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레겔, 프리드리히 폰 (1772~1829)

Schlegel, Friedrich 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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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폰 슐레겔.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

독일의 가톨릭 작가. 독일 전기 낭만주의의 거장. 문학비평가. 철학자. 동양학자.
〔생애와 사상〕 1772년 3월 10일 하노버(Hannover)에서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 상인이 되기 위해 실습까지 하였지만, 결국 괴팅겐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생활하던 중 그의 형 빌헬름(Wilhelm Schlegel, 1767~1845)을 따라 예나(Jena)로 이사하여 예나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예나 대학 시절 초기에 그는 플라톤(기원전 4281 427~348), 고고학자 빈켈만(J.J. Winckel-mann, 1717~1768), 문학사가 헴스터하위즈(F. Hemsterhauis, 1721~1791)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 고전에 심취한 나머지, 그리스 고전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인간 형성의 최고 완성이라고 확신하였다. 또 그는괴테(J.W. von Goethe, 1749~ 1832)와 실러(F. Schiller, 1759~1805)의 작품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아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Wilhelm Meister)를 그리스 고전과 대등한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실러가 저술한 철학 · 미학에 대한 논문 <소박과 감상의 문학>(Über naive und sentimentalische Dichtung, 1795~1796)을 읽고서는, 그리스 고전의 완전성은 단 한 번 나타날 수 있는 역사적 현상이며 그리스인의 마음이 자연과 유한한 것에 무의식적으로 소박하게 안주하여 그들의 정신과 자연이 균형을 이루었기에 가능하였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고전주의적 이념과 문예 사상은 그의 논문 <그리스 · 로마의 연구 가치>(Wert des Studiums der Griechen und Römer, 1794)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 후 슐레겔은 예나 대학에서 피히테(J.G. Fichte, 1762~1814)의 미학 · 범신론 · 형이상학적 관념론 · 절대적 자아 등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서, 그때까지 확신하고 있던 그리스 고전에 대한 예찬이 깨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인간 정신은 성장하여 자신의 무구속성(無拘束性)을 의식하고 자연과의 대립을 깨닫게 되며, 모든 현존하는 것과 주어진 것을 초월하여 신(神)적인 것을 갈구하게 된다고 여기게 되면서, 이후 그는 점차 낭만주의적 우주시(宇宙詩)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고전의 조화와 미의 예술은 다시 재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 후 슐레겔은 티에크(L. Tieck, 1773~1853)가 발표한 낭만적인 작품 《슈테른발트의 방랑》(Franz Stern-baldes Wanderungen)을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보다 더 높이 평가하였고, 실러의 문학 잡지인 《호렌》 Horen)과《시신(詩神)의 달력》(Musen-Almanach)을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1801년 당시 예나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던 슐레겔은, 역사학 교수로 있던 실러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베를린으로 되돌아가 형 빌헬름과 함께 낭만주의 학파의 계간지 《아테네움》(Athenäum)과 《낭만주의 학파》(Romantische Schule)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낭만주의의 모든 문학 이론이 본격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하였고, 슐레겔 자신도 여기에 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이때 계간지에 글을 기고한 대표적인 사람들은 슐레겔 형제를 비롯하여 티에크, 노발리스(F. von Hardenberg Novalis, 1772~1801), 슐라이어마허(F.E.D. Schleiermacher, 1768~ 1834) , 도로테아(Dorothea Veit), 베른하르디, 휠젠 여러 남녀 문인들이었다. 슐레겔은 이들 문인들 중 한 사람으로 철학자인 멘델스존(M. Mendelssohn, 1729~1786)의 딸인 도로테아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열 살 연상인 그녀와의 결혼 생활을 통해 얻은 소재를 중심으로 낭만적인 자전적 소설 《루신데》(Lucinde, 1799)를 발표하였는데 율리우스(Julius)와 루신데라는 연인의 애정 생활을 그린이 작품은 아라베스크 형식의 기지가 넘치는 소설이다.
