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 2세 (?~757)

Stephanus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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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 2세 교황.

스테파노 2세 교황.

교황(752~757). 스테파노 3세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스테파노 2세라는 이름을 가진 교황이 752년 선출 4일만에 사망함으로써 교황으로 서임되지 않았고, 따라서 교황 명단에 삽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유한 로마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콘스탄티노(Constantinus)가 사망하자 훗날 교황 바오로 1세(757~767)가 된 동생과 함께 라테란 궁에서 자랐다. 자카리아 교황(741~752)에 의해 부제로 임명된 이들 형제는 743/744년에는 로마 교회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스테파노 2세는 부제 시절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 후 자카리아 교황에 의해 성 그리소고노(St. Crisogono) 성당의 사제 추기경으로 임명을 받았다.
자카리아 교황이 사망한 지 4일 후인 752년 3월 26일 성모 마리아 대성전(Santa Maria Maggiore Basilica)에서 이루어진 교황 선거에서 당시 신부였던 스테파노 2세가 만장 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연대 교황표>(LiberPontificalis)에서는 교회와 가난한 이를 몹시 사랑하고, 교회 전통에 대한 열정을 지닌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이며, 덕을 갖춘 사목자로서 자신의 양 떼를 혼신을 다해 보호한 교황으로 그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정치적인 활동이었다. 교황은 5년간이라는 짧은 교황직 수행 기간 동안 교황권을 동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시켰고, 카롤링거 왕조와 교황권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교황은 이러한 정치적인 활동을 통하여 강력한 교황령의 기반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이후 수 세기 동안 교회와 서유럽 왕조 사이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 교황은 로마에 있는 여러 성당의 복원 공사와 장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저택들을 '성 디오니시오'에게 봉헌한 수도원으로 내놓았고, 순례자들을 위한 집도 여러 채 설립하였다. 그리고 피핀(741~768)의 왕국 내에서 갈리아 전례 대신 로마 전례가 행해지도록 하였다. <연대 교황표>는 교황이 재임 기간 동안 서품식을 한 번 주례하였는데, 이때 2명의 사제와 2명의 부제를 탄생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메츠(Metz)의 주교 크로데강(Chrodegang)의 묘비에 보면 그가 스테파노 2세 교황에 의해 대주교로 임명되었다고 나타나 있다. 757년 4월 26일 사망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정치적인 활동〕 교황이 된 후 그의 주요 관심사는 교황청과 롬바르드족과의 관계였다. 롬바르드의 왕 라키스(Ratchis, 744~749)의 뒤를 이은 아이스툴프(Aistulf, 749~756)가 749년에 무력으로 로마를 위협하자, 교황은 그와 40년 간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아이스툴프는 로마를 마치 자신의 영지처럼 여기고 로마인들에게 매년 인두세를 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교황과 로마인들은 롬바르드의 백성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교황은 자신의 권위를 보존하고자 하였다. 아이스툴프는 자신이 합병시킨 동로마 제국의 영토 반환 문제 때문에 라벤나에 황제 특사로 파견된 요한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이에 교황은 아이스툴프에게 다시 특사를 파견하는 한편,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741~775)에게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더 이상 황제에게 희망을 걸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당시에 교황은 로마 시민들에게 그리스도의 자비에 의탁할 것을 권고하면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려진 상본을 들고 행렬하며 기도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한 각 지역과 모든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호칭 기도를 바쳤는데, 이 기도문은 하루는 '구유에 계신 천주의 모친'(Genitrix Deiad Praesaepem)에게, 또 하루는 베드로 사도에게, 하루는
바오로 사도에게 바치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교황은 다른 권력자의 도움을 찾아야만 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롬바르드족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크족이 교황에게 유일한 희망으로 떠올랐다. 교황 그레고리오 3세(731~741)가 739년에 카를 마르텔(Karl Martel, 690~741)에게 했던 것처럼, 스테파노 2세 교황 역시 당시의 통치자였던 피핀 3세(741~768)에게 로마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를 방문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피핀 3세가 메로빙 왕조를 몰락시켰을 때 교황 자카리아가 그의 행위가 정당함을 인정해 주었던 적이 있었기에, 피핀 3세는 교황에게 진 빚을 언젠가는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그는 교황의 방문 제의를기꺼이 받아들여 비밀리에 스테파노 2세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753년 10월 14일 몇 명의 성직자들과 함께 로마를 떠난 교황은 한겨울에 알프스를 넘어 살롱쉬르마른(Chalons-sur-Marne) 남쪽의 폰티온(Ponthion) 왕궁에 도착하여 피핀 3세의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교황과 성직자들은 왕에게 자신들과 로마 시민들을 구해 줄 것을 청하였다. 교황 일행은 겨울을 지내기 위해 근처 '생 드니'(Saint Denis) 수도원에 자리를 잡았고, 이를 계기로 프랑크족은 교황 전례에 참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롬바르드족과의 전쟁 계획에 대해 많은 프랑크족들은 카를 마르텔과 리우트프란드(Liutprand, 712~744)가 맺은 동맹에 기초하여 반대하였다. 아이스툴프 역시 이 반대를 부추기기 위해서 몬테 카시노에 있는 피핀 3세의 형제인 카를만(Karlmann, 751~771)을 피핀 3세에게 보냈다. 그렇지만 피핀 3세는 그를 빈에 있는 한 수도원에 감금시켜 버리고 말았다.
