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 (?~36)

〔그〕Στέφανος · 〔라 · 영〕Stepanus

글자 크기
8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1 / 5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성인.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순교자. 예루살렘의 일곱 부제들 가운데 하나. 축일은 12월 26일(동방 교회에서는 12월 27일).
그리스어 "스테파노"(Στέφανος)는 '승리의 화관' · '월계관' · '영광'이라는 뜻이므로, 이 그리스식 이름으로 보아 스테파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여겨진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율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사도 6, 11) 그룹에 속하였다. 또 성령과 지혜, 믿음과 은총이 충만한 사람(사도 6, 3. 5. 8 : 7, 55)으로 자선 사업에 봉사하는 부제로 선출되었다. 스테파노는 백성들 앞에서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사도 6, 8)을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혜와 성령을 받아(사도 6, 10)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와 논쟁하던 반대자들이 내세운 거짓 증인들 때문에 체포되어 의회로 끌려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호교론적인 설교를 하였으며, 그의 설교에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돌로 치는 폭력형을 당해 순교하였다(사도 7,54-8, 1).
〔성서에서의 언급〕 스테파노의 이야기는 사도 행전(6,1-8, 3 : 11, 19 ; 22, 20)에만 언급되어 있으나, 그의 생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아니다. 그의 등장과 활동 및순교를 전해 주는 스테파노 전승은 그를 열두 사도와 바오로 사도와 함께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모든 순교자의 모범이 되는 그의 순교 이야기는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일곱 부제의 선출과 관련된 이야기(사도 6, 1-7)이고, 두 번째는 체포된 스테파노의 설교 및 순교 사화(사도 6, 8-7, 58a : 7, 59-60 : 8, 2)이며, 세 번째는 스테파노 전승과 연결되는 그리스도교 박해와 이방인 선교 및 이와 관련된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사도 7,58b : 8, 1. 3 : 11, 19 : 22, 20)이다.
전승의 배경 : 이방인 지역에 흩어져 살며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인 헬라계 사람들 중 종교적 이유로 팔레스티나에 순례를 오거나 팔레스티나에 거주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회당을 갖고 출신 지역별로 모임을 형성하였으며, 그리스어 이름도 갖고 있었다. 이 헬라계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는데, 스테파노는 그들의 지도자 중 하나였다. 이들은 히브리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에 비하여 성전에 비판적이었고 유대교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유대교 전승을 고수하고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본토 출신의 유대교 그리스도인들과 갈등이 있었다. 스테파노 전승의 서론 부분이자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사도 행전 6장 1-7절은 예루살렘 초기 공동체 내에 있었던 이러한 갈등을 전해 줌으로써, 스테파노를 포함한 헬라계 출신의 일곱 보조자 선출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부제 : 본토 유대인들에 비하여 헬라계 출신 과부들이 식량 배급에서 푸대접을 받는다는 불평(사도 6, 1)을 들은 사도들의 제안에 따라(사도 6, 3), 신자들은 사도들이 기도와 전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식량 배급과 같은 자선 사업(διακονία)을 전담할 7명의 보조자를 선출(사도 6, 2-5)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의 기도 및 안수로 인정을 받았다(사도 6, 6).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명(사도 6, 3) 중 스테파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사도 6, 5)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서 첫 번째로 선출되었다. '최초의 부제 성품성사'로 간주된 이 내용으로 스테파노는 첫 번째 부제로 칭해지고 있다.
설교와 순교 : 스테파노의 순교 사화는 그와 관련하여 전해지던 전승(사도 6, 8-15 ; 7, 55-57. 59-60 : 8, 2)에, 사도 행전의 저자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찰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명하는 스테파노의 호교론적 설교(사도 7, 1-53)를 첨부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은총과 능력으로 충만하여 백성들 앞에서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던(사도 6, 8) 스테파노는 특히 자유인 회당에 속하는 헬라계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고, 회당에서 그들과 논쟁을 벌였다(사도 6, 9). 그의 카리스마적인 설교를 듣고 논쟁으로 스테파노를 이길 수 없었던(사도 6, 10) 그들은, 스테파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사도 6, 11)하고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사도 6, 13-14)는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그를 의회로 끌고 갔다(사도 6, 12).
