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뤼터, 안드레아스 (1660~1714?)

Schlüter, Andr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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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조각가. 건축가. 독일 후기 바로크 양식의 선두주자.
1660년경 독일 단치히(Danzig, 현재 폴란드의 그다인스크)에서 태어났는데, 최근 폴란드 미술학계에서 그의 생애에 대해 활발히 연구해 왔으나 생몰(生沒) 연대 · 교육 · 가족 관계 등조차 정확하게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 단지 그가 1664년 5월 22일 함부르크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과 폴란드에서 행하였던 작품 활동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밝혀 내었다. 현재까지의 연구로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슐뤼터는 단치히에서 성장하여 사포비우스(Ch. Sapovius) 문하에 들어가 조각을 배웠고, 1681년에 결혼한 뒤부터 1689년까지 그곳에서 조각 작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1689~1693년에 바르샤바에서 조각가로 생활하였는데, 특히 당시의 폴란드 왕인 얀 3세 소비에스키(Jan Ⅲ Sobieski, 1674~1696)를 위해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그리고 폴란드에 거주하던 네덜란드인인 틸만 반 가메렌의 건물에 배치할 조각 작품들을 제작하였는데, 당시 그가 설계했던 건축 작품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1649년 중반에 베를린을 방문한 슐뤼터는 1695~1696년에는 이탈리아를 여행하였으며, 1702년에는 드레스덴으로 갔다. 1698년 이후 그는 건축가로서의 명성을 얻어 베를린 병기창 본부와 베를린 궁전 건축(169~1708)을 담당하는 주요 건축가로 활약하였고, 궁전 건축 감독관이 된 후 곧 최고 감독관으로 승진하였다. 1694~1713년에는 프리드리히 1세(1657~1713) 황제의 왕실 조각가로 일하였고, 1701~1710년에는 인문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으며, 1702~1704년에는 미술 아카데미 교장을 역임하였다. 슐뤼터가 조각가이자 건축가로서 가장 명성을 누렸던 때는 1705년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조폐청 청사가 무너지고, 프라이엔 발트(FreienBalt) 극장과 궁전 소성당 건축 문제가 발생하자 곧 명성을 잃고 말았다. 1713년까지 베를린에서 생활하면서 극심한 경제적 위기를 맞았던 그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사망하기까지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1672~1725)를위한 작품 제작을 하였다. 그리고 1714년경에 그곳에서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 품〕 슐뤼터는 조각이나 건축에 관한 전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천부적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 단치히의 왕실 소성당을 위해서 제작한 장식 두상(頭像)들이 있는데, 이런 형태의 작품들은 후에 베를린의 건물 장식에도 등장하였다. 그가 바르샤바 인근의 빌라노프 궁전 천장 장식용으로 제작한 조각들은 베를린 건물 등에 사용된 작품 형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1688~1692년에는 얀 3세 소비에스키와 러시아 황제 이반 4세의 묘비를 설화 석고(雪花石膏, alabas-ter)로 제작하였고, 1689~ 1694년에는 바르샤바의 크라진스키 궁전 정면의 장식과 부조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또 베를린에서 생활할 때에는 주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와 베르니니 (G.L. Bernini, 1598~1680) 풍의 작품을 제작하여 북유럽 전성기의 바로크 조각과 건축을 대표하는 주요 작가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였다.
한편 슐뤼터는 1696년부터 1700년 10월까지 청동으로 <베를린 대공의 기마상>을 제작하였는데, 현재 베를린의 살로텐부르크 궁전 앞에 서 있는 이 작품은 바로크 기마상으로서는 최대 규모이고, 1708~1709년에는 기마상 기초대 아래에 4명의 노예상이 첨부되었다. 이외에도 1697~1698년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전신상>(현재 칼리닌그라드 소장)을 만들었고, 1699~1700년에는 베를린 궁전을 이탈리아 풍의 전성기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장식하였다. 이후 그는 건축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조각 작품도 제작하였는데, 1700년경에 성 니콜라이 교회를 위해 대리석 묘비를 제작하였고, 1704년에는 헤센주(州) 홈부르크(Homburg) 대공을 위한 청동 흉상(홈부르크 궁전 소장)을 제작하였으며, 베를린 성당에 놓일 대형 금속관을 제작하였다. 또 1705년에는 소피 샬로테 왕비를 위해서, 1708년에는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폰 오라니엔을 위해, 그리고 1713년에는 프리드리히 1세를 위해 석관을 제작하였다. 베를린 시기 최후의 작품은 카메케 빌라인데, 이 건물에서 슐뤼터는 건축의 리듬을 구현하였다. 특히 건물 내부에 풍부한 리듬을 보여 주고 있는 벽토 치장(혹은 세공, stucco) 작품들이나 넵튠, 암피트리테, 아폴로, 다프네 등과 함께 여러 두상들이 매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고 말았다. 생애 말기에는 주로 단치히 특유의 바로크 문양과 장식적인 조각 작품이나 공예품을 제작하였다.
〔평 가〕 슐뤼터가 제작한 작품들은 모두 대단히 열정적이면서도 창조적이며, 바로크 형태의 풍만함이나 드라마틱한 형식이 슐뤼터 특유의 진지함으로 그 절정을 드러내었다. 이와 같은 영웅적 형태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이탈리아의 표현 양식을 합쳐 놓으려 한 그의 제작 의도에서 기인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Lexikon der Kunst, vols. 5, Leipzig, 1978 ; Berlin, 1983/J.Jahn, Wörterbuch der Kunst, Stuttgart, 1983/ M. Sauerlandt, Deutsche Plas-tik des Mittelalters, München, 1953. 〔洪珍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