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쪽에 위치한 입헌 군주국으로, 공식 명칭은 스웨덴 왕국(Konungariket Sverige) . 서쪽과 북서쪽은 노르웨이와, 북동쪽은 핀란드와 접경하고 있으며, 동쪽은 보트니아 만, 남동쪽은 발트 해, 남서쪽은 북해와 접해 있다. 면적은 449,964㎢이고, 인구는 8,850,000명(1996)이며, 수도는 스톡홀름(Stockholm)이다. 공용어는 스웨덴어. 스웨덴인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국교가 루터교여서 가톨릭 신자는 전체인구의 1.8% 정도밖에 안된다.
400년경부터 현재의 스웨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바이킹의 각 부족들은 점차 비잔티움과 바그다드로 통하는 동부 무역로를 장악하였으며, 13세기부터는 점차 세습 군주제가 확립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14세기 초반 들어 통합되기 시작하였는데, 1397년 노르웨이 · 덴마크와 '칼마르 동맹' (KalmarUnion)을 맺은 뒤 덴마크왕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1523년 구스타프 1세 바사(Gus-tav Ⅰ Vasa, 1523~1560)가 동맹을 해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 후 구스타프 2세 아돌프(Gustav Ⅱ Adolf, 1611~1632) 등 뛰어난 군주가 등장하면서 스웨덴은 국력이 강화되었으나, 대(大)북유럽 전쟁에서의 패배와 1718년 카를 12세(1697~1718)의 죽음으로 유럽 열강으로서의 위상이 꺾이고 말았다. 이후 1741~1743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러시아에 종속되었다가 구스타프 3세(Gustav Ⅲ, 1771~1792) 때 절대 왕정이 되었고, 1814년에는 노르웨이와 단일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노르웨이와 의 왕권 동맹은 오스카 2세(Oscar Ⅱ) 때인 1905년에 해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웨덴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표방하였으며, 전쟁 후에는 사회 개혁을 시작하여 건강과 교육을 비롯한 다른 많은 부분에서 사회 원조를 선도하는 복지 국가로 변신하였다. 1976년에 비사회주의 연합이 의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함으로써 44년 동안 계속되었던 사회 민주주의가 막을 내렸으나, 1982년 이후 사회 민주주의자들이 소수공산당과 연합하여 재집권하였다.
〔그리스도교 전래 초기〕 최초로 스웨덴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사람은 베네딕도회의 성 안스가리오(Ansgarius,801~865)였다. 자연 숭배 등 원시 종교를 믿고 있던 스웨덴인들은 9세기부터 서서히 유입되기 시작한 그리스도교 문화에 쉽게 동화되지 못했다. 특히 읍살라(Uppsala)의 이교도 사원은 종교 생활의 중심이었고 그리스도교 선교단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11세기 초 올로프 시괴트코눙(Olav Skötkonung)이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뒤 스웨덴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으며, 1164년에는 읍살라 교구가 설립되었고, 1210년에는 처음으로 대주교에 의해 에리크 크누트손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어 영국으로부터 수도회가 들어왔으며, 이와 함께 시토회 · 말타 기사 수도회 · 가르투지오회 등의 수도회가 설립되었는데, 시토회는 스웨덴의 수도 생활을 활성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스웨덴의 수호 성녀인 비르지타(Birgitta, 1303~1373)의 구술로 기록된 《계시》(Revelatios)가 많은 이들로부터 애독되었는데, 성녀는 당시 아비뇽에 거주하고있던 교황 글레멘스 6세(1342~1352)에게 자신의 환시 내용을 밝히면서 로마로 돌아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촉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성녀는 1346년 밧스테나(Vadstena)에 '비르지타회'(Birgittini)라고 널리 알려진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 수도회'(Order of the Most Holy Savior)를 창설하고 여러 나라에 분원을 세웠다.
〔종교 개혁〕 중세 말에는 수도회들이 꾸준히 설립되고 교회 건물들이 증축되는 등 스웨덴은 유럽에서 가장 가톨릭적인 국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종교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칼마르 동맹 이후 스웨덴이 덴마크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자 이에 반기를 들고 독립한 구스타프 1세는, 1523년에 의회의 동의를 얻어 스웨덴의 왕이 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동안 왕족과 결탁하여 권세를 누리던 성직자 계층을 추방하고, 국가가 주도하는 형태인 루터교를 채택하였다. 또 1536년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모든 수도회를 폐쇄하였다. 이와 함께 가톨릭의 반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종교 지도자들을 사형에 처하거나 추방시킴으로써 가톨릭의 힘은 극히 미약해졌고, 1544년에는 왕과 의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루터교 국가로 선포되었다. 1593년에 웁살라 의회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confessio Augustana, 1530)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루터교는 확실히 스웨덴의 국교가 되었다. 이어 구스타프 2세가 삼십년 전쟁(1618~1648)에 참여함으로써 스웨덴은 반(反)가톨릭 세력을 대표하는 루터교 국가로 인식이 되었고, 발트 해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와 19세기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스웨덴 교회가 점차 약화되면서 경건주의(pietism)와 복음주의(evangelicalism)가 널리 전파되었다. 루터교 목사들은 이 같은 경향들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국교로부터몇몇 종파들이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종교 개혁 이후의 가톨릭 교회〕 스웨덴에서 종교 개혁을 통해 나타난 가장 큰 난점은 문화적인 쇠락이었다. 한때 예수회는 발트 해의 남부 해안을 따라 대학들을 설립하고 이곳에서 상류층 자녀들을 공부시켰으나, 예수회의 이러한 활동에 점차 압력이 가해졌고, 1617년의 국가 시책에 따라 가톨릭은 공식적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구스타프 3세가 교황 비오 6세(1775~1799)
를 방문한 뒤 1781년에 종교 관용령(Edict of Toleration)을 공포하면서 루터교가 아닌 다른 종교도 허용되었다. 1783년에 설립된 스웨덴 대목구가 1953년에는 스톡홀름 교구로 승격되었다. 스웨덴에서 가톨릭이 재건될 수 있었던 데에는 1823년 오스카 1세(Oscar Ⅰ, 1844~1859)가 가톨릭 신자인 보하네스(J. Beauharnais)와 결혼한 것과그녀의 고해 신부였던 스투다치(J. Studach)의 영향이 컸다.
1873년에는 국교가 아닌 다른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법이 제정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가톨릭에 대한 전통적인 편견이 점차 사라져 최근 100년 사이에는 개종자들이 꾸준히 증가하였다. 1952년 이후 거의 완전하게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으며, 1953년에는 교계 제도가 다시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톨릭에 대한 관심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교회는 제한된 자원과 현지인 성직자의 부족 등으로 교세 확장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96년 현재 166,000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으며, 교구 1, 본당 38개에 주교 2, 사제 131(교구 소속 60, 수도회 소속 71), 종신 부제 15, 수사 13, 수녀 247명이 있다. 그리고 한인 교포 신자 55명이 1개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 비르지타 ; 안스가리오)
※ 참고문헌 L. Rooth, 《NCE》 13, pp. 829~833/ 2000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p. 339~340/ 《EB》 21, pp.482-498/ 《EU》 Les Chiffres du Monde, pp. 480~481. 〔金善美〕
스웨덴
〔영〕Kingdom of Sw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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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