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교황(254~257) . 축일은 8월 2일.
로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254년 5월 12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339)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에서는 약 3년 간 주교직을 수행한 고르넬리오 다음에 루치오가 계승하였다. 하지만 8개월 간의 통치 후에 루치오 역시 사망하였고, 자신의 주교좌를 스테파노에게 넘겼다"(《교회사) Ⅳ, 2)고 한다. 그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교황직을 수행하였는데, 왜냐하면 발레리아누스 황제(253~260)와 갈리에누스 황제(253~268)는 권좌에 오른 후 자신들의 선임자인 데치우스 황제(249~251)와 갈루스 황제(251~253)가 보였던 교회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포기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교황은 교회 내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257년 8월 2일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나 사망한 장소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주요 활동〕 배교자의 참회와 주교 복직 문제 : 데치우스 황제 통치 기간에 스페인의 주교 레지우스(Legius)와 아스투리카(Asturica)의 바실리데스(Basilides), 그리고 에메리타(Emerita)의 마르치알리스(Marcialis)가 박해 때문에 배교를 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신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추방당하였다. 그리고 지역 교회 회의에서 이들의 면직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바실리데스는 교황에게가서 자신과 동료의 무죄함을 밝히면서 교황을 설득하였고, 교황은 이 문제를 마치 같은 지역의 주교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여 이들을 복직시키고자 하였다. 교황의 이러한 생각에 스페인 주교들은 당시 카르타고의 주교로 아프리카 교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치프리아노(Cypiamus, ?~258)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선임 교황인 고르넬리오 교황(251~253)이 내렸던 "그와 같은 사람들은 의심할 바 없이 참회를 할 수는 있으나 성직자의 신분이나 주교 신분은 면직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제시하면서, 교황이 선임 교황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고 반발하였다(《서한집) 67). 아울러 254년 카르타고 교회 회의를 통해 이들의 복권은 부당하다면서 다시 한번 면직을 재천명하였다.
노바시아누스 이단 논쟁 : 교황 고르넬리오가 단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전파된 노바시아누스(Nova-tianus, 200?~?) 이단으로 파생된 문제가 위의 문제에 결부되었다. 리용의 주교 파우스티노(Faustinus)와 갈리아 지역의 일부 주교들은 교황에게 아를(Arles)의 주교 마르치아누스(Marcianus)가 노바시아누스 이단에 물들었다고 고발하였지만 무위로 끝났다. 이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교황은 중재 역할에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이들은 치프리아노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교회의 일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던 치프리아노는 교회 규율의 보존을 위해 강력한 어조로 교황에게 편지를 썼다(《서한집》 68). 이 편지에서 치프리아노는 마르치아누스가 가톨릭 교회의 진리와 주교단의 일치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그를 파문하고 다른 주교를 선출해 줄 것과, 교황이 새 주교를 선출한 다음에 자신에게 새 주교에 대해 알려 주어 다른 아프리카 주교들도 누구와 통교해야 할지 통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치프리아노에게 있어서는 로마 교회와의 일치가 적법성을 증명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에 대해 수위권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세례 논쟁 : 치프리아노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교회는 이단자들이 집전하는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치프리아노에 의하면, 세례는 오직 가톨릭 교회 내에서 이루어져야 유효하기에 이단자들이 다시 가톨릭 교회의 품으로 되돌아오는 경우 재세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황은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팔레스티나 교회의 전통에 따라 재세례(再洗禮)가 필요하지 않고, 단지 참회와 보속을 부여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확정 지었다. 교황은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갱신되지 않는다"(Nihil innovatur nisi quod traditum est라고 말하였다. 이 상황에 대해 에우세비오의 《교회사》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심각한 문제로 다투었는데, 즉 어떠한 경우라도 이단에서 돌아온 이들을 세례로써 정화시키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었다. 옛 관습은 이들이 안수와 함께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카르타고 교회의 목자인 치프리아노는 오류에 대해 보속행위를 한 이들이라도 세례로만 다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 첫 인물이었다. 하지만 스테파노 1세는 전통에 반대되는 것에 적대적이었기에 처음부터 이에 대해 강력하게 분노하였다" (V , 2~3).
치프리아노는 평신도 마뇨(Magus)에게 쓴 편지에서도 노바시아누스파들 역시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255년에 열린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서는 이단자들에게 재세례를 행하는 것만이 적법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얼마 뒤 재세례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마우리타니아(Mauritania)의 주교 귄토(Quintus)에게도 역시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직접적으로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스테파노 1세 교황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였다(《서한집》 71). 이어 255년 가을(혹은 256년 봄)에 교회 회의를 다시 개최한 뒤 치프리아노는 교황에게 255년 교회 회의의 결정문과 권토에게 보낸 편지를 첨부한 서한을 보냈는데, 이 서한에서 그는 아프리카 교회의 관습만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고, 아울러 로마 교회에도 부과되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서한집) 72). 256년 9월 1일 다시 교회 회의를 개최한 치프리아노는 회의에 참석한 87명의 주교들에게 이단자들에 대한 재세례 문제에 대해 투표하도록 하였고, 이 투표에서 주교들은 만장 일치로 재세례에 찬성하였다.
