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라이어마허,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다니엘 (1768~1834)

Schleiermacher, Friedrich Ernst Dan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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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

슐라이어마허.

19세기 독일에서 가장 저명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철학과 신학에서 계몽주의와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사조 사이에서 독립적이면서도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계몽주의 시대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재정립하였고,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데 기여하였다.
〔생애와 저서〕 1768년 11월 21일 독일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개혁 교회의 군종 목사인 고트리프(GottliebSchleiermacher)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모를 따라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인 모라비아(Moravian) 교회를 다녔다. 1783년 니스키(Niesky)의 모라비아 교파 학교에 입학하였고, 1785년에는 바비(Barby)의 모라비아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과학적인 논증과 비판 정신이 강했던 그에게 개인적인 신심을 강조하는 신학교 교육은 불만족스러웠다. 이에 신학교를 떠나 1787년에 할레(Halle) 대학에 들어간 뒤 에버하르트(J.A. Eberhart, 1739~1809)와 볼프(F.A. Wolf, 1759~1824)의 강의를 통하여 칸트주의 철학과 그리스 철학에 탐닉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로 1789년에 할레를 떠난 그는, 프랑크푸르트 근처 드로센(Drossen)으로 가서 1년 동안 독학하여 이듬해 제1차 신학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부터는 동프러시아 슐로비텐(Schlobitten)의 도나(Dohna) 백작 집에서 가정 교사를 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의 첫 저서인 《최고선에 관하여》와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를 저술하였는데, 후에 출판된 《독백록》(Monologen. Eine Neujahrsabe, Berlin, 1800)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1793년 5월 종교적 · 정치적 견해 차이로 도나 백작 가정과 절교한 뒤, 이듬해 3월 31일 베를린에서 제2차 신학 시험을 통과하고 란츠베르크(Landberg)의 개혁 교회 부목사가 되었다. 1796~1802년에는 베를린의 자선(Charité) 병원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당시 베를린에는 계몽주의가 쇠퇴하고 낭만주의가 서서히 부상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헤르츠(H. Herz)의 소개로 베를린 낭만주의 그룹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797년에는 베를린을 방문한 슐레겔(F. von Schlegel, 1772~1829)과 친분 관계를 맺었는데, 그의 권유로 《종교에 관하여 : 종교를 멸시하는 지성인에게 행한 강론》(Über die Religion :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ten, Berlin,1799)을 익명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 저서에서 그는 종교의 본질을 교리나 도덕적 행위로 간주하는 계몽주의 종교관을 비판하고 감정과 직관으로서의 종교관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1800년에는 슐로비텐에서 10년 전부터 구상해 온 《독백록》과 《슐레겔의 루시에 대한 고백적 서한》(Vertraute Briefe über Schlegels Lucinde, Lübeck, 1800)을 익명으로 출판하였고, 이듬해에는 설교집을 펴냈다. 그렇지만 슐레겔과의 사상적 친분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1802년에 결별하고 말았다. 1802년에 폼메른(Pommern) 지방 슈톨프(Stolp)의 궁정 목회자가 된 슐라이어 마허는 바쁜 목회 활동 가운데서도 1803년에 당대의 윤리 개념들에 대한 비판서 《이전의 윤리론에 대한 비판개요》(Grundlinien einer Kritik der bisherigen Sittenlehre)를 출판하였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저서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의무 · 덕 · 선을 윤리학의 세 가지 이론으로 구분하여 기술했다. 또 1805 1809년에는 플라톤(기원전 427~347)의 작품들을 번역하여 세 권으로 출판하였다. 그는 자신의 목회 활동을 통하여 자각한 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프러시아 국가와의 관계 속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상황에 대한 두 가지 의견》(Zwei unvorgreiflichen Gutachten in Sachen des protestantischen Kirchenwesens in Beziehung auf den Preussischen Staat)을 저술하였으며, 여기에서 그는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의 밀접한 단합과 자유로운 예배 형식, 그리고 성직자가 교육적 차원에서 기여하기 위해서는 성직자의 사회 진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04년에는 할레 대학으로부터 목회자와 부교수로 초빙을 받아 이곳에서 신학 백과 사전 · 기초 교리 · 해석학 · 신약성서 주석학 등을 강의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있어서 그의 주요 관심사는 철학적 윤리학과 그리스도교 윤리학이었다. 이때 그는 《크리스마스 축제》(Die Weihnachtsfeier, 1805)와 《디모테오 전서 주석》(Sendschreiben über den Timotheus-Brief)을 저술하였다.
