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 헝가리의 (969/970?~1038)

Stephanus Hurgar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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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스테파노.

헝가리의 스테파노.

성인. 헝가리 국가를 창설하고 그리스도교화시킨 최초의 헝가리 왕. 헝가리의 수호 성인. 축일은 8월 16일.
〔교회사적인 배경〕 헝가리인들인 마자르족(Magyar)은 원래 유목 민족으로, 895년부터 반세기 이상 중부 유럽지역을 약탈하며 학살을 자행하였다. 마자르족의 그리스도교화는 비잔틴 교회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10세기 초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913~959)는 자신의 영토를 침략한 마자르족들을 섬멸하였고, 950년경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마자르족의 족장 지울라(Gyula)와 불크수(Bulcsu)에게 세례를 받도록 명하였다. 헝가리 남동쪽을 통치하던 지울라는 그 후 열심한 신자가 되어 자신의 영토에 비잔틴 교회를 세우고, 자신의 딸 아델라이데(Adelaide)를 헝가리 서쪽 지역을 통치하던 게자(ArpadeGéza)와 결혼시키면서 이 지역에도 비잔틴 교회가 설립되도록 하였다. 한편 교황 베네딕도 6세(973~974)는 헝가리의 복음 선교 계획을 피력한 독일 파사우의 주교 필그림(Pilgim)의 서한을 받고 그 후 선교사들을 이곳에 파견하였다. 선교사들은 게자 대공과 그의 아내 아델라이데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의 아들 바이크(Vaïk)에게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하지만 독일에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이 헝가리의 선교를 가로막았으며, 동시에 비잔틴과 불가리아의 무력 충돌은 비잔틴 교회 선교도 저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헝가리에 그리스도교화가 본격적으로 시도된 것은 프라하의 2대 주교인 성 아달베르토(Adalbertus Pragensis,956~997)에 의해서였다. 아달베르토는 마자르족을 선교하기 위해 에스테르곰(Esztergom)을 거점으로 삼고 선교활동을 펴 나갔다. 전해 오는 아달베르토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헝가리의 게자 대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대공의 아들 스테파노와도 절친한 사이로서 그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다고 한다. 아달베르토는 게자 대공이 다른 민족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도록 도왔으며, 이를 위해 훗날 하인리히 2세 황제(1002~1024)가 된 바이에른 공작의 누이동생 기셀라(Ghisela)와 스테파노가 995년에 결혼하도록 주선하였다.
〔생애와 활동〕 정치 · 종교 정책 : 스테파노는 997년에 그의 아버지 게자 대공이 사망하자 마자르의 통치자가 된 뒤, 아달베르토의 지도를 받으며 헝가리를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어 갔다. 스테파노는 우선 이교도 귀족들의 반란을 제압하고 비잔틴 교회가 우세한 헝가리 남동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는 모든 국가 정치적인 사안들을 열성과 지략을 다해 해결하였는데, 특히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정책을 펼쳤다. 첫째는 헝가리 내부 깊숙이 교황청의 관할하에 있는 그리스도교를 정립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헝가리를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된 국가로서의 주권을 갖추는 것이었다. 셋째는 혈통 중심의 영주제를 폐지하고 중앙 집권체제로 정치적 통일을 이루고 절대 군주제를 정착시키는 것이었으며, 넷째는 서유럽의 질서와 체제의 영향을 받되 헝가리 국민들의 고유한 특성이나 풍속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헝가리는 여러 문화권의 지배를 받았는데, 동쪽의 터키 마호메트교, 발칸 반도쪽의 그리스 슬라브 문화, 서쪽의 라틴 게르만 문화, 북쪽의 슬라브 이교 문화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스테파노는 이러한 여러 문화의 영향으로 생길 수 있는 분열의 위험 요소를 없애고 화합시킬 수 있는 미래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선교 활동 : 당시 교황 실베스텔 2세(999~1003)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3세(996~1002)는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들을 교황의 수위권과 황제의 정치권 아래에 두는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스테파노는 헝가리 국민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방 그리스도교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그는 가톨릭 교회를 헝가리의 국교로 정하면서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지닌 가톨릭 교회를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993년에 헝가리에 온 프라하의 수도자를 헝가리의 사절로 임명하여 헝가리 국법의 비준과 왕권 승인을 얻고자 로마로 파견하였다. 오토 3세 황제는 스테파노를 왕으로 즉위시키도록 지지하였으며, 교황은 스테파노에게 헝가리 교계를 설립하고 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마침내 1000년 예수성탄 대축일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대표단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황 사절의 집전으로 스테파노를 왕으로 즉위시키는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스테파노는 헝가리 최초의 왕이 되었다.
