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 개념
Ⅱ . 스콜라 신학
Ⅲ . 스콜라 철학의 학문적 배경과 특징
Ⅳ . 스콜라 철학의 발전 과정
Ⅴ . 교회의 지지와 스콜라학 연구의 현황과 발전
중세 시대의 여러 학교들(scholae)에서 형성된 철학적 · 신학적 학설을 지칭하는 용어. 스콜라학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철학 사상에 근거한 고대 그리스 사상을 사상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데에 이용하여 근대에 전해 준 체계적인 가톨릭철학 · 신학이다.
Ⅰ . 개념 〔용어 및 개념〕 학자들은 중세 철학의 시기를 교부 시대로부터 근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약 1,500년 간으로 넓게 잡는다. 여기서 중세 철학과 스콜라학을 구분하는 경우, 스콜라학의 시기는 보통 9~15세기로 한정되나 이 둘을 동일시하는 학자들도 많다. 사실 스콜라학이라는 용어는 엄밀히 말해서 사상적 시대 구분을 표시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고 형식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스콜라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중세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고대 후기의 프로클로스(Pro-clos, 410~485)나 바로크 시대의 스콜라학도 그러하였다. 또한 스콜라학은 단순히 중세 신학에서만 사용된 방법이 아니라, 중세의 모든 학문들에서 사용된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에서의 스콜라학은 중세의 학문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스콜라학이라는 용어는 일상사와 공무(公務)로부터 벗어나 학문에 전심하는 이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스콜라스티코스'(σχολαστικός)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단어는 중세에 들어와 학교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강사를 지칭하였는데, 이런 의미에서 스콜라학은 문제를 다루는 여러 가지 방식 중에서 전형적으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이 단어는 중세의 문헌 자료에서는 아주 드물게 발견되고, 오히려 중세 철학과 신학에 대한 비판가들이 이 용어를 널리 사용하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따라서 이 개념에는 다소 궤변론적 · 비역사적 · 형식주의적인 부정적인상이 남아 있다.
스콜라 학자들의 학문 연구는 신앙과 결부되어 놀랄만한 성과를 이루었고, 이 성과는 인류 문화의 가장 중요한 보고(寶庫) 중 하나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우주를 초월하는 창조주로서의 신(神), 인간 영혼의 불사불멸성, 자유, 아리스토텔레스의 유(有)의 가능태 · 현실태론, 실체와 우유론, 질료와 형상론 등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었다. 한편 중세기 전체를 통해 어디서나 공통적인 학문 언어로 라틴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그 당시 국경을 초월하여 모든 지역에서 학생들과 교수들이 모여 학문을 깊이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더욱이 권위를 인정받는 원자료들이 동일한 점, 토론 형태가 유사한 점 등은 더욱 좋은 연구 여건을 형성해 주었다.
〔다양성〕 학문 연구를 위한 수단이 고대와 근대보다 중세에 훨씬 더 일치되어 있었지만, 스콜라학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중세의 사고 형태가 전적으로 획일화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옥스퍼드 대학에서 논리학과 수학, 파리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이 발전을 이룬것처럼 중세의 여러 대학에서는 서로 다른 학문들이 중점적으로 연구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대학 내에서도 관심의 방향이 자주 바뀌었다. 물론 신학은 여러 학문분야로 분리되지 않은 채 통합된 형태로 연구되고 있었지만, 그 방법은 공리화(公理化)시키려는 시도로부터 구세사적인 방법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철학 역시 비록 대부분의 형이상학이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존하고 있었을지라도, 매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더욱이 윤리학과 심리학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학문 경향은 더 다양하였다. 사실 스콜라학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한계를 넘어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Ⅱ . 스콜라 신학 〔구 분〕 스콜라학은 스콜라 철학과 신학으로 나누어지지만, 이 두 분야는 뒤섞여 쓰여지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이 둘을 확연하게 구분하여 논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을 굳이 구별해 본다면 인간 지성으로 계시된 진리를 이해하려는 신학, 특히 교의 신학을 스콜라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신학은 하느님의 계시와 인간의 이성 능력에 근거하여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 신학은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는 데 스콜라 철학의 방법을 이용하며 철학적 원리들에 근거하여 신학의 소재들을 체계화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이런 신학의 내용과 의미들을 개진하고 관계들을 끌어내며 신학적 결론들을 이끌어 내어 교회의 가르침에 의한 진리들을 옹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노주의(Augstinianismus)의 신비 사상도 계속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스콜라 신학의 가치는 신앙의 소재들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는 종합에서 드러난다.
〔약 사〕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아우구스티노 주의의 주장을 따라서 스콜라 신학을 창시한 사람은 안셀모(Anselmus Cantuariensis, 1033/1034~1109)였고, 그 방법을 체계화한 사람은 아벨라르도(P. Abaelardus, 1079~1142)였다. 그리고 베드로 롬바르두스(Petus Lombardus, 1095~1160)는 교부들의 학설과 동 시대의 학문적 견해들을 선별 수집하여 스콜라 신학의 학문적 경향을 조절하였다. 그의 《명제집》(Sententiarum Libri)은 독창성이나 사변적 능력에서 대단히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할레의 알렉산더(Alexander Halensis, 1185~1245)가 교과서로 사용한 이후16세기 말까지 성서와 함께 대학에서 기본 자료로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이 아라비아 철학자들에 의해 도입되고, 이에 도움을 받아 수도회들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13세기 들어 스콜라 신학은 보다 발전되었다. 프란치스코회에서는 할레의 알렉산더와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7?~1274) 등이 스콜라 신학의 정의(情意)적인 요인을 부각시켰고, 반면에 도미니코회에서는 알베르토(Magnus Albertus, 1200~1280)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가 스콜라 신학의 지성적인 요인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스코투스(Joannes DunsScotus, 1266~1308)를 중심으로 후기 프란치스코회 학파들은 스콜라학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의지의 우위를 강조하였다. 15~16세기에 스콜라 신학의 조락(凋落)과 부흥이 있은 후, 가예타노(Cajetanus)라고 하는 토마스 데 비오(Thomas de Vio, 1469~1534), 페라라 사람(Ferrarensis) 실베스트리(Francsco Silvestri, 1474~1528) 등에 의해 새로운 황금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후 도미니코 학파에 의해 절정을 이루었는데, 소토(D. de Soto, 1494~1560), 카노(M. Cano, 1509~1560), 바녜스(D. Báñez, 1528~1604), 성 토마의 요한(Joan-nes a Sto Thoma, 1589~1644)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예수회 회원들 중에는 몰리나(L. de Molina, 1536~1600), 바스케스(G. Vázquz, 1549~1604), 수아레스(F. Suárez, 1548~1617) 등이 유명하였다. 그 후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와 교황 레오 13세(1878~1903)에 의하여 스콜라 신학에 대한 새로운 자극이 주어졌다. 현대에 와서는 교황 비오 11세(1922~1939)를 비롯한 여러 교황들의 교서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물론, 1992년 3월 25일에 발표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현대의 사제 양성>(Pastores dabo vobis)과 1998년 9월 14일에 발표된 <신앙과 이성>(Fides etRatio)에서도 스콜라 철학과 신학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Ⅲ . 스콜라 철학의 학문적 배경과 특징
〔학문적 배경〕 철학의 구분 : 철학과 신학이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고 혼합되어 있던 교부 시대 철학을 이어받은 스콜라 철학은 점차 신학에서 분리되어 철학 고유의 방법을 갖춘 독립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그렇지만 스콜라 철학을 연구하던 대부분의 학자들은 철학자이자 동시에 신학자였고, 이들은 신학 연구의 기초인 성서를 교부들의 저술과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해석하고자 하였다.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에게 특별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던 스콜라 학자들은, 성서를 연구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처음에는 일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저서들을 이용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행업은 질서 지워져 있기 때문에 신경(信經)은 그 질서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점차로 신학을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완만한 체계화의 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논리학' 을 수용함으로써 급속하게 발전되었고, 이 발전 속에서 철학이 독립적으로 발전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 스콜라 철학의 발전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는, 비록 본래적인 의미에서 동인(動因)은 아닐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의 재발견이었다. 12세기까지 논리학자로만 알려져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전체가 번역 · 소개됨으로써 중세에 와서는 완성된 체계를 갖춘 철학이 형성되었다. 이 번역은 중세인들로 하여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때까지 주로 플라톤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학문적인 경향을 새로운 학풍으로 변화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이성과 경험과 자연의 원리들에만 근거하고 있고, 이것들을 매우 풍부하게 현상과 사태에 적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의 원리들은 그의 《분석론 후편》(Analytica hystera)을 통하여 소개되었다. 이러한 철학의 영향을 받은 신학은, 아우구스티노를 따르는 신학 전통에서는 명확하지 못하였던 신앙과 이성의 방법론적인 분리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외부 문화의 도입 : 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다른 문화의 학문적인 문헌 자료들을 받아들이는 현상도 뚜렷이 나타났다. 즉, 이슬람 문화권의 다양한 주석서들, 유대교 자체를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마이모니데스(M. Maimonides, 1135~1204)와 같은 사상가의 작품들, 서유럽의 전통에는 다소 낯선 요소들을 지닌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Dionysius Areopagita) 작품등이 소개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학문적인 지평이 확장된 것은 새로운 수도회의 선교 활동 때문이기도 하였다.