대사제 앞에서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설명한 후 그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질타한 스테파노의 설교(사도 7. 1-53)에 의회 의원들과 군중들은 화를 냈고(사도 7, 54), 스테파노가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인자가 보입니다"라고 증언(사도 7, 56)하자 분노가 극에 달한 군중들이 그를 성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서 죽였다(사도 7, 57-58a ; 59-60).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한 자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사형 방법(레위 24, 11-16)이며, 로마의 허락 없이는 사형을 시킬 수 없었으므로(요한 18, 31) 유대인들의 사적인 폭력형에 속한다. 이는 자신이 파견한 예언자들이 돌에 맞아 죽을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마태 23, 37 ; 루가 13, 34 : 히브 11, 37 등)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스테파노는 예수의 처형 과정과 거의 유사한 소송 과정과 처형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마지막 기도(루가 23, 23. 46)처럼 원수를 용서하는 마지막 기도(사도 7, 59-60)를 통하여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제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로써 스테파노는 예수의 모범을 따른 모든 순교자의 모범이 되었다.
박해와 이방인 전교, 바오로 사도 : 스테파노의 죽음은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계 사람들에 대한 박해로 이어졌고(사도 8, 1b), 헬라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각 지역으로 분산되었다(사도 8, 1c). 이렇게 각 지역으로 흩어진 신자들에 의하여 유다와 사마리아(사도 8, 1)뿐만 아니라 페니키아, 키프로스, 안티오키아 등의 이방인 지역(사도 11, 19)에까지 복음이 전해졌다. 스테파노의 폭력형에 가담하고 그리스도교 박해에 적극 참여하였던(사도 8, 3) 사울(사도 7. 58b ; 8, la : 22, 20)의 개종은 스테파노의 순교로부터 심리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스테파노는 율법과 성전에 얽매이지 않는 보편적인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선포함으로써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에 앞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박해는 예루살렘 지역 선교가 끝나고 그리스도교가 이방인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예루살렘 교회에서 세계 교회로 변화되는 교회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공 경〕 순교자의 모범으로서 스테파노는 수많은 초기 교부들, 즉 리용의 이레네오(130~200)를 비롯하여 테르툴리아노(160~223), 아우구스티노(354-430) 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해졌으며, 박해를 받던 초기 교회의 많은 순교자들과 함께 3~4세기부터 공경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순교 날짜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증언과 순교를 통하여 그의 품격이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여겨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4세기 말부터, 서방 교회에서는 5세기 초부터 성탄 다음날인 12월 26일을 스테파노의 축일로 기념하였다.
5세기경의 전승에 의하면 스테파노가 순교한 장소는 예루살렘의 다마스커스 성문에서 북쪽으로 약 350m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의 아내인 에우도치아(Eudocia, ?~460)가 455/460년경 '스테파노가 돌에 맞은' 기념 성당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7세기경 페르시아인에 의해 불에타 파괴된 이 성당은 1882년 도미니코회 수도원 건축때 잔해가 발견되었고, 이를 기념하여 이곳에 예루살렘 성서 연구소(École Biblique et Archéologique Française de Jerusalem)가 세워졌다. 또한 스테파노의 순교가 예루살렘 동쪽의 키드론 골짜기라는 다른 전승에 의해 옛 도시의 동문을 '성 스테파노의 성문'이라고 일컫고 있다.