당시 동방 교회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가빠도기아(Cappddocia)의 피르밀리아노(Firmilianus) 주교를 비롯하여 다른 많은 주교들 역시 치프리아노의 의견에 동의하였으나, 교황은 강력하게 이 주장에 맞섰다. 그리고 로마 교회의 관점을 각 지역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소아시아 교회에 그들과 통교할 마음이 없다고 단언하는 편지를 보냈다. 또 그들이 특사를 파견하였을 때에도 교황은 만나려고 하지 않았고, 적대적으로 대하기까지 하였다. 교황은 재세례는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고,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은 다른 모든 주교들에 대해 수위권을 갖는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리고 오직 한 번의 세례만이 존재하고, 이 세례의 유효성은 집전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성사를 재정하였다는 데 기인한다고 주장하였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던 치프리아노는 교황이 주장하는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교회 일치의 사명을 맡겼지만 이 사명은 다른 사도들과 공유하는 것으로 모든 주교들에게도 똑같이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일치는 어느 한 주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치를 깨뜨리지 않는 모든 주교들의 공통된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서에서 바오로가 개종 후 함께한 이들은 교회의 지체들이었지 결코 이단자들이 아니었다면서, 바오로와 다른 사도들은 이단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제외된 이들이라고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가톨릭 교회는 하나이며, 닫힌 정원이고 봉인된 샘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의 이와 같은 교회론은 결국 가톨릭 교회 밖에는 은총도 구원도 없다는 명제가 주장되도록 유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그의 논리를 따른다면 재세례는 불가 피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이 양쪽 모두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오(190-265?)가 중재 역할에 나섰다. 스테파노 1세와 같은 입장이었던 그는 교황에게 치프리아노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들에 대해 파문 조치를 취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는데, 결국 이 논쟁은 교황의 사망과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교회 박해, 그리고 교황 사망 후 1년 뒤에 치프리아노가 순교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논쟁은 로마 교회의 특권적인 위치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스테파노 1세 교황은 로마 교회의 수위권이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 베드로에게 준 특권(마태 16,18)에 기인한다고 주장한 첫 교황이었다.
〔증언 사료〕 257년에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큰 박해를 일으켜 많은 주교들과 사제 및 부제들이 체포되었고, 이 중에서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스테파노 1세 교황이 사망한 것도 이 시기였다. 교황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증언인 《로마 주교들의 증언록》(Deposito Epis-coporum)에 보면 8월 2일 갈리스도 카타콤바의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레오 성무 집전서》(Sacramentarium Leonianum) , 《예로니모 순교록》(Marty-rologium Hieronymianum), 그리고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 역시 동일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레고리오 성무집전서》(Sacramentarium Gregorianum)와 《예로니모 순교록》은 교황이 순교하였다고 했고, 6세기에 나온 《스테파노의 수난》(Passio Stephani) 역시 교황을 순교자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354년 로마 교회의 전례력은 교황의 이름을 단순히 사망한 주교의 명단에 넣었을 뿐, 순교자의 명단에 넣지는 않았다. 또 《레오 성무 집전서》에는 교황이 8월 3일에 사망하여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갈리스도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카알 대제(742~814) 이전의 로마 전례서 역시 특별히 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결국 《스테파노의 수난》 이전의 전승은 교황의 순교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교황이 순교하였는지의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훗날 교황 바오로 1세(757~767)는 스테파노 1세 교황이 세운 한 수도원으로 그의 시신을 이장하였다. (→ 디오니시오, 알렉산드리아의 ; 치프리아노)
※ 참고문헌 L. Duchesene, Le Liber Pontificalis, Texte, Introduction et Commmentaire, ed. E. De Boccard, Paris, 1955/ 《ODCC》, PP. 1540~1541/Eusebio di Cesarea, Storia Ecclesiastica e Ⅰ Martiri della Palestina, tradu-zione e note di Giuseppe del Ton, Descl e & C. Editori Pontifici, Roma,1964/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Univ. Press, Oxford, New York, 1986/ A. Lopes, Papi, La vita dei pontefici attrcverso 2000 anni di storia, Futura Edizioni, Roma, 1997/ J. Quasten, traduzione di Nello Beghin, Patrologia, vol. 1, Marietti, Roma, 1992/ L. Tripepi, Ritratti e Biografie dei Romani Pontefici, Tipografia della Pace, Roma, 1879/ 《EC》/ A. Amore, Bibliotheca Sanctorum, Istituto Giovanni XXIII della Pontificia Universit Lateranense, Roma, 1968/ 《DCB》/ A. Cleval, 《DTC》, pp. 970~ 973/ B. Studer, 《DPAC》/ M. Christol, Dizionario Storico del Papato, diretto da Philippe Levillain, Traduzione di Francesco Sava Sardi, Bompiani, Milano, 1996. 〔邊宗燦〕
스테파노 1세 (?~257)
Stephanus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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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스테파노 1세 교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