나폴레옹 1세(1769~1821)에 의해 할레 대학이 폐교되자 슐라이어마허는 1807년에 베를린으로 옮겨 신학과 철학을 자유롭게 연구하였다. 1801년 1월에 설립된 베를린 대학에서 그는 윤리학과 신학 백과 사전을 강의하였으며, 1808/1809년 겨울 학기에는 교의 신학과 정치학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1809년 5월에 친구이자 군종 목사였던 폰 빌리히(E.H. von Willich)가 사망하자, 20세 연하였던 그 친구의 부인 폰 뮐렌펠스(von Mühlenfels)와 결혼하였다. 1808년에 펴낸 《독일의 관점에서 본 대학 상황에 대한 사고》(Gelegentiche Gedanken über Universitäten im deutschen Sinn)에서는 대학의 기능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였고, 이듬해에는 베를린의 삼위 일체 교회 목회자가 되었으며, 1810년에는 베를린 대학 신학부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 또 1810~1814년에는 정부의 교육 분과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811년에 《초보 강의를 위한 신학 연구 개요》(Kurze Darstellung des theologischen Studiums zum Behuf einleitender Vorlesungen)를 출판함으로써 신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고,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의 통합을 위해 《신경의 고유한 가치와 적합한 권위》(Über den eigentlichen Wert und das bindende Ansehen symbolischer Biicher)를 저술하였다. 이 저서에서 그는 신경들의 권위, 특히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의 권위를 종교 개혁 시대의 종교적 경험을 반영하는 다른 프로테스탄트 신경 즉 하이델베르크 신앙 고백과 분리시키는 것은 종교 개혁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하였다. 1814년에는 세 번째 설교집을 내었고, 1817년에는 《루가 복음서에 대한 비판적 시도》(Kitischer Versuch über die Schriften des Lukas)를 출판하였다. 한편 1819년에 행하였던 예수의 생애에 대한 강의에서 그는 신약성서를 다른 문헌을 다루듯이 탐구할 것을 주장하였고, 디모테오 전서가 바오로의 저서라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신약성서 각 권의 권위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저자의 이름이 아니라 그 내용을 내세웠다. 이후 그는 자신의 주저인 《그리스도교 신앙론》(Chistlicher Glaube nach den Grundsetzen der evangelischen Kirche im Zusammenhange dargestellt)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821년에 제1권을 출판한 데 이어 이듬해 제2권을 출판하였다. 1830~1831년에 《신앙론》 (Glaubenslehre)이란 제목으로 수정 · 보완되어 제2판이 출판된 이 저서는 신학사에서 불후의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1832년에는 《두 가지 원 복음서 사본의 증언》(Über die Zeugnisse des Papias von unsem beiden ersten Evangelien)을 출판하여 복음서 전승에 관한 연구의 기초를 놓았는데, 여기에서 그는 마태오 복음서가 경구들의 수집서라고 주장하였다. 급성 폐렴에 걸려 1834년 2월 12일 베를린에서 사망하였으며, 그가 사망한 뒤 유고집으로 《변증법》 (Dialektik) · 《해석학》(Hermeneutik) 등이 출판되었다.
〔사유의 체계와 특성〕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적 특성은 종교 체험을 철학화한 '인간성의 보편화'(Universalisierung von Humanität)라고 요약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에는 모라비아 신학교에서 형성된 신비주의적 종교 체험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 그리고 칸트(I. Kant, 1724~1804)의 도덕 철학에서 받은 영향이 항상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적 조화는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형성된 시대사적 사조의 도움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종교 철학은 칸트와 같이 종교를 도덕으로 환원하거나 헤겔(G.W.F.Hegel, 1770~1831)과 같이 형이상학에 종속시키는 입장을 비판 · 부정하고, 우주나 신(神)을 직관과 감정의 범주에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는 당대의 사조가 요청하는 무한(無限)과 유한(有限) 혹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화해를 자신의 사상적 주제로 삼았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다음의 네 가지 특성으로 설명된다.