사도 행전 8장 2절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스테파노를 장사지냈다고 언급되어 있으나, 그의 무덤이 어디인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한편 415년 8월 3일 루치아노 신부가 예루살렘에서 15km 떨어진 카파르 가말라(Kafar Gamala)에서 스테파노의 유해를 발견하였는데, 이 유해는 아프리카의 메노르카, 히포와 예루살렘, 시온,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로마 등으로 나누어져 전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각 도시에 보관된 유해 위에 성 스테파노 기념 성당이 건축되어 이 성당들에서 많은 기적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스테파노의 유해 공경은 세계 각 곳으로 퍼져나갔다. 서방 교회에서는 9세기경부터 1955년 공식 전례에서 제외될 때까지 스테파노의 유해가 발견된 8월 3일을 '성 스테파노 유해 발견 축일'로 기념하였으며, 동방 교회에서는 스테파노 유해의 콘스탄티노플 이전을 기념하여 8월 2일에 축일을 지냈다. 1916년에는 살레시오회의 한 수사가 루치아노가 언급한 스테파노의 무덤 자리에서 교회의 잔해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근동 지방에서 지중해를 거쳐 유럽의 많은 주교좌 성당이 스테파노에게 봉헌되었고, 유럽의 수많은 왕과 황제(헝가리의 스테파노 1세 등), 그리고 교황과 주교들이 스테파노를 공경하여 그의 이름을 따랐다. 또 유럽의 성당 조각과 벽화에는 순교자나 부제 모습으로 그려지거나 조각된 스테파노의 성화상이 많은데, 그중에서 특히 그의 전생애를 여섯 장면으로 그린 안젤리코(Angelico, 1400?~1455)의 바티칸 니콜라오 5세 경당의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다.
유럽에서 스테파노는 말과 마부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되어 그의 축일에는 말에게 축복을 하고, 말의 먹이인 소금과 물 또는 귀리를 축복하며, 말을 타고 교회를 도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결석병 예방을 위하여 스테파노의 유해를 상징하는 돌을 포도주 잔에 넣어 축복한 소위 스테판미네(Sephansminne)를 함께 나누어 마시기도 하였다. 스테파노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이러한 풍습들은 스테파노의 축일과 시기가 같았던 게르만 민족의 동지제(冬至祭)를 그리스도교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에도 부제인 스테파노의 행적과 관련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스테파노의 빵'을 나누어 주는 풍습도 전해지고 있다.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는 이유로 벽돌공 혹은 석공의 수호 성인이 되었고, 지혜와 유창한 달변 때문에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의 수호 성인이 되었으며, 특히 성 라우렌시오와 함께 부제들의 주보 성인으로도 공경받고 있다.
※ 참고문헌  J. Bihler, Die Stephanuseschichite im Zusammenhang der Apostelgeschichte, Max Hueber, Miinchen, 1963/ H. Martin, Zwischen Jesus und Paulus, 《ZTK》 72, pp. 151~206/ O. Glombitza, Zur Charakterisierung des Stephanus in Act 6 und 7, 《ZNW》 53, pp. 238~244/ O. Wimmer · H. Melzer, Lexikon der Namen und Heiligen, Tyrolia, Innsbruck, 1984, pp. 763~766/ F. von Sales Doye, Heilige und Selige der römischkatholischen Kirche 2, Vier Quellen, Leipzig, 1929, pp. 363~364/ E. Weidinger Hg., Legenda Aurea, Das Leben der Heiligen, Pattloch, Aschaffenburg, 1986, pp. 53~58/ H.-C. Goßmann, Biographisch-Bibliographisches Kirchenlexikon 10, Bautz, Herzberg, 1995, pp. 1411~1416/ F. Rienecker Hg., Lexikon zur Bibel, Brockhaus, Wuppertal, 1991, p. 1338/ S.J. Hartdegen, 《NCE》 16, pp. 691~694/ F. Mussner · K. Beitel, 《LThK》 9, pp. 1050~1052/ G. Hotze · M. Zelzer · H.J. Limburg, 《LThK》 9, 2000, pp. 958~959/ H. Köster, 《RGG》 6, p. 358. 〔吳善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