신학자들은 인문학부의 교수들과 같이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당연하게 이슬람 문화권의 작품들, 특히 아비첸나(Avicenna, 980~1037)와 주석가 아베로에스(Averroёs,1126~1198)에게서 유래된 주석서와 저서들을 이용하였다. 이 책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훌륭한 보조 수단이었지만, 일부 주제에서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합치될 수 없는 점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성의 역할 : 중세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에 따른 12세기의 강력한 이성화 단계를 거쳐 발전되었다. 이 단계를 통해 인본주의적이고 문학적인 흥미와 이에 따라 전통적으로 규정된 세상에 대한 해석은 밀려나게 되는데, 직접적으로 성서를 가르치는 자리에 교과서적으로 신학의 명제들을 설명하는 방식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이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베드로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이다.
대학의 등장 : 스콜라 철학이 번창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여러 대학의 출현에 있었다. 중세 초기의 교육 기관은 왕실의 궁정 소속 학교와 수도원 소속 학교 그리고 주교좌 소속 학교 등이었고, 교수들은 모두 성직자들이었다. 그런데 13세기 초부터 파리나 옥스퍼드 등지의 도시에 대학이 들어섰다. 이러한 도시에서 배우는 학생들과 가르치는 교수들로 구성된 단체를 지칭하던 '대학' 은 거의 독립적이어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 단체였으며, 교회와 국가에 대해서 특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대학이야말로 중세 학문의 화신이었고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존속하고 있는 기관이다. 현대의 많은 철학사가들은 스콜라 철학을 그리스의 고전 철학, 근대 독일 철학의 시대와 함께 사상사의 최고봉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높은 학문적인 발전은 대학의 새로운 등장과 더불어서 새로 설립된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 같은 탁발 수도회에서 강의를 맡으면서 더욱 촉진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전체에서 대학들이 경쟁적으로 발전하게된 것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적어도 짧은 기간 동안 당대의 가장 훌륭한 학자들이 파리 대학의 신학부에서 가르쳤는데, 이와 같은 훌륭한 인재의 집중 현상은 스콜라 철학과 신학이 사상사적으로 지니고 있는 강점이었다.
〔특징과 방법〕 스콜라 철학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상이하게 평가되는 방법론에 관한 지식이다. 그라프만(M. Grabmann, 1875~1949)은 신앙 이론의 조직적인 묘사를 강조했지만, 불프(M. de Wulf, 1867~1947)는 이론적인 종합에 중점을 두었다. 다른 학자들은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는 점을 지적하였다. 가이어(B. Geyer,1880~1974)는 공통적인 교과 내용을 지적하였고, 라이크(L.M. de Rijk)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Organon)과 '용어론자들의 논리학' 에서 추출해 낸 개념 · 구분 ·정의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스콜라 철학의 고유성을 찾았다. 이와 같은 다양한 평가를 고려하면서 스콜라 철학의 방법 중 특징적인 것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객관성의 추구와 논리의 예리성 : 스콜라 철학의 특징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객관성의 추구와 논리의 예리함이다. 물론 스콜라 학자들도 인식 능력을 탐구하였고 인식 주체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객관적인 사물에 대해서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전통적인 일곱자유 학과(문법학 · 수사학 · 논리학의 3학과와 산술학 · 기하학 · 천문학 · 음악학의 4학과)에 뿌리를 둔 인문학부에서는 철저한 논리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상위 학문(신학 · 의학 · 법학)을 공부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던 이 교육은 토론의 정확성을 높이고 용어들을 세련되게 구분함으로써, 서양 철학의 학술적 용어들의 기초를 놓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논리적 · 학문적인 방법 : 중세의 전성기에 발전된 논리적 · 학문적인 방법은 모든 분야에서 해당 학문의 본성이 규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왜냐하면 방법과 결론의 확실성이 여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 역시 원자료를 주석하기 이전에 소단위로 분할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세분된 요소에까지 이르도록 하여 조직적인 묘사를 가능하게 하였고, 그래서 주요 개념의 정의(定義)에서 출발하여 논증 과정이 세밀하게 확인되도록 하였다. 중세의 스콜라 학자들은 객관성을 중시하면서도 자연 관찰이나 실험으로부터가 아니라 원자료(성서 · 아우구스티노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의 분석으로부터 출발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내적인 상관성의 문제만에 머문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원자료를 넘어서는 문제로 나아갔다. 이 과정 속에서 그들은 권위 있는 저서들을 통하여 전수된 지식에 종속되어 있었다. 각 학문마다 대표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있던 원천 자료들, 즉 신학에서는 성서와 베드로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수사학에서는 치체로(M.T. Cicero, 기원전 106~43) , 문법학에서는 도나투스(Donatus, 270~355), 논리학 및 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보에시우스(A.M.T.S. Boetius, 470/475?~524)의 권위서들이 주로 주석되었다.
