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서남부의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입헌 군주국으로, 공식 이름은 스페인 왕국(Reino de España). 북쪽은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와, 서쪽은 포르투갈과 접경하고 있으며, 북서쪽은 대서양, 동쪽은 지중해와 인접해 있고, 남쪽은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대륙과 마주하고 있다. 면적은 504,782㎢고, 인구는 3,932만 명(1997)이며, 수도는 마드리드(Madrid)이다. 지중해의 발레아레스 제도와 대서양의 카나리아 제도를 포함하여 17개의 지방 자치 주가 있으며, 원주민은 이베로족(Ibero)과 켈트족(Cett)이었는데 이후 라틴족, 게르만족 그리고 아랍인들과 피가 섞였다. 크게 보아 카스티야(Castilla) · 카탈루냐 · 갈리시아 · 바스크 등 4개 지방의 언어가 있으며 이 중 카스티야의 언어가 공용어인 스페인어로 통용되고 있다. 이탈리아와 더불어 유럽의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로서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도 야고보와 사도 바오로가 선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스페인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와 멜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정착] 신석기 시대 말기와 청동기 시대 초기(기원전 2000~1500)에 아프리카로부터 이베로족이 들어와 자리잡았을 때, 이미 이베리아 반도에는 알타미라 벽화 등을 남긴 구석기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600년에는 피레네 산맥을 통하여 인도 유럽어족의 켈트족이 철기 문명을 가지고 들어와 북부 지방에 정착하였고, 점차 남부 지방의 이베로족과 혼합하여 셀티베로족을 이루면서 농업과 목축업을 발전시켰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는 기원전 11세기경 페니키아인들이 와서 무역을 시작하였고, 기원전 7세기에는 그리스인들이 들어와 여러 도시를 식민지화하였으며, 그 후 지중해 해상 강국으로 등장한 카르타고가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로마와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01)을 벌였다. 전쟁에서의 패배로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의 본격적인 지배를 받았는데, 특히 서기 1세기 이후에는 소위 '팍스 로마나 (Pax Romana)하에서 중요한 전기를 맞았다. 즉 경제적으로는 금과 은의 생산이 증대되고 상업과 농업이 발전하였으며, 주민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얻었고 라틴어가 통용되었다. 사도 바오로와 사도 야고보가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것도 이 시기였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페인 여행의 계획을 밝히고 있는데(로마 15, 24-28) 그 여행이 이루어진 시기는 63~67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에 의해 임명된 7명의 주교가 스페인에 파견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은 급속히 전파되었고, 박해 기간 동안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을 낳았다. 스페인은 이후 가톨릭 교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에 참석한 호시오(Hosius)는 스페인 코르도바의 주교였다. 초기의 스페인 교회는 주로 프리실리아누스주의(Priscimimisio), 그노시스주의, 마니교 등 이단을 물리치고 교리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로마 제국의 쇠퇴와 함께 스페인에도 수에비 · 반달 · 알라노 등의 게르만족이 침입하였으나, 415년경 더욱 강력한 서고트족(Visigot)이 침입하여 이들을 제압하였고, 507년에는 톨레도(Toledo)를 수도로 왕국을 세웠다. 지리적 · 인종적 · 종교적인 통일은 서고트 왕국의 레오비질도 왕(Leovigildo, 568~586)에 의해 이루어졌다. 본래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 내에 있을 때 이단인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여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둘째 왕자인 헤르메네질도(Henmeregglaob)는 가톨릭 신자와 결혼하고 이단에 반대하여 반역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끝내 개종을 거부하고 처형당하였다. 훗날 레오비질도 왕은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아들과 함께 박해했던 세비야(Sevilla)의 주교 성 레안데르(Leander)에게 용서를 청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레카레도 왕(Recaredo, 586~601)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589년 톨레도 교회 회의를 통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고 전국민을 개종시켰다.
