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출신의 예수회 설교가. 16세기에 교회를 위협하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여 가톨릭 사상을 옹호한 호교론자이자 저술가. 정치 개혁가.
〔생애 및 활동〕 1536년 2월 바르샤바 남쪽 인근의 그로젝(Grojec)의 한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나 1552년에 크라쿠프(Kraków)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2년 후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마조비아(Mazovia) 공작령에 속했던 바르샤바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주변 환경은 스카르가가 평생 다양한 활동과 저술을 통하여 프로테스탄트에 맞서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555년에 바르샤바 교구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며, 1557년에는 루블린(Lublin) 궁정 백작의 아들을 지도하는 가정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1560~1561년에는 백작의 아들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빈 궁정에 머물렀는데, 이때 예수회의 사도직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온 뒤 스카르가는 많은 성직자들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는 것을 목격하고, 성직자가 될 결심을 하였다. 사실 당시에는 성직자가 극도로 부족할 정도로 개종자가 많았는데, 심지어 1567년에는 폴란드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였던 한 주교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는 사태까지 발생할 정도였다.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 1564년에 리보프(L'vov)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스카르가는 로하틴(Rohatyn) 본당 신부가 되어 사목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민, 환자 및 죄수들을 돌보는 일에 더 관심을 가졌고, 특히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신자들을 다시 교회로 인도하는 일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결국 그는 본당 사목 활동을 그만두고 설교 활동에 헌신하고자 하였다.
1567년 교구 참사회에서 공식 설교가로 임명을 받은 스카르가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을 지도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완벽하게 프로테스탄트와의 투쟁을 전개하려는 목적으로, 이듬해 로마에 있는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수련기를 마치고 1571년 5월 폴란드로 돌아온 그는 예수회 학교의 교사로 일하면서 설교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수회가 리투아니아의 빌나(Vilna)에 세운 학교에서 1572년에 페스트로 13명의 신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1575년 봄에 그는 빌나로 파견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스카르가는 리투아니아 지역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에 맞서는 설교에 열중하였다.
1579~1581년에 벌어진 러시아의 이반 4세(Ivan Ⅳ) 공포제(1530~1584)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폴란드의 왕 바토리(Stephen Ⅰ Báthory, 1576~1586)는 폴로츠크(Polotsk)지역의 도시들을 재점령한 데 이어, 완전히 프로테스탄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리보니아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폴란드 왕은 이 지역에 있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축출하기 위해 스카르가를 비롯한 예수회 회원들을 초청하였다. 이후 스카르가는 폴로츠크의 예수회 학교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1582년에는 리가(Riga)에서 다른 동료 신부들과 함께 설교 활동을 하였으나 언어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584년에는 크라쿠프로 파견되어 미사 참여와 그 의미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설교가로도 활동하였다. 또 이때 병자 구호 단체들을 설립하였는데, 이 단체들의 활동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1587년에 새로 왕으로 즉위한 지크문트 3세 바자(Zygmunt Ⅲ Vasa, 1587~1632)는 스카르가를 궁정 선교사 겸 신학자로 임명하였고, 스카르가는 사망할 때까지 24년 동안 종교적인 임무와 함께 폴란드의 정치에도 간접적으로 개입하였다. 그리고 1612년 초 궁정을 떠날 수 있는 허락을 받고 크라쿠프로 되돌아갔다가 그 해 9월27일 사망하였다.