이성과 권위 : 권위 있는 원자료에 대한 존경은 진리판단의 또 다른 결정 기준인 이성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성은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아무런 제한 없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즉 계시와 신앙에 관한 학문인 신학에서는 이성의 가능성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보았다. 신학은 단순히 이성의 추론 결과들만을 모아 놓은 것은 아니며, 신학의 주제인 신(神)은 인간적인 인식 가능성을 무한하게 초월하고 있다. 따라서 신학에서는 신적인 권위와 인간적인 권위를 구분함으로써 인간적인 권위가 계속해서 상대화되도록 하였다. 하지만 진리가 종속되어 있는 권위 있는 원자료도 항상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성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학문에서 이성에 대한 의존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저자들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이성이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반적인 원리 : 스콜라 학자들은 모든 지식에서 통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원리가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였다. 어떤 논리나 주장은 일반적인 원리나 이와 유사하게 인정받는 명제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증명이 되는데, 신학에서는 이성적인 논증의 적용 범위에 관해서 무척 신중하게 논의되었다. 또한 완벽하게 이성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신앙의 내용들이 유비(類比)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지, 아니면 단지 내적인 모순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밝혀 낼 수 있는 정도인지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결국 이것은 스콜라 철학자들로 하여금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계속해서 반성하게 한 문제였다.
수업 방식 : 권위 있는 원자료들에 의존하는 수업은 강의와 질문 및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강의는 권위있는 원자료의 한 절을 큰소리로 읽고, 그 절을 작은 문단들로 분해하여 자료 전체의 골격을 설명한 후에, 각 문단을 상세히 해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특별히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실제의 토론 사례나 가상적 토론상황을 설정하여 논의함으로써 교부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질문' 방식이 널리 사용되었다. 이 질문은 우선 주석 옆의 여백에 기록되는 형태로 시작되었지만, 곧 독립적인 '토론'으로 발전하였다. 토론은 대학 교과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부분으로, 강의보다 횟수는 적었을지라도 그 중요성 면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정규 토론에서는 교수가 공적으로 토론될 내용을 미리 제시하였다. 일반적으로 토론은 이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첫날은 미리 선발된 '학사'가 청중으로부터 제기된 반론들에 대해 자기 교수가 제시한 항목들의 순서에 따라 대답하여야 했다. 다음날 교수는 찬반의 모든 논거들을 검토해 본 다음, 문제 전체에 대한 자기 자신의 '해결책' 또는 결론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토론은 연중 내내, 가능한 한 매우 빈번하게, 아마도 매주 행해졌던 것 같다. 반면에 주제의 설정이 임의적이고 자유로웠던 자유 토론은 대개 일 년에 두 번 정도 행해졌을 뿐이다. 이러한 토론은 개별적인 문제들에 대한 학생의 이해력, 논증의 능력, 반론을 논파하는 능력을 길러 주기 위해서 시도되었다.
저술 방식 : 이와 같은 수업 형태에서 스콜라적 저작 방식이 발생하였다. 즉 숱한 강의에서 수많은 주석서가 생겨난 것이다. 주석은 '개념 주석'과 '의역 주석'의 형태로 시작되었는데 이 방식을 통해서 텍스트의 구조가 더욱 명확해졌고, 특히 본격적인 주석이 발달되면서 사태에 대한 질문들을 설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콜라 학자들은 원자료들의 내적인 구조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원자료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해석되었고, 때로는 어떤 원자료가 단지 사태에 관한 질문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취해질 정도로 본문과는 독립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런 형태는 1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명제집》에 관한 신학 강의에서도 기본 자료의 내용을 아주 다양하게 이용하는 형태로 변경되었다.
특징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스콜라 철학의 저술이 학교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다양한 주석서들은 때때로 교수 자신에 의해서 쓰여졌거나 학생들이 작성한 강의 노트를 교수가 검토한 것이었다. 어려운 원자료들은 전체 작품을 배경으로 또는 저자의 의도에 따라 해석되었다. 라틴어의 주석 언어가 13세기에 발전 되었는데, 그 특징은 비유적인 문구들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토론 문제집 : 토론에서는 정규 토론 문제집과 자유토론 문제집이 생겨났다. 스콜라 철학의 특별한 서술 형태인 이 문제집들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 찬 · 반의 논증들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러한 논박을 통해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대답하는 과정에서는 자주 질문의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도는, 언뜻 보아 모순되어 보이는, 권위 있는 원자료들 사이의 일치를 찾는 해석 과정과 관련해서 발달하였다. 이를 토대로 스콜라 철학의 토론이 얼마나 강하게 의미론적이고 논리학적인 관점에 의해 규정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토론 문제집은 생동감이 넘치는 대학 내의 토론에 기초하고 있지만, 출판된 문제집이 실제로 벌어졌던 토론을 그대로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의 주석서와 토론 문제집들이 종합되어 '대전'(大全, summa)들로 발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이다.
Ⅳ . 스콜라 철학의 발전 과정
스콜라 철학의 기초는 보에시우스를 거쳐 후에 신논리학에 의해서 전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이론이다. 보에시우스는 번역 · 주석 · 자신의 신학적 논고들에서 중세 초기를 위한 학문적인 작업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초 기〕 캔터베리의 안셀모 : 안셀모의 작품이 전형적으로 스콜라 철학의 방법과 일치하지는 않을지라도 신앙의 내용을 이성적으로 파악하려는 그의 시도는 위에서 언급한 이성화의 경향에 속한다. 그의 육화에 관한 논고가 방법론적으로 성서의 권위를 배제하고 이루어진 것처럼, 나중에서야 '존재론적'이라고 불리게 된 그의 신 존재 증명도 모든 종교적 · 우주론적인 확신으로부터 추상하고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신을 '사람이 그것보다 더 커다란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존재' 와 동일시함으로써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오류로 규정하였다. 이처럼 안셀모는 논증하는 신학을 발전시켰고, 아우구스티노의 저작으로부터 스콜라 철학의 전개를 위해 필요한 풍부한 사상을 이끌어 내었다. 따라서 그는 아우구스티노에서 정점에 달하는 교부 철학과 13세기에 체계적으로 완성되는 스콜라 철학을 매개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보편 논쟁 : 스콜라 철학의 초기에 가장 활발히 토론되었던 것은 보편의 문제였다. 즉 이것은 보편 개념 특히종(種)과 유(類)의 개념이 어떤 존재를 갖느냐, 이런 개념들이 개체에 대하여 갖는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질문과 관련해서 보편이 개체에 앞서 스스로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는 실재론과, 오히려 개체가 실재이며 보편은 단지 음성 또는 이름으로서 추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반실재론 내지 명목론이 대립하였다. 이 두 견해에 대해서 아벨라르도가 중간 위치를 견지하며 보편 개념의 실재성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온건한 실재론을 내놓음으로써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아벨라르도 : 중세의 가장 예리한 사상가 가운데 하나인 아벨라르도는 더 나아가 신앙의 가르침에 관해 조직적인 체계화를 계획하였다. 아벨라르도는 이미 법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논증 '그렇다와 아니다' (Sic et Non)를 사용함으로써 전수된 가르침들 중에서 상반된 이론들이 지니고 있던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의 이런 방법으로 '질문' 이 발전되었는데, 그 일차적인 목적은 변증론(논리학)의 도구와 개념 분석을 통해서 해당 자료의 의미를 확정 짓는 데에 있었다.
〔전성기〕 중세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대략 1250~1350년 사이이다. 이 시기에 매우 다양한 철학적 · 신학적인 견해들이 많이 발전되었는데, 그 직접적인 원인은 위에서 살펴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대학설립, 수도회의 학문적 활동 등을 들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물리학 · 자연 철학 · 동력학· 천문학 등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연구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중세 초기에는 보나벤투라의 상징주의처럼 주로 하느님 실재의 상징적인 측면에서 자연을 관찰하였다면, 이 당시에는 주로 개별 현상이 각각의 특수한 원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었다. 실재의 고유 권한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통해서 근본적인 모습을 지니게 되었지만, 창조 신학적으로도 그 근거가 확보되었다. 고대 사상의 모든 탁월한 변형들 중에서 결정적인 요소인 창조 사상은 마지막 이해의 근거로서의 '자연'조차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느님은 더 이상 제1 원동자로서뿐만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causa essendi, 토마스 아퀴나스)로서, 또 단순한 작용자가 아니라 '창조자'(보나벤투라)로서 생각되었다.