개인의 종교적 자의식을 보편화한 종교 철학 :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에 관하여 : 종교를 멸시하는 지성인에게 행한 강론》 · 《독백록》 · 《그리스도교 신앙론》에서 개인의 신비적 종교 체험을 통하여 형성된 '자기 의식' 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신'이나 '무한자'(無限者)에 대한 체험으로 보편화하였다. 또 종교는 모든 인간의 심연(深淵)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감정이 그 영역이라고 보았다. "종교는 ··· 아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아닌, 느끼는 것 또는 직접적인 자기 의식의 변형이다"(《그리스도교 신앙론》 §3). 그래서 그는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종교에 관하여》 51) 또는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 (《종교에 관하여》 49)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은 '절대 의존의 감정' 이며, 이와 상응하여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인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의 과제"(《그리스도교 신앙론》 §19)라고 하였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종교적인 감정은 우주 속에 혹은 우주와 더불어 있는 절대자 혹은 무한자를 인식하는 인식의 매개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 곧 무한자에 대하여 연구하는 신학은 종교인 자신들의 종교 체험에 관한 연구, 인간의 종교적 자의식에 관한 연구, 종교적 감정에 관한 연구로 전환된다. 즉 신학적 관심의 방향과 출발점을 인간의 의식적 자아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종교 철학은 인간의 종교적 자의식 혹은 감정을 보편화한 것이다. 그리고 종교란 "무한하게 진보하는 세계 정신의 작품이기 때문에, 하나의 종교만 있기를 바라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 (《종교에 관하여》 242)고 주장함으로써, 종교 다원주의적 사고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종교적 직관의 개별적인 한 유형”(《종교에 관하여》 94)에 불과하다. 이러한 주장은, 칸트의 인식론에 힘입어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는 '신' 을 부인하고 인간의 심오한 감정을 표상화한 것을 무한자로 보편화한 종교 신학 내지 종교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생의 원리를 보편화한 자연 철학적 종교 윤리 : 슐라이어마허는 윤리학 강의를 많이 하였지만, 그의 윤리관은 정확히 정립되어 있지 않다. 《이전의 윤리론에 대한 비판 개요》와 《그리스도교 신앙론》, 슐라이어마허의 유고에 기초하여 요나스(L. Jonas)가 편집한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그는 철학적 윤리와 신학적 윤리를 창조 원리에 기초한 생의 원리(Lebensprinzip)로 종합하였다. 그는 "철학적 윤리와 신학적 윤리의 목적은 동일하다"(《그리스도교 윤리》 12)라고 주장하였는데, 왜냐하면 신의 창조 질서는 곧 자연 질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계시와 이성이 분리되지 않듯이, 신의 창조 섭리는 자연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신적인 절대적 인과율(因果律)은 자연 질서의 인과율을 포함한다고 보았다(《그리스도교 신앙론》 Ⅱ §51). 다만 두 질서는 영원과 시간이라는
질적인 차원에서 다를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성과 자연의 완전한 통일체인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도덕적 삶을 위한 희망과 원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도덕적인 삶은 궁극적인 전제인 하느님으로부터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윤리학'에서 나타난 그의 모든 사유 체계의 근거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신(神), 곧 무한자의 육화이다. 그는 또 하느님의 육화가 인간을 위한 구원을 이루며, 문화와 사회 속에서 인간 생활에 침투하여 변화시키는 그리스도교적 삶의 원리를 성취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칸트와 피히테(J.G. Fichte, 1762~1814)의 주관적이고 형식적인 윤리를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윤리로 전환하고자 한 것이다. 즉 칸트의 비판적 선험철학의 도움으로 자연 과학의 영역 속에서 창조된 사고방식을 자신의 종교적 · 신학적 윤리에 수용한 것이다.
무한과 유한의 변증법적 형이상학 : 슐라이어마허는 "우주의 직관이 나의 모든 종교론의 축이며, 종교의 가장 보편적이며 지상적인 양식이다. 그것으로부터 종교의 모든 위치를 발견할 수 있으며, 종교의 본질과 한계가 명확하게 규정된다"(《종교에 관하여》 52)고 하였다. 따라서 종교의 본질은 "사유도 행위도 아닌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 (같은 책, 49)이다. 즉 직관이 종교의 형식적이고 객관적인 측면이라면, 감정은 종교의 주관적인 측면이다. 감정은 직관을 통하여 획득된 '자아 의식'이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직관의 대상인 우주란 세계 · 체계(system) · 영원한 세계 · 무한자 · 천상적인 것 · 영원한 섭리 · 영원한 오성(悟性) · 신성(神性) · 다원 속의 통일 · 일자(一者)이면서 다자(多者)인 것(같은 책, 71) 등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우주에 대한 직관을 통한 감정이란, 유한한 것 속에 무한한 것의 출현(Erscheinung)을 체험한 것이고, 시간 안에서 영원한 것의 현현을 경험한 '자아 의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적 감정은 우주에 대한 직관 자체가 "무한자의 본질 속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히 수동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에는 인간과 우주의 존재론적 유비(類比)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즉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우주를 직관함으로써 형성된 의식 혹은 감정을 대우주 속에 존재하는 무한자에 대한 '자아 의식' 으로 보편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직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우주는 객관적으로 홀로 실재하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관념주의적이고 도덕적인 하느님 개념을 거부함으로써 인식할 수 없는 타자(他者)로서의 무한자를 인간의 유한한 감정 혹은 '자아 의식' 으로 제한시킨 반면에, 우주에 대한 직관을 통하여 형성된 감정을 절대자 · 무한자 · 영원한 오성 등으로 고양시켰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종교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유한한 것에서 무한자 즉 무한자의 사상(寫像, Abdruck)과 표현을 인식하는 것(같은 책, 49)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비객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종교 현상학을 정립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우주는 도덕 · 형이상학 및 종교의 공통된 대상이다. 더욱이 그는 "하느님 없는 종교는 불가능하다" (같은 책, 94)는 명제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없는 종교가 하느님 있는 종교보다 더 낫다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같은 책, 95)고까지 강조하였다. "무한은 유한 속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유한은 무한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그의 명제는 자신의 변증법적 형이상학을 잘 표현해 준 말이다. 결국 그가 주장한 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불가지론이었다.