서고트 왕국의 개종은 일찍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던 수에비족을 병합한 것이 큰 요인이었지만, 가톨릭 신자들인 기존의 주민들과 융합을 이루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는 게르만 문화에 대한 로마 문화의 승리를 의미하였으며, 스페인에 정교 일치의 전통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서고트 왕국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성 레안드로의 동생이자 세비야의 주교였던 성 이시도로(ksidous, 565~636)는 아직 야만적 상태에 있던 국가에 법과 언어를 통하여 질서를 바로잡고 중세로 진입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로마의 관료제가 사라진 후 주교들이 국가의 실질적인 행정 책임자가 되자 교회와 국가의 결합을 선포하고 새로운 스페인 건설을 꾀하였다. 서고트 왕국은 비록 단명하였으나 사상 최초로 에스파냐라는 이름 아래 지리적 ·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면서 스페인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아랍인의 침공과 이슬람 문화] 원래 게르만족의 왕위는 선출제여서 세습제를 원하는 왕들과 끊임없는 마찰을 빚었다. 에히카(Egica) 왕 역시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아들 위티사(Witiza, 702~710)에게 왕위를 세습하였다가 이에 반대하는 귀족 로드리고(Rodigo)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겼다. 이에 위티사가 무어족의 일파인 아프리카 북부의 베르베르족에게 원군을 청하자, 추장 타리크(Tariq)는 711년에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와 로드리고를 무찔렀다. 더 나아가 718년에는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킨 무어족에 의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무어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협하였으나, 732년 프랑스의 푸아티에(Poicem)에서 카를 마르텔(714~741)에게 패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왔다. 아랍인들이 짧은기간 내에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강한 군사력과 서고트 왕가 내부의 분열, 그리고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유대감 때문이었다. 10~11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무어족은 바그다드의 칼리프와 주종 관계를 끊고 독립 왕조로 발전하여 번영을 누렸으며, 바그다드와 비잔티움과 더불어 세계 3대 도시 중 하나로 꼽힌 수도 코르도바(Chodoba)에는 30만명이 거주하였다. 또한 아비켄나(Avicema, 980~1037), 아베로에스(Averhioes, 1126~1198), 마이모니데스(M. Maimo-nides, 1135~1204) 등의 철학자들에 의해 그리스 철학이 활발히 연구되었고, 톨레도의 번역원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뒤 이탈리아로 전파됨으로써 르네상스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아랍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 머무르던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국토 수복 전쟁(Reconquista) 기간이었다. 북부 아스투리아스 지방을 거점으로 저항군을 형성한 서고트 왕가의 귀족들은 펠라요(Pelayo, 718~737)를 왕으로 삼아 코바동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반도 내의 여러 그리스도교 왕국들이 연합하여 아랍인들을 몰아내고 스페인의 영토를 점차 회복하였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압박을 받은 코르도바의 칼리프 왕조(929~1031)는 결국 멸망하여 여러 개의 소국으로 분리되었다(1031~1086). 그 후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알모라비데족(Almoravide, 1090~1145)과 알모아데족(Almohade, 1147~1248)이 차례로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다. 그러나 1212년그리스도교 연합군이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de Tolosa)에서 이슬람 군대를 격파한 뒤, 세비야를 수도로 한 알모아데는 점차 영토를 잃고 몰락하였고, 결국1249년에 아랍 세력은 그라나다(Granada)를 중심으로한 나자리(Nazar) 왕국으로 축소되었다.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Isabel)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Fernano) 왕이 결혼하여 정치적 통일을 이룩한 그리스도교 세력은, 1482년부터 최후의 무어인 왕조인 그라나다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10여 년 만인 1492년에 함락시켰다. 이로써 800여 년에 걸친 국토 수복 전쟁은 막을내렸고, 아랍인들은 다시 아프리카로 쫓겨났다. 그러나 비록 아랍인들은 물러났지만 그들은 알람브라(Alhambrora)궁전을 비롯한 화려한 문화 유산을 남겼고, 농업과 상업등 실생활에서, 그리고 수학 · 천문학 · 철학 등 학문적으로도 큰 기여를 하였다. 이 결과 스페인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 유대교 등이 혼합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복합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은 역사적으로 스페인에 큰 의미를 주었는데, 즉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 모두에게 이 전쟁은 성전(聖戰)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민족 의식이 희박했던 스페인은 정체성이 확고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종전(終戰)과 함께 그리스도교 통일 왕국이 출범하면서 스페인의 역사에서 근대기가 시작되었다.