아우구스티노주의 :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콜라 철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지만, 모든 학자들이 그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것은 아니었다. 1210년,1215년, 1231년, 1245년, 1263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반포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부 저서들에 대한 강의 금지령은 제외하더라도 전통적인 노선을 걷는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일치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위험을 발견하고 비판하였다. 때때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안에서 위험스럽게 느껴지는 이질화의 위험에 직면해서는, 특히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오류가 없는 신학의 보증인으로 간주된 아우구스티노주의에 의식적으로 의존하였다. 개념적으로 형성된 아우구스티노주의(보나벤투라 학파 · 프란치스코회 학파 · 앙리주의자들 등)는 이 이질화에 대한 우려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아우구스티노의 사상 안에 정통적인 그리스도교 세계관이 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알베르토 :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인 알베르토는 신학의 기초로서 철학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파리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공적으로 강의되지 못하던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연구하여 소개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작품을 주석함으로써 그를 서방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 : 스콜라 철학의 완성자로 인정받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스승 알베르토에게서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알베르토보다 훨씬 더 강하게 상이한 스스주의一플라톤주의 ; 아우구스티노一디오니시오 등)을 구분하였고, 이 전통들을 신학의 관심에 적합하게 생산적으로 연결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것은 근원적인 변형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방대한 저술은 절충주의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전통에 의존하고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새로운 종합을 시도한 것이었다.
토마스는 자신의 신학에서 이성이 지닌 가능성들을 이용하였지만, 삼위 일체론 · 창조론 · 그리스도론 등에서는 이성에 명확한 한계를 설정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매우 자주 인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에게는 그것을 변형시키는 힘이 있었고, 이러한 변형은 신학적인 관심에서 이루어진 수정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사상의 핵심부에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예를 들어 사물의 본질적인 규정, 그 특수한 작용과 가지성(可知性)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 즉 그 내적인 형상이 수동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 형상은 하느님의 창조적인 작용으로서 모든 유한자에게서 나타나는 존재와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토마스의 '신 존재 증명' 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를 받아들여 구체적으로 실재하고 있는 사물들로부터 자신의 사고를 출발시켰다. 그는 "실재하는 세계에서 출발하여 그 존재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 존재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신학 대전》 제1부, 둘째 질문, 제3절)고 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모든 존재 사물의 근거로서의 최고 존재 혹은 존재의 충만인 존재 자체, 자립적 존재 자체를 탐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 존재 자체에 대한 탐구를 그리스도교의 창조론과 연결시킴으로써 자신이 출발점으로 삼은 그리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넘어섰다. 즉 신은 자신의 자유로운 창조를 통해서 각 사물에게 존재를 부여한 자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 자체로서의 신은 학문적 탐구였을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의 목표였다. 모든 존재 사물의 근원을 찾는 "제1 철학 전체는 최종 목적으로서의 신인식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신의 인식은 모든 인간 인식과 작용의 최종 목적이다"(《대이교도 대전》 3권 25절). 신의 인식은 단순히 지성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포괄하는 덕행의 실현(《신학 대전》 제2부의 2)이 전제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됨으로써 우리에게 신에게 나아가는 길을 제시해 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철학과 신학의 고유한 영역을 구분하여 각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것을 단순히 나란히 배열된 연관성 없는 학문으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신학 내에서 완성시키는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그의 방향성은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아퀴나스의 이와 같은 뛰어난 종합에도 불구하고, 스콜라 철학에서는 매우 다양한 학파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발전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토마스가 그 위험성을 간파해서 대적했던 사상은 아베로에스주의였다.
아베로에스주의 : 시제(Siger de Brabant, 1235~1281/1284?)를 그 대표로 하는 아베로에스주의는 신학에서 독립적인 순수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극단적 혹은 이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세계의 영원성, 이중 진리설(철학과 신학에 있어서의 상반된 진리 인정), 인간 지성의 단일성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시도 속에서 파리 대학의 인문학부에서는 일련의 자연적이고 결정론적인 명제들을 주장하였고, 신앙은 모든 형태의 이성적인 합법화를 피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다치아의 보에시우스)
영혼의 위치에 관한 논쟁 : 아우구스티노주의와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긴장 관계 속에서 인간 영혼의 위치에 관한 인간학적인 논쟁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영혼은 실체적 형상인가 아니면 육체와 구분되는 형상 실재성인가? 실체 개념이 영혼의 불멸성을 이해하기 쉽게 해줄 수 있지만, 영혼의 개별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두 가지를 그 자체로 실체적인 형상 안에서 함께 생각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형상은 유일한 것으로서 인간적인 육체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 자체를 그러한 것으로서 구성하는 것이다.
스코투스 : 신이나 피조물에 대해 서술하는 존재 개념이 근원적인 일의성(一義性)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 스코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이성 비판에 역사적인 측면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그의 전후에 활동한 많은 프란치스코회 회원이 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와 맞서려고 하지는 않았다. 보편은정신 안에만 있고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사물 안에는 본성에서 형상적으로 구별된 개체성(haec-ceitas)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구별은 인간 지성이 추상을 하기 위한 기초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의지는 지성이 선(善)이라고 인정한 것을 원한다고 본 반면에, 스코투스는 자유를 강조하기 위하여 의지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의지가 지성에 명령할 수 있다는 데서 지성에 대한 의지의 우위를 주장하였고, 의지의 타락을 지성의 잘못보다 더 나쁜 것으로 보았다.
신학과 철학의 통합 추구 : 오베르뉴의 기욤(Guillaumed'Auvergne, 1180~1249)과 오세르의 기욤(Guillaume d'Au-xerre, ?~1231)은 신앙의 가르침을 조직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알베르토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의 독자성을 옹호함으로써 신학과 철학을 명확하게 구분하고자 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베이컨(R. Bacon, 1220~1292)은 신학자들의 경험적인 학문에 대한 무지, 영적인 의미의 오용, 성서보다 《명제집》을 우선하는 것 등을 비판하면서 다른 전통적인 사조에서 받아들여진 신학과 철학의 구분을 다시 원 상태로 돌리려고 시도하였다. 다른 아우구스티노주의자들과 룰루스(R. Lullus, 1232~1315/1316)도 학문 분야들을 하나로 묶는 통합적인 입장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이상적인 지혜가 엄청난 지식의 증가를 가져온 새로운 백과사전적인 지식의 조건하에서 다시 실현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 기〕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에 이어지는 후기에 들어서서는 이전의 세기들로부터 이어받은 학설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을 가하며 수정을 시도하는 시기를 맞았다.