전쟁 반대 의견을 물리친 피핀 3세는 754년 4월 14일 라옹(Laon) 근처의 퀴에르지(Quierzy)에서 열린 프랑크족의 총회에서, 자신과 두 아들이 로마 교회와 성 베드로좌의 특전 즉 교황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라벤나, 동로마 제국 총독령과 롬바르드족이 차지하고 있는 그 외의 도시들, 그리고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까지도 성 베드로좌의 정당한 소유물로 인정할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였다. 이것이 바로 '피핀의 증여' 이다.
교황 스테파노 2세는 754년 7월 28일 '생 드니' 수도원에서 피핀 3세와 그의 아내, 그리고 두 아들을 왕으로 축성함으로써 그들 왕조에 적법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피핀 3세와 그의 두 아들에게 '교황의 보호자'라는 새역할에 대한 답례로 '로마인들의 귀족'(patrizio dei Ro-mani)이라는 명예 칭호를 부여하였다. 이후 피핀 3세는 자신이 행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로 내려와 파비아를 포위한 뒤, 아이스툴프가 합병한 지역에 대해 평화적인 양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754년 8월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조약을 체결하였다. 아이스툴프는 자신이 점령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 총독령의 도시들과 펜타폴리스(Pentapolis)를 교황에게 양도하고 더 이상 침범하지 않을 것이며, 피핀 3세에게 복종할 것을 서약하였다.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둔 교황은 755년 10월 프랑크족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로 돌아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프랑크족 군대가 돌아가자 아이스툴프는 이듬해 1월 1일 베네벤토(Benevento) 공작의 후원을 받아 로마를 포위하였다. 당시 문헌들은 이 포위가 3개월 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교황은 오스티아의 주교 제오르지오, 토마리코(Thomaricus), 코미타(Comita), 그리고 대수도원장 바르나리오(Warnarius) 등을 특사로 파견하였고, 이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교황의 편지를 해로(海路)를 통하여 피핀 3세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피핀 3세는 그 해 5월 군대를 이끌고 파비아를 포위하고 아이스툴프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다. 결국 아이스툴프는 포(Po) 강에 있는 코막키오(Comacchio)를 포함하여 자신이 점유한 도시를 다시 돌려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공작들인 요한네스와 그레고리우스가 원래 이 지역들은 법적으로 황제에게 속해 있는 것이라며 반발하자, 피핀 3세는 자신은 성 베드로에 대한 사랑과 자신이 지은 죄의 사함을 위해 군대를 동원한 것이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면서, 이 지역들은 교황 외에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맞섰다. 그 후 피핀 3세는 라벤나와 동로마 제국 총독령에 있는 여러 도시들, 즉 펜타폴리스 지역의 도시들인 리미니, 페사로, 파노, 세니갈리아, 안코나, 그리고 그 인접 지역들을 성 베드로와 로마 교회에 영속적으로 증여하였다. 그리고 성 디오니시오 수도원 원장인 풀라도(Fulradus)에게 이 도시들의 열쇠와 기부 문서를 보관시켰다. 이로써 교황은 그 어떤 세속적 권력에서도 독립적인 교황령이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756년 12월에 아이스툴프가 상속자 없이 사망하자, 교황은 롬바르드족 왕권의 중재자로 나섰다. 그 이유는토스카나(Toscana)의 데시데리우스(Deiderius)와 롬바르드족의 옛 왕이며 아이스툴프의 형인 라키스가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기 때문이었다. 데시데리우스는 왕권을 얻기 위해 풀라도가 참석한 자리에서 아직 반환되지 않은 동로마 제국 총독령과 펜타폴리스의 모든 도시들의 반환을 교황에게 약속하였다. 결국 교황이 그에게 통치권을 맡김으로써 교황은 볼로냐(Bologna)를 포함하여 다른 도시들까지 얻게 되었으나, 이 약속은 그의 사망으로 후임 교황인 바오로 1세 때 이행되었다. 또한 교황은 스폴레토(Spoleto)와 베네벤토의 새 공작들이 피핀 3세와 교황청에 복종하도록 하였다. (→ 교황령 ; 교회사 ; 롬바르드족)
※ 참고문헌  L. Duchesene, Le Liber Pontificalis, Texte, Introduction et Commentaire, ed. E. De Boccard, Paris, 1955/ 《ODCC》, p. 1541/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Univ. Press, Oxford, New York, 1986/ A. Lopes, Papi, La vita dei pontefici attraverso 2000 amuni distoria, Futura Edizioni, Roma, 1997/ L. Tripepi, Ritratti e Biografie dei Romani Pontefici, Tipografia della Pace, Roma, 1879/ A. Cleval, 《DTC》, pp. 973~975/ J.-C. Picard, Dizionario Storico del Papato, diretto da Philippe Levillain, Traduzione di Francesco Sava Sardi, Bompiani, Milano, 1996. 〔邊宗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