슐레겔은 이 작품을 통하여 낭만주의 문학의 극치를 보여 주고자 하였다. 이 작품은 줄거리 위주로 펼쳐지기보다는 여러 가지의 감상 · 편지 · 단편(斷篇)이 난잡하게 혼합되어 있어 다소 졸렬한 인상을 주지만, 낭만적인 생활의 이상을 적나라하게 그려 냈고, 그 때문에 이 작품은 그의 문학 이론의 표본으로 평해졌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계몽주의적 상식이나 합리적 실리주의를 부정하고 태만 · 향락 · 방일(放逸) 등을 주제로 하여 낭만주의의 일면을 내세우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첨가하여 관능적 욕구와 정신적 사랑을 융합시켰다. 이러한 면에서 이 작품은 낭만적 주관주의의 극치라고 평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자의(恣意) · 무위(無爲) · 성(性)의 해방 등을 지나치게 내세웠다 하여 도덕적인 면에서 사회의 지탄을 받았으며, 실러 역시 이 작품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1800년대 초에 이르러 슐레겔의 사상은 점차 보수주의적인 방향으로 돌아서기 시작하였다. 1802년에 슐레겔은 파리에서 아내와 함께 예술 문제를 다룬 학술지《유럽》(Europa)을 간행하면서 산스크리트어 연구와 동양문화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무렵 형 빌헬름과의 사이가 멀어지고 노발리스도 사망하자 소위 전기 낭만주의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아테네움》도 이때 폐간되었다. 1808년에 독일 쾰른으로 간 슐레겔은 중세 가톨릭 문화와 고덕 건축에 감동을 받아 그의 아내와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점차 커 가는 그의 보수주의적인 사상의 성향은 그의 개종으로 절정에 이르렀고, 개종 후부터 그는 줄곧 가톨릭 교리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헤겔(G.W.F. Hegel, 1770~1831)의 범신론을 격렬하게 비판하였고, 존재론적인 유형에 가까운 철학 사상을 정립하였으며,말년에는 신가톨릭 신비주의 사상을 강력히 옹호하는 글들을 많이 집필하였다. 또 유럽의 그리스도교를 역사의 전환점이자 문화의 정점이라 생각하고,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가톨릭 사상에 기초한 국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을 근거로 가톨릭 낭만주의 잡지인 《융화》(Concordia)를 발행한 데 이어 빈으로 가서는 빈 의회와 프랑크푸르트 독일 의회에 외교관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 후 라인 제국 · 네덜란드 · 스위스 각지를 여행한 뒤, 빈으로 다시 돌아와 빈 대학에서 1810년부터 언어학과 문학사를 강의하였다. 이 당시 그는 《인도인의 언어와 예지》(Über die Sprache und Weisheit der Indier, 1808)와 《고대 및 근대 문학사 강의》(Vorlesungen iiber die Geschichte der alten und neueren Literatur, 1812)를 저술하였다. 전자는 동양학과 비교 언어학의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이고, 후자는 문학 연구의 총결산으로 그리스 · 로마의 고전으로부터 단테(A.Dante, 1265~1321), 세익스피어(W. Shakespeare, 1564~1616)를 거쳐 근대에 이르는 문학 개론서라 할 수 있다. 1820년경부터 드레스덴에서 역사 철학을 강의하다가 1829년 1월 12일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평가와 의의〕 18세기 말인 1797년경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문예 사조뿐만 아니라 사상 전반에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낭만주의 운동은, 유럽 여러 나라들 중 독일에서 제일 먼저 발생하였다. 낭만주의 운동은 독일 문예 사조에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각국 및 다음 세대의 문예 사조와 사상계에 커다란 자극을 준 운동이었다. 이러한 낭만주의 운동에서, 슐레겔은 전기(前期) 낭만주의 운동의 거장으로서 낭만주의 문학 사상과 이론을 정립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노발리스는 슐레겔이 슐라이어마허와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적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등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고 평하였다. 슐레겔은 피히테의 관념론과 스피노자(B. Spinoza, 1632~1677)의 자연주의를 종합한 형이상학을시도했고, 칸트(I. Kant, 724~1804) 윤리학의 추상적 형상주의에 반대하여 '사랑' 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인 윤리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에 그의철학 사상은 점차 플라톤의 철학 사상을 기반으로 한 존재론적인 유형에 접근하였다. (→ 가톨릭 문학, 독일의 ;낭만주의)

※ 참고문헌  金光堯, 《獨逸戲曲史》, 明知社, 1993/ 朴贊機, 《獨逸文學史》, 一志社, 1992/ Brockhaus Enzyklopädie in zwanzig Bänden, Sieb-zehnte völlig neubearbeitete Auflage des großen Brockhaus, Wiesbaden,1981/ Gero von Wilpert, Lexikon der Weltlieratur, Bd. Ⅰ, Autoren, Stut-tgart, 1975/ Ernst Behler, Friedrich Schlegel : Schriften und Fragmente. Ein Gesamtbild seines Geistes, 1956/ Paul Kluckhohn, Das Ideengut der deuts-chen Romantik, Tiibingen, 1966/ Wolfgang Beutin Hrsg., Deutsche Litera-turgeschichte, von den Anfägen bis zur Gegenwart, Stuttgart, 1979 . 1984.〔金光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