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영〕Swiss Confed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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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부 내륙에 있는 연방 공화국으로, 공식 명칭은 스위스 연방(Cofédération Suisse, Schweizerische Eidgenossens-chaft, Confederazione Svizzera). 서쪽은 프랑스, 북쪽은 독일, 동쪽은 오스트리아와 리히텐슈타인 공국, 남쪽은 이탈리아와 접경하고 있다. 면적은 41,293k㎡이고, 인구는 7,090,00명(1996)이며, 수도는 베른(Bern)이다. 공용어는 독일어 · 프랑스어 · 이탈리아어이며, 독일인 · 프랑스인 · 이탈리아인 · 소수의 유고슬라비아인 · 에스파냐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교는 없으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소수의 유대교인들이 있다.
현 스위스 지역의 역사적인 기록은 로마 침공 이후부터 전해지고 있는데, 이곳을 헬베시아(Helvetia)라고 불렀던 로마인들은 기원전 58년에 알프스 산맥이 전략적으로 중요함을 깨닫고 이곳을 요새화하였다. 9세기에 프랑크족의 지배가 확고해졌고, 11세기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었으며, 16세기에 접어들어서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분리 · 대립하게 되어 내전이 일어났고, 삼십년 전쟁(1618~1648)으로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하여 13개 주(州)들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더 이상 지배받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였다. 1815년에는 주가 22개로 늘어났으며, 1840년대 이르러 루체른(Luzern) · 우리(Uri) · 슈비츠(Schwyz)를 포함한 몇몇 주들이 독립된 연방 형성을 시도했다가 실패로 돌아간 뒤마침내 1848년에 수도를 베른으로 하는 새로운 연방 국가가 형성되었다. 제1 ·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중립을 지켰으며, 전쟁이 끝나고 노인 연금과 의료 보험 같은 복지 정책을 시행하여 복지 국가로서의 자리를 확립하였다. 1978년 9월 24일 독일어 사용 지역인 베른 내에 프랑스어 사용 구역이 국민 투표를 거쳐 분리됨으로써 23개의 주가 되었다.
〔복음의 역사〕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정착 : 로마 지배하에 있을 때 처음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뒤 3세기경부터 일부 지역에 그리스도교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는데, 복음은 주로 상인이나 예술가 혹은 노예의 신분으로 헬베시아에 오게 된 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전파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경부터였다.
스위스는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교 민족들의 침략을 받아 왔다. 북쪽에서는 이교도인 알라만족이 유럽 중앙부로, 서쪽으로부터는 부르군디족이 스위스로 진출하였다. 400년경부터 로마 장군 아에시우스(Aetius)는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제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르군디족을 사파우디아 지역에 용병으로 정착하게 하였는데, 부르군디의 왕 지기스문트(Sigis-mund, 516~523)가 개종한 이후 부르군디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496~497년경 알라만족은 프랑크의 클로비스 1세(Clovis I , 466?~511)로부터 침략을 받자 스위스 중앙부로 진출하였고, 민족 대이동기에 게르만족이 현재의 스위스 지역에 정착함으로써 이곳은 부르군디 · 알라마니 · 차하에이타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알라만족의 개종은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6~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지역의 선교는 아일랜드와 프랑크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나 당시 선교 활동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의 발전과 연방의 형성 : 스위스가 카롤링거 왕조에 의해 통치되면서 부르군디족은 888년에, 알라만족은 917년에 각각 독립하였다. 그러나 알라만족은 919년에, 부르군디족은 1033년에 다시 신성 로마 제국에 병합되어 그때부터 현 스위스의 전 영토는 신성 로마제국의 한 부분이 되었다. 7세기 초 바젤(Basel) · 로잔(Lausanne) · 제네바(Geneva) · 시용(Sion) · 쿠어(Chur) · 콘스탄츠(Konstanz) 등 6개 교구가 설립되어 중세 동안 유지되었고, 10세기 초에는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이 스위스로 전파되었으며, 부르군디의 여왕 베르타(Bertha, ?~1024)는 962년 파이에르네(Payeme)에 쿨리막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당시 시토회에서 설립한 유명한 수도원이성 우르바노(St. Urbanus) 수도원과 베팅겐(Wettingen) 수도원이다. 그리고 13세기에는 탁발 수도회들(mendicantorders)의 활발한 선교 활동이 이루어져 1229년에 도미니코회, 1231년에 작은 형제회가 진출하였다.