실존적 · 심리적 해석학의 기초 : 슐라이어마허는 현대의 학문적 해석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계몽주의가 성서를 역사 비평적으로 논박하고 언어 철학 및 역사 철학에 정립한 것에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자적 영감설'에 근거를 둔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해석학도 거부하였다. 그는 언어가 지닌 의미의 연관성을 분석하려 하였고, 대화자나 저자가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개체의 언어가 지닌 형태와 사상을 심리학적이고 문법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그는 언어의 총체적인 내용 외에 언어의 정신적 내용까지도 해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해석학의 과정은 언어의 '존재론적 실존 양태' 를 드러내는 것이고, 해석의 대상은 "세계 속에 있는 모든 삶의 경험과 행동"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저자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독자가 저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고 주장했는데, 이는 저자의 창작물에 담겨 있는 무의식적인 요소, 곧 유한 속에 현실적으로 현존하고 있는 무한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특히 그가 성서 해석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인식하려고 한 점은 불트만(R. Bultmann, 1884~1976)의 실존적 성서 해석에 초석을 놓은 것이었다. 그는 또 성서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창조력을 언어 분석을 통하여 발견하려고 하였다. 성서 저자의 실존적 상황과 그들의 감정은 개체성을 가지지만 그들의 의존 대상이 그리스도라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체의 성서적 언어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담겨 있다고 하였다(Sämmtliche Werke, Ⅰ -7, 262).
〔영향과 비판〕 슐라이어마허는 19세기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철학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사상은 화이트헤드(A.N. Whitehead, 1861~1947)의 우주론적 형이상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뵈크(A. Boeckh, 1785~1867) · 슈타인탈(H. Steinthal, 1823~1899) · 딜타이(W. Dilthey, 1833~1911)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해석학은 딜타이를 통해 보다 자세히 소개되었다. 한편 볼노프(O.F. Bollnow, 1903~1991)와 가다머(H.G. Gadamer, 1900~ )는 그의 해석학적 방법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과 피히테의 《학자의 소명》에서도 발견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은 하느님의 객관적 계시를 도외시하였고, 인간의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종교적 경험을 중시한 나머지 신학의 객관적 토대를 붕괴시키는 한편, 하느님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을 포기하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하느님께 인격성을 부여하는 의인관(anthropomorphismus)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느님과 세계를 구별하지 않음으로 써 범신론(phantheismus)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가 칸트의 인식 이론에 근거하여, 무한자 그 자체는 알 수 없고 단지 인간의 직관에 의해서 선험적(apion)으로 형성된 종교적 절대 의존의 감정밖에는 없다고 주장한 것은 신학적 불가지론으로 여겨진다. 그는 우주에 대한 직관을 통하여 획득된 종교적 감정이 객관적 실체인 우주 혹은 무한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 의식의 자발적 공 상(空想)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 칸트 ;해석학)
※ 참고문헌  Friedrich Schleiermachers scimmtiliche Werke, I Abt. Zur Theologie, Bd. 1~13 ; Ⅱ . Abt. Predigten, Bd. 1~10 ; Ⅲ . Abt. Zur Philosophie, Bd. 1~9, Berlin, 1835~1864/ F.E.D. Schleiermacher, Über den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em, Vandenhoeck & Ruprecht, 1967^6(최신한 역, 《종교론》, 도서출판 한들, 1997)/ Rudolf Odebrecht Hg., Friedrich Schleiermachers Dialektik, Leipzig, 1942/ W.Dilthey, Leben Schleiermachers, Bd. Ⅱ , Martin Redeker Hrsg., Berlin, 1966/ Schleiermacher : Life and Thought, Fortress, 1973(주재용 역, 《슐라이어마허의 생애와 사상》,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Michael Welker, 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 Universalisierung von Humanität, Philosophie der Neuzeit, Josef Speck Hrsg., Uni-Taschenbücher, 1252, pp. 9~45/ 목창균, 《슐라이어마허의 신학 사상》, 한국신학연구소, 1991/ H.R. Mackintosh, Types of Modern Theology. Schleiemmacher to Barth(김재준 역, 《現代神學의 先驅者들》, 대한기독교서회, 1973). 〔金在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