[국토 통일과 근대의 개막] 국토 수복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구심점이 된 것이 가톨릭 신앙이었으므로, 이 전쟁은 서쪽에서 벌어진 십자군 전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812년에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사도 야고보가 백마를 타고 나타나 이슬람인들을 무찔렀다는 소문이 퍼지자 병사들의 사기가 충천해졌으며, 성인은 스페인군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본래 사도 야고보는 스페인에서 선교를 한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순교했는데 그 제자들이 유해를 이곳으로 운구하였다고 한다. 교황 갈리스도 2세(1119~1124)에 의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성지로 지정된 후에는 로마와 예루살렘 다음가는 성지로 각광을 받았으며, 특히 오스만 터키의 점령으로 예루살렘 순례 길이 막히자 유럽 각지에서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 성지의 발굴은 유럽 사회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중심으로 자기 정체성을 다지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립되었던 스페인이 예술적 · 과학적 · 사상적으로 개방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국토 수복 전쟁 초기에 스페인의 수도자들은 주민들의 신앙을 유지시키고 정복지 땅을 개척하는 등 간접적으로 전쟁의 수행을 지원하였다. 본격적인 수도원 운동은 클뤼니 수도원이 들어오면서부터였는데, 프랑스에서 전 유럽으로 퍼진 클뤼니 개혁 정신이 스페인에도 도입되어 많은 수도원들을 흡수하였으며 국토 수복 전쟁을 위해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12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클뤼니 운동이 시들해지자 이번에는 시토회의 활동이 활발해져 알폰소 7세의 지원을 받으면서 많은 수도원이 세워졌다.
한편 13세기에는 탁발 수도회들이 스페인에 진출하였는데 특히 도미니코회와 작은 형제회가 대표적이었고, 이외에도 가르멜회 · 삼위 일체 수도회 · 메르체다리오회 등에서는 주로 이교도들에게 포로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구해 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374년에는 예로니모회가 세워졌고 15세기에는 카르투지오회가 전성기를 맞았다. 한편 무어인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1158년에 칼라트라바(Calatava) 기사 수도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객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1161년에 산티아고 기사 수도회 등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국토 수복 전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국토 수복 전쟁이 끝난 1492년은 콜럼버스(C. Colum-bus, 1451~1506)가 이사벨 여왕의 지원을 받아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해로, 또 다른 의미에서 스페인에 매우 중요한 해였다. 이를 계기로 스페인은 제1의 항해 국가로 부상하였고, 신대륙의 넓은 영토를 식민지화하였으며 이곳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함으로써 오늘날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국가들이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사벨 여왕은 시스네로스(Cisners) 추기경(1436~1517)의 자문을 받아 교회 개혁에도 앞장섰고, 가톨릭 신앙을 중심으로 근대 국가적인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 시책의 일환으로 여왕은 1478년에 종교 재판소를 부활시켜 무슬림과 유대교인들뿐만 아니라 이단자 · 마술사 · 미신 신봉자 등을 감시하고 처벌하였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이단 심문소장은 유대인 집안 출신의 도미니코회 수사 토르케마다(Torquemanada, 1420~1498)로, 그는 광신적인 법 집행으로 유명하였다. 이사벨 여왕은 국토 수복 전쟁이 끝난 직후 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전격적으로 국외로 추방시켜 버렸는데, 스페인의 순수 혈통주의와 그리스도교 수호 의식은 17세기 초 30만 명에 달하는 무어인들의 추방으로 이어졌다. 이 두 추방 사건은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회적인 통합을 이룩하는 데는 기여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스페인 경제를 취약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건설과 반종교 개혁] 1504년 이사벨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합스부르크 왕가에 시집가있던 딸 후아나(Juana)의 아들이 카를로스 1세(1516~1556)로 즉위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가 시작되었다. 카를로스 1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1556~1598)시기에 스페인은 내부적으로는 지리적 · 정치적 · 사회적 · 군사적 · 언어적 통일을 이루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나폴리 · 시실리 · 네덜란드 · 필리핀 · 북부 아프리카·아메리카 대륙 등 수많은 해외 식민지를 거느린 명실상부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룩하였다. 