스테파노는 헝가리 국민들을 그리스도교 신자로 개종시키기 위해 열성을 다하였으며, 많은 교구와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또 클뤼니 수도회 회원들과 바이에른 · 보헤미아 · 이탈리아 등지에서 온 수도자들의 선교 활동을 지지하였으며, 헝가리 베네딕도회의 모원인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을 최초의 대주교좌로 설립하고 그곳이 선교의 거점이자 종교 문화 생활의 중심지가 되도록 장려하였다. 1006년경에 최초의 교구인 베스프렘(Veszprém) 교구가 설정되었고, 1010년에 설정된 에스테르곰 교구는 헝가리 교회의 핵심 역할을 하다가 후에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스테파노는 이외에도 많은 교구들과 수도원들을 설립하였는데,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가 세운 교구는 대주교좌 2개와 8개의 주교좌였다고 한다. 스테파노는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적인 복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엄격하고 면밀한 방법으로 모든 이교도적인 관행들을 없애 나갔다. 이교도적인 풍습의 미신적인 행위들과 신성 모독, 간음죄 등에 대하여 살인이나 도둑질과 같은 처벌을 법으로 정하였으며, 신자와 이교도 사이의 결혼을 금하였다. 스테파노의 이러한 강경한 태도와 정책은 적지 않은 저항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신심이 깊고 올곧아서 스테파노가 자신의 후계자로 여겨 왔던 아들 에메리코(Emercus, 1007~1301)가 사냥하다가 사고로 죽자, 그는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게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친척들간의 암투와 음모, 모반 등으로 인하여 크나큰 시련을 겪어야 했으며, 말년에는 건강마저 악화되어 고통을 받았다. 1038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사망하였다.
〔공경과 의의〕 스테파노가 사망한 후에도 헝가리 국민들의 가슴속에는 그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 있었으며, 묘지를 참배하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1083년에 라디슬라스 1세 왕(1040~1095)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의 허가를 받아 헝가리주교들과 수도원장, 고관들의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회의를 열어 스테파노와 그의 아들 에메리코의 유해, 스테파노의 부름을 받고 헝가리로 와서 에메리코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제라르도(Gerardus Sagredo, ?~1046)의 유해를 장엄한 예식으로써 공경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들의 유해는 부다페스트의 성모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1686년에 부다페스트는 터키인들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교황 인노첸시오 11세(1676~1689)는 스테파노의 축일을 9월 2일로 선포하고 전세계 교회에서 공경하도록 하였다. 헝가리에서는 1948년까지 스테파노의 기일을 국가 축일로 지냈으나,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기념일이 8월 20일로 변경되었고 종교적인 의미 없이 '헌법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헝가리 국가의 창시자요 최초의 왕인 스테파노는 정치 · 문화 · 종교 · 법 체제 등을 정립하여 헝가리의 국력을 향상시켰으며, 유럽 및 서방 세계 안에서 헝가리의 국가적인 입지를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 또 그리스도교적인 종교 정책을 펼침으로써, 통치 당시부터 약 반세기 이상 헝가리를 서방 교회라는 튼튼한 보루 안에서 몽골족과 터키인 등 아시아 계통의 이민족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지도력을 왕성하게 펼쳐 나가는 가운데 그는 헝가리에 가톨릭 교회가 정착하도록 하는 데 커다란 공훈을 남겼다. 한편 헝가리의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2000년 8월 21일 부다페스트에 있는 성 스테파노 성당에서 스테파노를 그리스 정교회의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교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로 분리된 1054년 이후 서방 교회의 성인이 동방 교회에서도 성인으로 공식 인정받은 첫 사례가 되었다. (→ 아달베르토, 프라하의 ; 헝가리)
※ 참고문헌  D. Sinor, 《NCE》 13, pp. 697~698/ F. Dvornik, L'Évan-gélisation des Slaves, des Magyars et des Russes, S. Delacroix, Histoire Uni-verselle des Missions Catholiques Ⅰ , éditions dL'Acanthe, Monaco, pp. 161~164/ K. Hofmann, Die Heiligen in Ihrer Zeit, Bd. Ⅰ, Peter Manns, hers, Matthias-Grünewald Verlag · Mainz, 1967^3, Pp. 517~520/ J. Bak, 《LThK》 9, p. 1048/ R.P. McBrien ed., The HamperColins Encyclopedia ofCatholicism, San Francisco, Harper Co., 1995, p. 1223/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1987, pp. 393~394/ Enzo Lodi, Saints of the Roman Calendar, trans. by Jordan Aumann, O.P., New York, 1992, pp. 230~232/ Clifford Stevens, The One Year Book of Saints,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Inc., 1989, p. 236/ Donald Attwater, The Penguin Dictionary of Saints, Great Britain, 1983, pp. 304~305. 〔梁蕙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