1513년에는 13개 주의 연방이 형성되었으나, 연방은 여전히 교회와 수도원의 특권과 권리를 인정하였으므로 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다. 연방은 교황을 지지하였고, 교황 식스토 4세(1471~1484)와 율리오 2세(1503~1513)는 스위스 군사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특히 152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Karl V , 1519~1556)의 군대가 로마를 침공하였을 때, 스위스 군대는 147명의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를 보호하였는데, 지금까지 '교황청 근위병' (Gendarmeria Pontifica)이 스위스인들로 구성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종교 개혁〕 종교 개혁 직전 스위스는 내전(內戰)에다가 주(州)마다 종교가 달라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때 성 니콜라오(Nicolaus de Flüe, 1417~1487)는 은수자 혹은 신비가로서 기도와 단식 등을 통하여 스위스인들에게 영성적 모범을 보여 주었으며, '화해와 평화' 가 이루어지도록 영성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오늘날 스위스의 대표적인 성인으로서, '조국의 아버지' 또는 평화를 이룩한 이' 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한편 종교적 분열 상태가 계속되자 후고(Hugo von Ho-genlandenberg, 1496~1532) 주교는 1497년 콘스탄츠 교회 회의를 개최하고 개혁을 단행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스위스 성직자들의 저항에 직면하였고, 교회 내의 자체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자 시의회가 이 문제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츠빙글리(H. Zwingli, 1484~1531)는 독일 · 스위스 지역 전반에서 중요한 종교 개혁가로 활동하였는데, 그는 시의회가 1523년 1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개최한 공개 토론회에서 성서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이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시의회는 이에 대한 결정권을 개인의 권리로 유보했다. 제2차 토론회 이후 파문이 거세게 일었고, 이듬해 취리히에서는 성상(聖像)이 파괴되고 새 로운 교리가 도입되었다. 또 수도원이 해체되고, 1525년에는 미사 집전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취리히로부터 스위스 동부를 따라 전파되었으나, 우리 · 슈비츠 · 운터발덴(Unterwalden) · 추크(Zug) · 루체른 등 5개 주에서는 정통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다. 그들은 규율의 개혁 문제에 있어서는 취리히에 동조하려 하였으나 정통 신앙이 침해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위스 의회는 츠빙글리의 교리로부터 정통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주들의 권유에 따라, 1526년 바덴에서 종교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 토론회에서는 성체성사 · 원죄 · 연옥 · 성화상 공경 · 성인 공경 · 교회 계명 등이 토론되었으며, 연방 의회는 가톨릭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츠빙글리의 급진적인 영향하에 있었던 취리히는 연방 의회의 판결을 거부하였고, 츠빙글리는 베른 · 장크트갈렌(Sankt Gallen) · 바젤 · 샤프하우젠(Schaffhausen) 등 스위스의 여러 지역에 종교 개혁 사상을 전파하여 프로테스탄트교화하였다. 이에 정통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던 5개의 주는 1529년 2월 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 1503~1564)와 동맹을 맺고 프로테스탄트 저지에 나섰다. 같은 해 6월 카펠 전쟁(Kappel War)이 일어났으나 중재적 화의(和議)로 저지되었고, 1531년 10월에 다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에 전쟁이 일어났으나 이때 취리히군의 종군 목사로 참전했던 츠빙글리가 그 달 11일에 전사하고 말았다. 이 전쟁은 가톨릭을 옹호하는 주들의 승리로 끝났다.
〔스위스의 종교 전쟁〕 이 무렵 독자적으로 발전해 온 제네바는 사보이가(家)의 압력에서 벗어나려고 스위스 연방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사보이가는 무력으로 제네바를 억압하고자 하였으나, 베른은 제네바를 돕기 위해 사보이가를 공격하여 1536년 보(Vaud)를 점령하였고, 그곳에 프로테스탄트를 전파하였다. 같은 해 제네바는 베른의 원조를 얻어 독립 공화국이 되었고, 이후 칼뱅(J.Calvin, 1509~1564)은 제네바를 세계적인 종교 개혁의 중심지로 만듦으로써 제네바는 신정(神政) 정치의 도시가되었다.
1577년 가톨릭을 선호하는 주들은 사보이가와 동맹을 맺었으나, 프로테스탄트화된 주들은 이미 알자스와 스트라스부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와의 첨예한 대립으로 두 차례의 빌메르겐 종교 전쟁(Vilimergen War, 1656~1712)이 있었지만 파국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구 연방의 붕괴와 근대 교회〕 1798년 스위스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헬베시아 공화국을 세운 프랑스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130개 이상의 수도원을 폐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면서 대다수의 수도원이 재건되었지만, 혁명 이전처럼 종교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고조되지는 않았다.
당시 교회는 보수적인 빈(Wien) 체제에 대항하여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운동으로 사회와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몇몇 주들에서는 교회를 국가에 종속되는 위치에 두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1844년에는 보수 가톨릭을 표방하는 7개의 주들이 존더분트(Sonderbund, 분리 동맹)를 결성하여 내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자유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한 연방 의회가 병력을
파견하여 가톨릭 세력을 격파하고 동맹을 해체하였다. 이후 가톨릭 교회는 여러 신심 단체와 가정 선교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와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 나갔고, 가톨릭 노동자 운동도 발전하여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프리부르 연합(The Union of Fribourg)이 설립되었다.
〔현대의 교회〕 산업화로 인하여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발생하면서 각 주들에서도 종교간에 서로 교류가 있게되었다. 19세기 들어 스위스는 바젤, 쿠어, 로잔 · 제네바 · 프리부르, 장크트갈렌, 시옹의 5개 교구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모든 교구는 교황청 직속 교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자수는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나 성직자수는 상대적으로 감소하였으며, 현재 대부분의 주들이 (1963년 이후 취리히 포함) 가톨릭 교회를 인정하고 있다.
1996년 현재 3,289,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있으며, 교구 6, 본당 1,691개에 추기경 2, 대주교 5, 주교 17, 신부 3,341(교구 소속 1,949, 수도회 소속 1,392), 종신 부제 95, 수사 398, 수녀 6,978명이 있다. 한인 교포 신자 수는 221명이고, 1개의 본당과 1개의 공소에서 신부 1명이 사목 활동을 펼치고 있다. → 종교 개혁 ; 츠빙글리 ; 칼뱅)
※ 참고문헌  J.B. Villiger, 《NCE》 13, pp. 845~853/ 《EB》 21, pp. 527~544/ 2000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340/ 《EU》 Les Chiffres du Monde, pp. 480~481/ A. Franzen, 최석우 역,《교회사》, 신학 총서 22, 분도출판사, 1982. 〔金善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