한편 카를로스 1세의 재위 기간은 유럽 전역에 종교 개혁이 거세게 일어나 교회가 분열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함께 종교 개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트리엔트 공의회를 계기로 반종교 개혁의 선봉에 섰다. 그 배경을 보면 첫째, 이미 루터의 종교 개혁이전부터 시스네로스 추기경 등 교회 지도자들이 에라스무스(1466~1536)로 대변되는 근대적인 인문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교육과 신학 체계 등을 개편해 왔기 때문이었다. 둘째, 교회가 상대적으로 부패하지 않았고, 셋째는 국왕이 절대주의 체제에 기반을 두고 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하여 성직자 임명과 통제에 관한 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넷째, 성직자들은 왕가에 전폭적인 신뢰를가졌고, 다섯째는 이단 심문소가 초법적인 권한을 부여받아 이단의 싹을 미리 제거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바스크 지방의 귀족 출신인 이냐시오 데 로올라(Ignatio de Loyola, 1491~1556)가 1534년에 창립한 예수회는 반종교 개혁의 산물인 동시에 그것을 추진해 나간 중심 축으로서, 영성 수련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무대로 하는 적극적인 복음화 사업을 전개하였다. 신앙심이 깊었던 펠리페 2세 시절에는 스페인의 반종교 개혁적 성향이 더욱 강해져, 확고한 정교 일치를 이룬 가운데 개혁적 성향의 글이나 인문주의 서적들의 국내 반입이 금지되었고 사상 검열을 강화하였다. 더 나아가 일체의 외국 유학이금지되는 등 극단적인 쇄국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모두 스페인의 몰락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6세기는 또 맨발의 가르멜회를 창립하여 수도원을 개혁하고 많은 분원을 창립한 아빌라의 데레사(1515~1582)와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으로 대표되는 위대한 영성 신학과 신비 문학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제국의 몰락과 황금 세기] 스페인은 중남미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금과 은을 전쟁 비용과 사치품 구입 등으로 낭비함으로써 근대적 자본 형성에 실패하였다. 또한 1588년 영국 원정에 나섰던 무적 함대가 패배한 후 유럽 내에서의 군사적 주도권을 상실하였고, 17세기 들어서도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 그리고 카를로스 2세로 이어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국왕들은 대체로 게으르고 무능했으며 정사를 맡은 재상들은 교활하고 부패하였다. 스페인은 정책의 실패와 관리들의 부패로 방대한 해외 식민지를 경영할 능력을 상실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등 각국의 도전을 받아 점차 후진국으로 몰락해 갔다. '백치왕' (白痴王)이라고 불렸던 카를로스 2세(1661~1699)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이 사망하자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 사이에 왕위 계승 전쟁(1700~1713)이일 어났다. 정치적 · 경제적 몰락과는 대조적으로 17세기의 스페인은 문학과 예술에서 걸작들이 쏟아져 나온 소위 "황금 세기" (Siglo de Oro)였다. 불후의 명작인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M.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 연극의 로페 데 베가(L. de Vega, 1562~1635) , 칼데론 데 라 바르카(C. de la Barca, 1600~1681), 티르소 데 몰리나(T. de Molina, 1579~1648) , 그리고 회화의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벨라스케스(D. Velizquez, 1599~1660) , 무리요(B.E. Murillo, 1617~1682) , 수르바란(F. de Zurbarán, 1598~1664) 등이 활약했다. 이 시기의 문학과 예술 사조를 가리켜 바로크(baroco)라고 하는데, 르네상스 미학의 합리성 · 규범성 · 명증성에 반하여 역동적이고 과식적인 경향을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영원으로의 갈망이 숨어 있어 흔히 반종교 개혁의 예술이라고 불린다.
〔부르봉 왕가의 등장]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뒤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公)이 펠리페 5세(1700~1746)로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가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에서 도입한 절대 군주제를 통하여 국가 권력을 키우고 교회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편, 카스티야 지방을 중심으로 스페인의 통합을 꾀하였다. 특히 페르난도 6세(1746~1759)는 교황청과 1753년에 맺은 정교 협약을 통하여 거의 모든 성직 임명권을 가짐으로써 교회에 대한 절대 왕권의 우위를 확인하였다. 또 카를로스 3세(1759~1788)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계몽 군주로서 역시 강력한 전제 정치를 실시하고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등 스페인의 근대화에 힘썼다.
