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슬라오 (1030~1079)
Stanisl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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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성 스타니슬라오의 순교.
성인. 순교자. 축일은 4월 11일. 1030년 7월 26일 폴란드 슈체파노프(Szczepanow)의 귀족 가문에서 신심 깊은 아버지 벨리슬라프(Belislaw)와 어머니 보냐(Bogna)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교적으로 교육받으며 자랐다. 그 후 그니에즈노(Gniezno) 주교좌 성당 부속 학교에서 교육받은 다음 파리에서 공부한 듯하다. 크라쿠프(Kraków)의 주교 람베르토(Lambertus Zula)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크라쿠프 근처 챔보츠(Czembocz)에서 사목하였으며, 그 뒤 주교좌 성당 참사 위원 및 설교 사제로 활동하다가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람베르토 주교가 사망한 후 교황 알렉산델 2세(1061~1073)에 의해 1072년에 크라쿠프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열성적인 설교와 엄격한 고행을 실천하고 정기 사목 방문을 열심히 하면서, 과부들이나 궁핍한 사람들에게 체계적인 도움을 주었다. 주교관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부모가 죽은 후에는 물려받은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폴란드를 집권하던 볼레수아프 2세(Boleslaw II ,1039~1081)는, 1069년 러시아에 대항한 키예프에서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뛰어난 전사였으나, 무절제한 욕정과 야만적인 잔인성을 지녀 윤리적으로 타락한 행위를 많이 자행하였다. 이에 스타니슬라오는 헤로데 왕의 타락을 고발한 세례자 요한처럼 왕의 부도덕성을 용감하게 비판하였다. 처음에 왕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하였으나, 더욱 비판이 거세어지자 거짓으로 회개한 척하였다. 그러나 곧 왕은 다시 타락한 행위를 일삼았는데, 심지어 음탕한 마음을 품고 한 귀족 부인을 강제로 궁으로 유괴하여 가두기까지 하였다. 이 같은 왕의 탐욕스런 행동은 결국 정치적인 불안과 혼란을 낳았으며, 마침내 국민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한편 스타니슬라오는 계 속 왕의 죄를 거침없이 꾸짖었고, 왕의 사악한 행동에 대해 공식적으로 파문을 선고함으로써 왕과 적대 관계가 되었다. 왕은 스타니슬라오가 자신의 반대파를 주도하던 라디슬라프(Wladyslaw)와 모의하여 자신의 왕좌를 무너뜨리려는 모반자라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1079년 4월 11일 자신을 파문한 스타니슬라오를 살해하고자 부하들을 이끌고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크라쿠프의 성 미카엘 성당으로 들어가, 그를 끌어내 살해하였다. 1257~1261년에 도미니코회의 빈천조(Vincenzo di Kielce)는 성 스타니슬라오의 《대전기》(Vita major)를 저술하였는데, 이 전기는 이전의 기록 자료들인 국가 편년사나 교회 연감, 기적 사화 등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또 그가 살해된 지 40년 후에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 갈로(Gallus)에 의해 수집된 폴란드 국가 편년사에는 스타니슬라오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지만 그에 관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크라쿠프 교회 연감에서는 그가 1072~1079년에 주교직을 수행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1207~1218년에 크라쿠프의 주교였던 크라들루베크(Vincenzo Kradlubek)의 편년사는 비교적 가장 온전한 기록을 전해 주고 있다. 또한 교황 파스칼 2세(1099~1118)의 서한 연구 결과, 그니에즈노 대교구에 있는 법정에서 왕의 명령으로 주교가 처형되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1088년에 람베르토 3세(Lambertus Ⅲ ) 주교가 크라쿠프의 성 미카엘 성당에 그의 유해를 안치했으며, 1253년 9월 8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1254)에 의해 아시시 대성당에서 시성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8일 폴란드 각지에서 모인 고관들과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크라쿠프에서 성대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역사적 배경과 의의] 폴란드 역사에서 볼레수아프 2세와 성 스타니슬라오의 '순교' 이야기에 어떤 정치적 배경이나 상황이 전제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즉 1904년에 위키에코프스키(Wojchiecho-wski) 교수는 이와 관련된 역사서를 출판하여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는 스타니슬라오가 반역 혐의로 고소되었으며 왕의 폐위를 계획하였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 미오돈스키(Miodonski) 교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강력하게 반대의견을 펼쳤다. 이렇듯 스타니슬라오의 순교 사건은 매우 불확실하고 모호하지만, 그의 살해 이면에 어떤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스타니슬라오를 살해한 볼레수아프 2세에 대한 평가도 분분하다. 그는 부도덕한 생활로 비난받고 살인까지 하였으나, 그 이전까지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에 맞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폴란드의 독립을 유지하는 정책을 이끌었던 활력 있는 정치 행동가였다. 또 그는 여러 교구와 대교구 및 베네딕도회를 설립하여 교회의 설립과 발전을 도모하였다. 스타니슬라오를 살해한 후 헝가리로 피신한 왕은, 그곳 오시아크(Osiak)의 베네딕도회에서 여생을 참회자로서 살았다고 한다. 11세기 폴란드 베네딕도회의 순교록에서는 볼레수아프 2세를 '복된 참회자 볼레슬라오 왕'(Beatus Boleslaus rex penitens)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빈천조의 《대전기》가 저술되던 당시 폴란드에서는 볼레수아프 왕가에 의해 세워졌던 군주제가 쇠퇴하고, 왕가의 존속 살해, 달단-몽골족들이나 다른 이민족들의 침입, 이교도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투쟁 등으로 분쟁과 혼란이 야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역사 의식을 지닌 지식층들 사이에서 군주제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빈천조는 당시의 이러한 기대를 표출하는 창구로서 스타니슬라오 성인 전기를 펴냈던 것이다. 사실 빈천조의 전기 작품은 당시 폴란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종합서였는데, 이 책에서 빈천조는 당시 사람들이 이상적인 국가 조건으로 갈망하던 군주제의 이상을 반영함과 동시에, 군주제 패망의 주요 원인이 왕의 타락과 주교 살해에 있었음을 조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 다니슬라오 ; → 폴란드) ※ 참고문헌 A. Butler, Butler's Lives ofthe Saints, M. Walsh ed., SanFrancisco, 1985/ Omer Englebert, The Lives of Saints, trans. by Christoper & Anne Fremantle, New York, 1951, pp. 178~179/ Francis Mershman,《CathEnc》 14, pp. 246~2471/ G. Spahr, 《LThK》 9, p. 1018/ B.B. Szczesniak, 《NCE》 13, p. 6421 J. Kloczowski, Storia dei Santi e Della Santità Cristiana, vol. 6, Grolier Hachette International, 1991, pp. 231~234/ Enzo Lodi, I santi del Calendario Romano(trans. by Jordan Aumann, O.P., Saints of the Roman Calendar, Society of St. Paul, 1992, pp. 89~90)/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87, p. 391. 〔姜昌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