유명론 : 지금까지 주장되어 온 보편적 실재를 '면도날로 잘라 내듯' 제거해 낸 오컴(W. Ockham, 1287?~1347)에 의해서, 스콜라 철학 초기에 온건 실재론으로써 해결되었다고 생각되던 보편 논쟁이 새롭게 토론되며 다양한형태로 구분될 수 있는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us)의 경향이 발달하게 되었다. 보편에 대해 개체의 우위성을 강조한 오컴에게 있어서, 모든 사물은 그것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이 다른 사물의 존재와 상관없이 생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사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명론의 특징은 단순히 '비판적인' 용어나 고도의 학문적인 요구라기보다는 '분석적'이라는 데 있다. 이것은 신학과 철학에서 전수된 문장들에 대해 가하는 철저한 언어학적이고 의미론적인 분석으로써 드러났다. 논리학에 관한 전문 역사가들도 인정하듯이 이러한 관점 에서 상당수의 신학자들은 논리학적이고 의미론적인 도구를 이용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존재론적으로 이해된 하느님 개념이 도외시되었고, 신앙의 내용이나 신학적인 주장들을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극단적으로 제한되었다. 오컴은 신의 존재나 속성에 관한 것을 계시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과거에 이루어진 순수 이성적인 논증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는 모든 도덕률을 신의 순수 의지에 종속시키면서 필연적인 계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신비주의와 유사하게 유명론에 속하는 저자들은 윤리적인 선을 배타적으로 행위자의 의도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 행위의 의도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단지 윤리적인 판단의 여러 관점들 중 하나에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신비주의 : 에크하르트(Meister J. Eckhart, 1260~1328)의 신비주의는 전대의 거의 모든 대 사상가들의 핵심적인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신플라톤주의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신비주의는 존재론적인 하느님 개념의 특정한 상대화를 의미하였으며, 그의 존재에 대한 관심은 존재 일반이 아닌 '참된'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 존재가 하느님이라고 말해지지만, 이것은 보편적인 것의 특수한 것에 대한 관계로 명시되었다. 보편적인 것이 드러나는 장소 또한 보편적인 것, 즉 지성이다. 이것은 또한 외적인 경험의 중요성을 상대화시킨다. 지성은 절대자의 자기 표상이다. 이에 내적인 심리학적 경험이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형상과 질료, 표상과 원형, 작용자와 피작용자 등이 속하는 일치의 형태를 정확히 묘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 형태의 유비를 통해서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를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동시에 그것을 내면화시킨다는 것이다.
〔근 대〕 근대의 스콜라학은 16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에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에 성립된 스콜라학의 재생을 '신스콜라 철학' 이라고도 한다. 이 시기의 스콜라학의 일반적인 성격은 철학과 신학에 있어서 전통 사상과 근대 사상의 독특한 혼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과 신학에 있어 스콜라학적인 방법을 적용하기 위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 스코투스 등으로의 회귀 운동이었다. 스콜라학이 근대 사상으로 이행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문예 부흥의 인본주의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스콜라학을 변형시키려 했든지 파괴하려 했든지 간에 스콜라학을 교육받고 그로 인하여 형성된 사람들이었다.
제2의 스콜라학 : 15세기부터 17세기 후반기에 걸쳐 펼쳐진 제2의 스콜라학(secunda scholastica) 시기는 14세기의 혼란 이후 일어난 쇄신 운동의 시기였다. 스콜라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14~15세기에 강경해진 사변의 몰락을 가져온 세 가지 노선은 스코투스주의와 오컴주의와 토마스주의였다. 그러나 이 셋 중에서 토마스주의가 가장 우세하였다. 이 때문에 그 동안 줄곧 대학의 대표적 교재 구실을 해오던 베드로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으로 대치되었다. 이 세 학파에다가 1600년대 이후에 큰 영향력을 가졌던 수아레스주의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파들은 17세기에 스페인 등지에서 큰 영향을 미치다가 차차 약화되었고, 아우구스티노주의 학파는 교회 내외의 스콜라학파와 비스콜라학파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도미니코회 학파 : 토마스주의를 추종하던 대표적인 도미니코회 회원들은 카프레올루스(J. Capreolus, 1380~1444), 토마스 데 비오, 실베스트리와 성 토마의 요한, 비토리아(F. de Vitoria, 1483~1546) 등이었다. 이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호교론적인 이해보다는 적극적인 이해를 탐구하는 고전적 주해의 전통을 성립시켰으며, 이들의 토마스 아퀴나스 주해는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비토리아는 살라망카 대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신학 대전》을 중심 교재로 사용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토마스 데 비오와 실베스트리는 주로 형이상학을 심화시켰고, 비토리아는 법과 정치 문제에 관심이 커 특히 국제법을 발전시켰다. 원전 연구에 뛰어났던 비토리아의 계승자 카노는 신학과 철학의 개혁안을 내놓았는데, 도미니코회 회원인 메디나(B. deMedina, 1527~1580)와 바네스 등이 그의 제자들이었다.
프란치스코회 학파 : 이 시기의 프란치스코회 학자들은 도미니코회나 아우구스티노주의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선임자들의 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진력하였다. 즉 보나벤투라와 스코투스 그리고 오컴 등의 사상에서 자신들의 사변을 이끌어 갈 원천을 찾았던 것이다. 프란치스코회는 사고의 폭에 있어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이나 아우구스티노의 사상도 배제하지 않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나 스코투스의 사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프란치스코회 전통의 권위 있는 해석들은 16세기 초오피엘리(M. O' Fihely, 1460~1513)와 리체투스(F. Lychetus,+1520)의 저서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트롬베타(A. Trombetta, 1436~1517)와 카푸친회의 신학자 트리고소(P. Trigoso, 1533~1593) 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다. 17세기에는 스코투스 해석을 이용한 카벨루스(H. Cavellus,1571~1626), 벨기에인인 보스코(J. Bosco, 1613~1684) 등이 있었고, 이탈리아인인 브란카티(L. Brancati, 1612~1693),폴란드인인 로크마리우스(A. Rochmarius, +1626) 그리고 페루의 리마에서 가르친 브리체로(A. Bricero, +1667) 등은 17세기에 스코투스주의를 세계적으로 전파한 전형적인 인물들이었다. 시켐(W. van Sichem, +1691)은 단순 명백한 철학 교재를 저술하였는데 그것은 스코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의 사상을 조화시킨 것이었다. 또한 페르키우스(M. Ferchius, 1583~1669)와 본템피(G. Bontempi, 1612~1672)는 대표적인 보나벤투라 저서의 주석가들이었다. 소르본 대학의 프라센(C. Frassen, 1620~1711)은 스코투스 신학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단순한 문체와 명료한 방법과 치밀한 사상으로 《철학자 스코투스》(Scotus academicus)와 《철학 교재》(Cursus philosophiae)등을 저술하였다.
아우구스티노회 학파 : 16세기 초에 아우구스티노회는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에 근거한 초기 스콜라학의 전통을 잇는 데 전력하였다. 아우구스티노회는 이미 1287년에 열린 피렌체 총회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자였던 질레스(Gilless Romanus, 1243/1247~1316)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옹호하였으며, 그러한 입장을 통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새롭게 종합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종합은 아우구스티노주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난제들을 해소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우구스티노주의 철학과 신학은 18세기에 번창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살라망카, 코임브라, 알카나, 파두아, 피사,나폴리, 옥스퍼드, 파리, 빈, 프라하, 밖르츠부르크, 에어푸르트, 하이델베르크 대학 등과 다른 여러 연구 기관을 통하여 아우구스티노의 철학과 신학이 전수되었다.
아르놀디(B. Arnoldi, 1465~1532)는 같이 수도 생활을 하던루터(M. Luther, 1483~1546)에게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을 가르쳤으나, 후에는 루터 신학의 반대자가 되었다. 이외에도 알텐슈타이크(J. Altenstaig, 1480~1525) , 가바르디(F.N. Gavardi, 1640~1715), , 본헤르바(R. Bonherba, +1681)등이 대표적인 아우구스티노주의자였다.