1767년에는 재상 아란다(P. Aranda, 1719~1798)의 지휘 아래 6,000명의 예수회 회원들을 전격적으로 추방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카를로스 4세(1788~1808)는 프랑스 대혁명(1789)의 자유주의 사상에 경계심을 가져 선왕이 추진해 온 정책을 중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재상 고도이(M. de Godoy, 1767~1851)를 등용하여 절대주의 체제로 역행하였다. 고도이는 포르투갈을 공격하기 위하여 길을 열어 달라는 나폴레옹의 요구를 들어주는 비밀 협약을 1807년에 체결하였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어기고 이듬해 스페인을 점령해 버리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마드리드 시민들에 의해 카를로스 4세가 물러나고 페르난도 7세(1808, 1814~1833)가 즉위하였으나 나폴레옹의 압력으로 왕위를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자 마드리드 시민들을 중심으로 프랑스군에 맞서는 독립 전쟁(1808~1814)이 전개되었고, 1814년 스페인-영국 연합군에 의해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물러남으로써 페르난도 7세는 다시 왕위에 복귀할 수 있었다. 국왕이 나폴레옹에 의해 연금되어 있는 동안 스페인 자유주의자들은 1812년 카디스(Cadz)에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에 입각한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는 복귀한 뒤 전제주의, 종교 재판소 그리고 귀족과 성직자들에 대한 권리를 부활시키고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결과적으로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 운동을 도와 주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페르난도 7세 치하에서 스페인은 쿠바 · 푸에르토리코 · 필리핀을 제외한 모든 식민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카를로스 전쟁] 페르난도 7세는 1833년 세상을 떠나면서 여자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법령을 개정하여 어린 딸 이사벨 2세에게 양위하고 어머니인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ristina)로 하여금 섭정하게 하였다. 그러자 그의 동생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Carlos Maria Isidro,1788~1855)가 왕권을 주장하며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제1차 카를로스 전쟁(1834~1840)이다. 1839년 에스파르테로(Espateroo) 장군과 카를로스파의 마로토가 베르가라에서 휴전을 하면서 전쟁은 끝났지만, 카를로스파는 이후로도 두 차례에 걸쳐 내전을 일으킴으로써 19세기 내내 스페인의 정치 상황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카를로스는 교회와 농민 등 보수주의 세력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의 패배로 교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에스파르테로의 압력으로 1840년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섭정이 막 을 내리고, 1843년 여왕의 성년이 인정되면서 정식으로 이사벨 2세 시대(1843~1868)가 개막하였다. 이 기간 동안 신흥 부르주아가 형성되면서 주요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고, 1845년에는 자유주의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행정의 중앙 집권화를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여왕치세 말기인 1856~1866년에는 온건파이며 왕당파인 나르바에스(R.M. Narváez, 1800~1868)와 자유주의 연합의 오도넬(L. O'Donnel, 1809~1867)이 번갈아 집권하였으며, 외부적으로는 아프리카 전쟁(1859~1860), 산토도밍고 병합(1861), 멕시코 개입(1861~1862), 칠레와 페루에 대한 태평양 전쟁(1864~1866) 등 해외 전쟁에 주력하였다. 오도넬과 나르바에스가 죽은 뒤 곤살레스 브라보는 절대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려 하였으나 이미 왕정은 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마침내 1868년 토페테(Topete) 장군에 의한 공화파 혁명이 일어나 왕당파 군대를 격파하였고, 여왕이 망명하면서 왕정은 단절되었다. 이후 입헌 군주제가 채택됨으로써 이탈리아의 왕자인 아마데오 데 사보야(AmadadodeSabya)a)가 1870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약 2년 뒤 물러나고 1873년 2월 제1 공화국이 성립하였다. 공화국은 반교회주의를 표방하여 교회에서의 결혼을 금지시키고 교황청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제1 · 2 공화국과 반교회 운동] 제1 공화국은 단지 11개월 만인 1874년 1월에 파비아 장군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면서 세라노에게 정권이 넘어가 과도 체제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 해 12월 캄포스 장군과 리베라(Primo de Rivera, 1870~1930) 장군이 봉기를 일으켜 이사벨 2세의 아들인 알폰소 12세(1874~1885)를 추대함으로써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였고, 아울러 1876년에 제정된 헌법에 의해 가톨릭 교회는 다시 국교로 인정되었다. 알폰소 12세가 유복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왕비인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섭정(1885~1902)을 실시하였는데, 16~17세기에 시작된 스페인의 몰락은 이 기간 동안 절정에 달하였다. 즉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마지막 남은 식민지였던 쿠바 · 필리핀 · 푸에르토리코의 상실로 국민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국내 정치는 갈수록 혼미해져 갔다. 