였다. 그리고 1507~1523년에는 뉘른베르크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상인들, 특히 피렌체 출신의 비단상이었던 토리지아니(R. Torrigiani)를 위하여 성 도미니코 성당의 <라파엘과 토비아상>과 뉘른베르크의 귀족 후원자인 투허(A.Tucher)를 위해 <안드레아상>을 제작하였으며, 그 외에도 일련의 조각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주로 1520~1523년 사이에 제작되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 뉘른베르크 가르멜 수도원 소속의 성 살바토레 성당의 성모 마리아 제단이다. 슈토스는 1526년에 브레슬라우로 가서 자기에게 사기를 친 슈타르체델에게 맞서 반론을 펴는 등 억울한 누명을 벗고자 노력하였다. 1533년 9월 22일 뉘른베르크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네 아들들도 모두 아버지와 같은 일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작품 세계〕 그의 작품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은, 후기 고딕 시대의 바로크적인 형태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즉 깊은 공간으로 구성된 인물들이 풍경을 바탕으로 표현되어 초상화 같은 효과를 내면서도 작품 전반에 고요함과 내적인 빛이 비치고 있다. 슈토스는 일찍이 울름(Ulm) 대성당 건축장 소속의 물처(H. Mul-tscher, 1400~1467)와 쉬를린(J. Syrlin, 1425~1491)으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받았고, 그 후에는 슈바벤(Schwaben) 주(州)과 오버라인(Oberrhein) 지역을 전전하며 미술 공부를 하면서 손가우어 (M. Schongauer, 1425/1430~1491)의 예술 세계와 게르하에르트(N. Gerhaert, 1420/1430~1473)의 조각 작품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따라서 슈토스의 초기 동판 작품들에는 오버라인 지역의 영향이 엿보인다. 빈(Wien)의 노이슈타트(Neustadt) 구역에 있는 황제 프리드리히 3세(1415~1493)의 미완성 묘비는 게르하에르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인데, 이 작품의 형상들은 카지미르 4세 황제의 묘비와 매우 유사하다.슈토스 작품에서는 작가 개인의 내적인 힘으로부터 분출된 대단히 극적인 긴장감이 엿보인다. 이러한 독창성은 특히 크라쿠프의 성모 마리아 성당의 주 제단을 제작할 때 드러났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전통적이며 도상학적인 구상과는 다른 형태를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슈토스의 독창적인 기법이 나타나게 된 것은 당시 주문자들이 슈토스에게 비관례적인 작품을 기대했던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또 그의 대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성 살바토레 성당의 성모 마리아 제단은 당시까지만 해도 최대 규모(16×11m)의 후기 고딕 양식 작품이었으며, 후기 고딕 양식으로는 목각 최대의 솜씨를 보여 주는 걸작으로서 새로운 구도 형식을 보여 주었다. 전반적으로 슈토스 작품의 특징적인 양식은 매우 섬세한 사실주의로서, 굴곡이 깊으면서도 화려한 장식 형태를 드러내고 사물에 대한 작가 내면의 영적인 통찰력을 느끼게 한다.

※ 참고문헌  Lexikon der Kunst, vol. 5, Berlin, 1983, Leipzig, 1978/ J.Jahn, Wörterbuch der Kunst, Stuttgart, 1983/ M. auerlandt, Deutsche Plas-tik des Mittelalters, Miinchen, 1953. 〔洪珍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