예수회 학파 : 예수회는 근대 스콜라학의 발전에 큰 몫을 담당하였는데, 특히 스페인에서 스콜라학을 꽃피우는 데 도미니코회와 함께 크게 공헌하였다. 예수회를 창시한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는 개인적으로나 공식 문헌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토 마스 아퀴나스의 학설에 따른 철학과 신학을 교육 지침으로 삼았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주어진 지침이 도미니코회에서처럼 엄격히 지켜지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사상의 자유가 허용됨으로 인해 예수회 고유의 철학과 신학이 탄생되도록 하였으며, 한편으로 이러한 학문적인 경향은 절충주의 혹은 근대 철학에 지나치게 치우친 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초기의 많은 회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수용하였다.
최초의 예수회 추기경이었던 톨레도의 프란치스코(Francisco de Toledo, 1532~1596)는 예수회에서는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그리고 벨라르미노(R.F.R.Bellarminus, 1542~1621)와 같은 시대에 로마의 예수회 대학에서 강의를 주도한 사람은 스페인 예수회 회원인 바스케스와 수아레스였는데, 이들에게서 사사한 밀라노 출신의 알라만니(C. Alamani, 1559~1634)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설에 근거한 《전(全) 철학과 천사적 박사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전》(Summa totius philosophiae e divini Thomae Aquinatis doctrina)을 저술하였다. 발렌시아의 그레고리오(Gregorius Valencia, 1549~1603), 루고(J. de Lugo, 1583~1660), 레시우스(L. Lessius, 1554~1623) 등도 한동안 로마의 예수회 대학에서 스콜라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일부 회원들은 형이상학적이고 토마스주의적인 종합을 거부하였고, 또 일부 회원들은 데카르트(R.Descartes, 1596~1650)적인 방향의 사유를 취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볼프(C. Wolff, 1679~1754)의 방법론과 형식을 받아들이거나 콩디야크(É.B. de Condillac, 1715~1780)와 로크(J. Locke, 1632~1704)의 감각주의에서 영향을 받아 사유의 변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유로 복귀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한 예수회 회원들도 적지 않았다.
트리엔트 공의회 : 이 공의회는 성서학 · 교부학 · 교회사 · 교의 신학 · 철학 등 교회의 학문 전반에 걸쳐 전적으로 스콜라학을 교회의 모든 교육 기관에서 가르치도록 하였으며, 특히 신학과 철학에 있어서는 이것이 더욱 강조되었다.
〔현대의 부흥〕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스콜라학은 곧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는데, 그 까닭은 훌륭한 학자들이 배출되지 않아 주목할 만큼 깊은 사변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도미니코회 회원들에게는 토마스적 사유 종합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예수회 회원들에게는 그런 종합이 계속 증폭되어 갔다.
이 시기에는 많은 철학 교재들이 나왔는데, 이런 교재들은 수아레스의 철학 교재를 본딴 것들이었으며, 철학은 전(全) 영역에 걸쳐 신학과 구별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근대 철학과 새로운 경험 과학들이 발전하였으나, 스콜라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시대 철학과 접촉하지 않았다. 형이상학의 망각과 본래적이며 올바른 지침의 계속적인 결여는 스콜라 철학의 제2 쇠퇴기를 맞게 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17세기 말에서 스콜라 철학의 부흥기를 맞은 19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랐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전통 철학을 합리주의적이거나 감각주의적인 사고에 다양하게 혼합시키려는 시도도 있었고, 형이상학적 사고보다는 과학적 관심을 우위에 놓으려는 경향도 있었다.
19세기 초부터는 프랑스 · 이탈리아 · 독일 등에서 칸트주의와 관념주의와 관련시켜 가톨릭 신학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라므네(H.F.R. de Lamennais, 1782~1854) , 보탱(L.-E.-M. Bautain, 1796~1867) , 조베르티(V. Gioberti, 1801~1852), 로스미니-세르바티(A. Rosmini-Serbati, 1797~1855), 헤르메스(G. Her-mes, 1775~1831), 귄터(A. Guenther, 1783~1863)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교회에서 인정하지 않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도미니코회 회원이며 토마스 대학의 교수였던 로셀리(S.M. Roselli, ?~1784)가 1777년 에 출간한 여섯 권의 《철학 대전》(Summa philosophica)은, 이탈리아 스페인 · 프랑스 등에서 토마스주의를 부흥시키는 데 지침서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탈리아 : 당시 이탈리아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철학은 로스미니-세르바티와 조베르티에 의해 확산된 본체론(ontologismus)이었다. 이탈리아에서 토마스주의 복구 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했던 부제티(V. Buzzetti, 1777~1824)는 로크의 감각주의를 버리고 토마스주의를 바탕으로 철학 사상을 개진하였으며, 세라피노 소르디(SerafinoSordi, 1793~1865)와 도메니코 소르디(Domenico Sordi,1790~1880)를 가르쳐 토마스주의로 학문적인 전향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특히 훗날 예수회 회원이 된 동생 세라피노는 토마스주의의 재생에 전력을 기울였고, 리베라토레(M. Liberatore, 1810~1892) 역시 《가톨릭 문화》(CivitàCattolica)지와 제휴하여 토마스주의의 복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리베라토레와 친밀한 관계에 있던 코르놀디(G. Cornoldi, 1822~1892)는 토마스 철학의 교재를 저술하였으며, 로스미니주의 · 본체론 · 범신론 · 과학주의 등을 공격하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탈리아에서 토마스주의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사람은 산세베리노(G. Sanseverino, 1811~1865)였다. 그는 철학에 있어 데카르트의 추종자였으나 로셀리의 《철학 대전》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 철학》(Philosophia Chris-tiana)을 저술하였다. 그는 흄(D. Hume, 1711~1776), 칸트(I. Kant, 1724~1804), 셸링(F.W.J. von Schelling, 1775~1854),라므네, 조베르티 등을 논박하였고, 토마스주의를 전적으로 따랐다. 1850~1860년 사이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이 파르마 · 볼로냐 · 파리 등에서 출간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집》(Opera omnia)도 피아카도리(Fiaccadori, 1852~1873)에 의해 출간되었다.
로마에서 토마스주의가 부흥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한 곳은 《신학 대전》을 교재로 사용한 도미니코회의 성 토마스 대학이었다. 또 도미니코회 회원인 칠리아라(T.Zigliara, 1833~1893)는 《철학 대전》을 저술하여 큰 영향을 미쳤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토마스주의를 부흥시킨 칠리아라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며, 레오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글을 발표하게 하였다.
스페인 : 스페인에서는 발메스(J.L. Balmes, 1810~1848)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리스도교 철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고, 살라망카 대학에서는 도미니코회 회원인 파스쿠알(Pascual, +1816)과 다른 도미니코회 회원들에 의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크게 부흥되었다. 마닐라에서 철학 교수로 활동하던 도미니코회의 세페리노 곤살레스이 디아스 투논(Ceferino González y Díaz Tuñón, 1831~1894)은 토마스주의의 부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저서들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토마스 주의의 모범 교재로 전세계에서 사용되었다.