〔저 술〕 스카르가의 삶이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폴란드의 정치에도 개입하였던 것처럼 그의 저술은 이 두 가지 활동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우선 그의 저술은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반박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당시 그가 리투아니아의 대표적인 칼뱅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볼란(A. Wolan)과 성찬 전례 문제를 놓고 벌인 논쟁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1576년에 출판된 저서 《성체성사에 대하여》에서 스카르가는 성 변화,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 및 불법적인 성체 분배에 관하여 언급함으로써 볼란의 저서에 나타난 칼뱅주의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또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상대적 우위성과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카르투지오회의 수리오(Laurentius Surius, 1523~1578)의 저작을 요약 · 번역 · 개작하여 1579년에 《성인전》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수리오의 저작을 모방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리포마노(Luigi Lippomano, 1496~1559)의 성인 연구 방법론을 기술적으로 변형시켜 폴란드의 정신에 접목시키고 원본 주석을 덧붙였으며,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성인들이나 폴란드의 성인들 및 다수의 강론과 윤리적인 성찰 등을 내용 안에 첨부하였다. 이 책은 "16세기의 가장 순수한 폴란드어의 전형"이라고 칭송되었으며, 재판을 거듭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스카르가의 저술이 지향한 또 다른 목적은 교회 일치의 추구, 구체적으로는 종교와 정치의 결합을 통해 폴란드의 분열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1576년에 그는 논문 <그리스 정교회와 하나의 목자 밑에 있는 하느님 교회의 일치에 관하여>를 폴란드어로 출판하였는데, 라틴어로도 번역된 이 논문을 통해 그는 당시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각종 중상들을 반박하고, 루테니아 동방 가톨릭 교회를 계몽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콘스탄틴 대제때부터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에 이르는 그리스 정교회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교회의 일치를 호소하였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전개된 이 신학적 논고가 서방 교회를 지나치게 옹호하는 편파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하여 이에 격분한 루테니아인들이 출판된 책들을 모두 사서 불태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1589년에 그가 모스크바 정교회 총대주교의 선출에 개입한 사실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총대주교의 선출이 루테니아인들을 폴란드로부터 분리시키는 정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이미 1577년에 저술하였던 《하느님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를 보다 확대 · 심화시켜 《정부와 하느님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를 1590년에 발행하였는데, 이 저서에서 그는 교회와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시민적 도의와 국가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가톨릭 신자들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글로 인해 칼뱅주의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은 1591년 5월과 6월에 걸쳐 비참하고 무모한 싸움을 벌여 크라쿠프를 피로 물들였으며, 오히려 종교적인 증오심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종교와 정치의 결합을 위한 스카르가의 노력은 소위'바르샤바 연맹'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1573년에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에 현실적인 불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이 연맹을 결성하였는데, 스카르가는 처음부터 이 연맹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1591년의 전투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이 연맹에 가톨릭 성직자들 특히 예수회 회원들을 참여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1595년에 《연중 주일과 축일 강론》을 발표하였다. 이후 출판된 《칠성사 강론》 등과 함께 그의 철학적 깊이와 문체의 정교함을 보여 주는 이 저서는, 폴란드 왕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정치 원칙들을 제시하고자 쓴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종교적 일치를 근거로 형성되는 국가의 일치는 신앙 안에서 모든 이교도들에 대한 억압을 필요로 하며, 이교도는 어떠한 존재의 권리도 보유할 수 없고 법적인 보호 역시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6세기 말에 폴란드에 또 하나의 위험 요소로 등장한 것은 터키의 이슬람교 세력이었다. 교황 글레멘스 8세(1423~1429)가 제안한 반(反)오스만 왕조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1597년에 의회가 개최되었으나, 별다른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폐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카르가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로 평가받고 있는 《의회 강론집》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애국자, 도덕주의자, 신부로서 그가 그 시대의 정치적인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한 뒤 얻은 결론들을 서술해 나간 그리스도교적인 정치 도덕의 개요라고 할 수 있다.
〔평 가〕 폴란드인들은 평생을 바쳐 조국과 종교의 분열을 막고자 노력했던 그를 폴란드의 보쉬에(J.B. Bossuet, 1627~1704)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열정적인 노력들을 담은 그의 저서들은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폴란드의 애국자들에게 값진 교훈을 주는 고전으로 읽혀지고 있다. (→ 폴란드)
※ 참고문헌 A. Rayez, 《DTC》 28, pp. 2239~2245/ T.F. Domaradzki,《NCE》 13, p. 275. 〔邊琪燦〕
스카르가, 피오트르 (1536~1612)
Skarga, Pio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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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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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트르 스카르가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