프랑스 : 프랑스에서는 샤토브리앙(F.R. de Chateaub-riand, 1768~1848) , 메스트르(J.M. de Maistre, 1754~1821), 보날드(L.G.A.V. de Bonald, 1754~1840), 라므네 등이 그 당시 널리 보급되어 있던 합리주의와 논쟁하였다. 당시 가톨릭 신학교들에서는 절충적 데카르트주의를 가르쳤다. 프랑스에서는 1850년에 라코르데르(H.D. Lacordaire, 1802~1861)에 의해 도미니코회가 재설립되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토마스주의의 부흥이 도미니코회 외에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 님(Nimes) 교구의 신학교 교수 루-라베르뉴(P. Rouz-Lavergne, 1802~1874)는 토마스주의에 근거한 두 권의 철학 교재를 저술하였다. 프랑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연구를 자극하고 그리스도교 철학의재생 운동을 시도한 대표적인 사람은 중용적 전통주의자 벤투라(Gioacchino Ventura di Raulica, 1792~1861)였다. 그러나 토마스주의가 부흥되는 데에 있어서 전통주의와 본체론은 많은 방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주장들은 진리의 자연적 질서와 초자연적 질서를 혼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 독일의 가톨릭 사상가들은 칸트와 헤겔(G.W.F. Hegel, 1770~1831) 등의 관념론과 가톨릭 사상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헤르메스는 초자연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칸트의 합리주의를 발전시켰다. 귄터는 스콜라 철학을 완전히 배척하고 그리스도교적 헤겔주의를 시도하였는데, 19세기 중엽까지 오스트리아와 독일 남부 대학 등에서 이러한 귄터의 그리스도교적 헤겔주의를 가르쳤으며, 이러한 사상의 경향은 이전의 사상들을 단죄했다. 이 당시 대표적인 스콜라 학자들은 글 레멘스(F.J. Clemens, 1815~1862), 베르너(K. Werner, 1821~1888), 슈퇴클(A. Stöckl, 1825~1895), 클로이트겐(J. Kleut-gen, 1811~1883), 콤머(E. Commer, 1847~1928) 등이었다. 뮌스터 대학의 교수 글레멘스는 귄터에 반대하여 스콜라학의 관점에서 철학과 신학 사상을 저술하였으며, 한때 귄터의 제자였던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교수 베르너는《성 토마스 아퀴나스》(Der hl. Thomas v. Aquin)라는 저서를 통하여 토마스주의의 초기 역사와 후기 스콜라 철학에 관한 수많은 역사적인 연구를 소개하였다. 뮌스터 대학 교수 슈퇴클은 최초의 스콜라 철학 독일어 교재인《철학 입문서》(Lehrbuch der Philosophie)와 《중세 철학사》(Geschichte der Philosophie des Mittelalters)를 저술하였다.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토마스주의자는 교황 레오 13세로부터 철학자들의 수장(首長)이라고 호칭을 받은 예수회의 클로이트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헤르메스주의와 귄터주의 및 벤투라의 전통주의를 반대하면서 토마스주의를 분명하게 고수하였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사상을 철학과 신학의 기초로 삼기를 권고한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 1879. 8. 4)를 기초한 인물이었다. 토마스주의자들의 저서들을 폭 넓게 섭렵한 모르고트(F. Morgott, 1829~1900)도 열렬한 토마스주의 옹호자였다. 1860년경에는 프란첼린(J.B. Franzelin,1816~1886), 셰벤(M.J. Scheeben, 1835~1888) 등의 저서들과 수준 높은 작품들로 말미암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스콜라학의 부흥이 고조되었다.
Ⅴ . 교회의 지지와 스콜라학 연구의 현황과 발전
〔교황들의 옹호〕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에서 토마스주의의 복구와 전파를 강력히 지시하였다. 교황 레오 13세의 많은 교서들은 토마스주의를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는데, 예컨대 <노동 헌장>(Rerum nova-rum)의 초안도 출중한 토마스주의자인 칠리아라 추기경 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교황은 1879년에 로마의 '성 토마스 연구소'(Accademia Romana di S. Tommaso d'Aquino),즉 안젤리쿰(Angelicum)을 창설하였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평서 출판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또 루뱅에 철학연구 기관인 '고등 철학 연구소'(Institut Superieur de Philo-sophie)를 창설하게 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1890년에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전세계 모든 가톨릭 대학교와 아카데미, 여타 가톨릭 학교들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 후에도 토마스주의는 여러 교황들에 의해 강력히 옹호되었다.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2)는 1917년에 제정된 교회법전에 '천사적 박사'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신학, 그리고 그의 방법을 전수하라는 규정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교황 비오 10세(1903~1914) 비오 11세(1922~1939) , 비오 12세(1939~1958)를 거쳐 교황 요한 23세(1958~1963)에 이르기까지 역대 교황들이 토마스주의의 옹호와 전수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토마스주의에 대한 연구 정신을 심화시켜 가톨릭 사상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근대와 현대 철학을 연구할 것을 종용하였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Optatam Totius)에서도 토마스주의에 의한 지적 양성을 강조하였다.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의 사제양성>에서뿐만 아니라 회칙 <신앙과 이성>을 통해서도 토마스주의에 따른 교육을 강조하였다.
〔20세기 스콜라학의 발전과 경향〕 연구 활동의 발전사 : 교황들의 지지 속에서 스콜라학은 활기 차게 부흥되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스콜라학은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 장(場)은주로 가톨릭 대학들과 연구소들이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로마의 성 토마스 대학, 그레고리오 대학, 우르바노 대학, 성 안토니오 대학, 성 안셀모 대학, 밀라노의 성심대학 등을 비롯하여 벨기에의 루뱅 대학, 스위스의 프리부르 대학, 파리의 가톨릭 대학,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 철학 대학, 워싱턴의 가톨릭 대학들, 토론토의 중세사상 연구소, 독일 대학들의 가톨릭계 신학 대학들, 그리고 마닐라의 성 토마스 대학 등 전세계의 가톨릭계 대학들과 대신학교, 철학 · 신학 연구소 등이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여타 중세 대가들의 《전집》의 비평서 출판이 활발해졌다. 1882년에 출판되기 시작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집》은 도미니코회 학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또 다른 그의 《전집》으로는 로마와 이탈리아의 토마스 아퀴나스 전문가들과 여타 지역의 전문가들이 총망라되어 1974~1980년에 편집 출판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집》이 유명하다. 그 밖에도 피렌체 근방의 과락키에는 보나벤투라와 다른 프란치스코회 학자들의 저서 출판을 위한 기관이 1887년에 설립되었다. 보나벤투라의 저서들은 1882~1902년 사이에 출판되었으며 할레의 알렉산더와 다른 프란치스코회 학자들의 저서들도 출판되었다. 또 한편 스코투스의 《전집》을 출판하기 위한 위원회가 1938년에 로마에서 설립되었다.
베네딕도회 솔렘 연합회에서는 성 토마의 요한의 《신학 교과서》(Cursus theologicus)가 1931년부터 출판에 착수하였으며, 알베르토 연구소가 1931년에 쾰른에 창설되어 알베르토의 《전집》 출판 작업이 1951년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도 가톨릭 대학 내에 중세 사상 연구소(1972) · 그리스도교 철학 연구소(1976) · 서강대학교 철학 연구소(1988) · 토마스 학회(1983) · 중세 철학 연구소(1994) · 한국 가톨릭 철학회(1999) 등이 개설되었으며, 대표적으로 정의채(鄭義采) 신부에 의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이 라틴-한글 대역본으로 1985년부터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스콜라 학자들 : 교황 레오 13세 이래 스콜라학의 중심은 로마와 루뱅이었으나,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스콜라학 연구 센터들이 세계 도처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철학 교재들이 저술되었는데 칠리아라, 우라부루(J.J. Urráburu, 1844~1904), 레머(V. Remer, +1910) 등이 저술한 교재들이 영향력이 컸으며, 예수회의 스토니허스트(Stonyhust) 시리즈는 스콜라 철학 초심자들에게 입문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레트(J.A. Gredt,1863~1940), 마리탱(J. Maritain, 1882~1973) 등의 철학자들이 성 토마의 요한의 《철학 교재》를 기초로 해서 더 나은철학 교재들을 내놓았는데, 특히 그레트의 두 권으로 된(아리스토텔레스주의-토마스주의 철학 기초》(Elementaphilosophiae Aritotelico-Thomisticae)는 1958년에 이르기까지 12판이 재판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을 가르치는 전체적인 학과정은 루뱅 대학이 뛰어났다. 이 대학에서 1882년부터 1889년까지 가르쳤던 메르시에(D.J. Mercier,1851~1926) 추기경은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람들은 드플라주(S. Deploige, 1868~1927), 불프, 니스(D. Nys, 1859~1927), 티에리(A. Thiéry,1868~1955) 등이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 근거한 '영구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의 모든 분야들을 발전시켰으며, 이렇게 해서 영구한 철학은모든 현대 학문들과 조화를 이루어 가는 등 그 영향력이 매우 컸다. 또한 루뱅 대학에서는 유명한 교수들이 계속해서 배출되었는데, 마레살(J. Maréchal, 1878~1944)은 칸트와 독일 관념론의 초월적(선험적) 철학의 조명을 받아 스콜라학의 형이상학을 재해석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선상에 있는 사상가들로서 노엘(L. Noёl, 1878~1955), 망시옹(A. Mansion, 1882~1966), 르클레르크(J. Leclercg, 1891~1971), 스텐베르겐(F. van Steenberghen, 1904~ ), 리에(G.van Riet, 1916~ ), 레이매케르(L. de Raymaeker, 1895~1979), 돈데인(A. Dondeyne, 1901~1985) 등이다. 또 로마에서는 그레고리오 대학 교수 보예(C. Boyer, 1884~1980),우르바노 대학 교수 파브로(C. Fabro, 1911~1994), 성 토마스 대학 교수 가리구-라그랑주(R. Garrigou-Lagrange, 1877~1964)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 밖에도 바이스(A.M. Weiß,1844~1925), 가르데일(A. Gardeil, 1859~1931), 세르틸랑주(A. Sertillanges, 1863~1948), 페쉬(C. Pesch, 1835~1925), 탕게리(A.A. Tanquerey, 1854~1932)와 윤리 신학계의 놀딘(H. Noldin, 1838~1922), 프류머(D. Prümmer) 등이 있었다.
아메리카에서도 수많은 토마스주의자들이 나타났는데 마리탱, 질송(É. Gilson, 1884~1978), 부르크(V.J. Bourke,1907~ ), 페지스(A.C. Pegis, 1905~1978), 오닐(C.J. O'Neil), 오웬스(J. Owens, 1908~ ), 콜린스(J.D. Collins, 1917~1985) 맥물린(E. McMullin) 등이다. 특히 미국에서 1960년대에 발간된 《새 가톨릭 대사전》(New Catholic Encyclopedia)은 큰 업적이었다.
학문 경향 : 20세기 초반에 토마스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한 것은 가능태와 현실태 문제였다. 이를 강조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노르베르트(Norbert del Prado, 1852~1918)마투시(G. Mattusi, 1852~1925), 위공(É. Hugon, 1867~1929) 만서(G.M. Manser, 1866~1950) 등이었다. 1920년대에는 토마스주의 형이상학에 있어 유비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는데, 이에는 발타사르(N. Balthasar, 1882~1959), 페니도(M.T.L. Penido, 1895~1970) , 라미레즈(S. Ramirez, 1891~1967)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가이거(L.B. Geiger), 파브로 등에 의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있어서 분유(分有)와 플라톤주의적인 요소들의 탐구가 부각되었고, 1940년대 이후에는 마리탱, 질송, 파브로 등에 의하여 토마스주의 형이상학의 존재 문제가 부각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의 철학과 관련을 가진 토마스주의자들이 등장하였는데, 로츠(J.B. Lotz, 1903~ ) 브루거(W. Brugger, 1904~ ) , 코레트(E. Coreth, 1919~ , 라너(K. Rahner, 1904~1984), 로너간(B. Lonergan, 1904~1984), 파브로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라너는 하이데거의 철학 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고, 파브로는 존재론에 있어서 하이데거의 허구성을 폭로하였다. 또한 파브로는 철저한 토마스주의자로서 현대 무신론을 존재론적으로 깊이 통찰하여 그 근본적인 오류들을 지적하였다. (→ 그리스도교 철학 ; 베드로 롬바르두스 ; 신스콜라 철학 ; 아벨라르도 ; 안셀모 ; 토마스주의)
※ 참고문헌 정의채 · 김규영, 《중세 철학사》, 도서출판 벽호, 10판, 1994/ 정의채, 《존재의 근거 문제》, 성바오로출판사, 3판, 1987/F.C. Copleston, 박영도 역, 《중세 철학사一아우구스티누스에서 스코투스까지》, 서광사, 1988/ J. Hirschberger, 강성위 역, 《서양 철학사》上(고대와 중세), 이문출판사, 1983/ F.C. Copleston, 박영도 역, 《중세철학 : 그리스도교 철학》, 이문출판사, 1988/ É. Gilson, 강영계 역,《중세 철학 입문》, 서광사, 1983/ É. Gilson, 《중세 철학사》, 현대지성사, 1997/ J.R. 와인버그, 강영계 역, 《중세 철학사》, 민음사, 1984/Thomas Aquinas, 정의채 역, 《신학 대전》 I~V, 성바오로출판사,1985~1998/ J.A. Weisheipl, 이재룡 역, 《토마스 아퀴나스 수사一생애, 작품, 사상》,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8/ 박우석, 《중세 철학의 유혹》, 철학과 현실사, 1997/ A.H. Armstrong, The Cambridge History of Later Greek and Early Medieval Philosophy, Cambridge, Cambridge Univ.Press, 1970/ J.P. Beckmann · L. Honnefelder · G. Schrimpf · G. Wieland Hg., Philosophie im Mittelalter. Entwicklungslinien und Paradigmen, Ham-burg, Feilx Meiner, 1987/ F.C. Copleston, Geschichte der Philosophie im Mittelalter, München, Beck, 1976/ J.A. Weisheipl, Scholastic Method,《NCE》 12, pp. 1145~1146/ W.H. Crilly, Scholastic Philosophy, 《NCE》 12, pp. 1146~1147/ T.C. Crowley, Contemporary Scholasticism, 《NCE》 12, pp. 1165~1174/ J.E. Gurr, Modern or Middle Scholasticism, 《NCE》 12, pp. 1158~1165/ M.A. Hotze, Scholastic Theology, 12, p. 1153/ R.Smith, 《NCE》 12, pp. 1150~1153/ L.J. Elders, Scholastische Meth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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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학
一學
〔라〕Scholastica · 〔영〕Scholas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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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신학을 창시한 캔터베리의 안셀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