이에 자극을 받은 가니베트(A. Ganivet y Garcia, 1865~1898) , 바로하(Pio Baroja y Nessi, 1872~1956)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 1864~1936) , 마차도(Antonio Machadoy Ruiz, 1875~1939) , 바예 잉클란(R.M. del Valle-Inclan,1866~1936)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작가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국민 정신 운동인 "98세대 운동" (Generaciondel 98)이 일어났다. 그러나 스페인의 혼란은 알폰소 13세(1902~1931) 시기에 가중되었으며, 특히 1888년에 결성된 노동자 연맹' (UGT)을 비롯하여 노동자 계급 · 교회 · 군부 · 프리메이슨 · 지방 자치 주의자 · 자유주의자 · 사회주의자 등 여러 세력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보수주의의 상징인 교회와 적대적으로 대립하였던 노동 운동은 반교회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교회에 대한 사회적 박해는 1909~1912년 사이에 극에 달하였다. 특히 1909년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난 노동자 폭동으로 68개의 성당과 수도원이 약탈당하였고 138명의 성직자들이 학살당하였으며, 수도원은 정부의 사찰을 받고 종교 교육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이로 인해 스페인과 교황청의 외교 관계마저 단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난국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혼란을 수습한 리베라 장군은, 1923~1930년에 걸쳐 독재 정치를 펴다가 1920년대 말의 세계 경제 공황의 여파로 사임하였다. 이어 1931년에 실시된 선거에서 공화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왕정이 폐지되고 제2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진보주의적 성향의 공화국이 들어서자 예수회는 강제 해산되었고 반교회 세력에 의하여 마드리드의 수도원들이 약탈당하고 불에 타는 등 교회는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33년 여성이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한 선거에서는 우파가 승리를 거두었으나, 1936년 선거에서는 좌파 연합인 인민 전선(FrentePopular)이 다시 승리하여 마누엘 아사냐(Manuel Azaiia yDiaz) 수상을 중심으로 사회 개혁이 추진되었다.
〔프랑코 독재와 민주화) 좌파 정권의 탄생과 개혁에 불안을 느낀 군부가 프랑코(Francisco Franco Bahamonde, 1892~1975) 장군을 중심으로 일으킨 쿠데타로 내전(1936~1939)이 발발하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성격을 지닌 이 내전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승리한 프랑코는 약 40년 동안 종신 총통으로서 독재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파시름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프랑코 정권은 전후 국제 무대에서 고립을 면치 못하였으며, 미국의 유럽 원조 계획인 마샬 플랜의 수혜국에서도 제외되어 1945~1950년 사이에는 심각한 경제 공황을 겪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 스페인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한 미국과 동맹 조약을 맺고 1955년에는 유엔에 가입하면서 외교적인 고립에서 벗어났으며, 미국의 경제 원조와 관광 산업의 호황으로 1960년 이후에는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이와 함께 언론 자유의 완화(1966), 종교의 자유(1968), 국가 원수와 내각의 분리(1973) 등이 실시되었다. 한편 1969년에는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가 총통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 직후 왕위에 올랐다. 프랑코는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스페인을 구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자신을 보냈다고 말할 정도로 좌파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보였다. 반면에 독실한 신앙심으로 교회와 평생 이상적인 관계를 지속하였으며, 초등학교와 중 · 고등학교의 교육을 대부분 교회에 위탁하였다. 이 때문에 프랑코 체제하에서 국교로서 특권적 위치를 보장받은 교회는 독재와 결부되어 부정적인 이미지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 프랑코 시대에는 '오푸스 데이' (Opus Dei)의 재속 회원들이 정치 · 경제 등 각계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프랑코 사후 권력의 공백을 맞은 혼란 상황에서 후안카를로스 1세(1938~ )는 1976년 개혁파의 젊은 정치가 수아레스 곤살레스(Adolfo Suárez Gonzalez, 1932~ )를 수상으로 임명하였고, 1978년에는 새로운 입헌 군주제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프랑코 독재의 잔재를 일소하고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새 헌법은 가톨릭 신앙의 사회 도덕적인 가치는 인정하였지만, 공식적으로는 국교 제도를 폐지하였다.
스페인의 민주화는 수구파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특히 1981년 2월 무장 군인들이 국회를 점령하고 정부 각료들과 의원들을 볼모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국왕의 용기와 단호한 의지에 막혀 실패함으로써 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 사태 이후에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일부의 우려를 씻어 내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각인되어 국민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한편 1982년의 선거에서는 수아레스가 이끌었던 '중도 민주 연합' (UCD)이 패배하고 펠리페 곤살레스(Felipe Gonzalez, 1942~ )의 '스페인 사회 노동당 (PSOE)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좌파 정권이 집권에 성공하였다. 곤살레스 수상의 사회 노동당 정권하에서 스페인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1982)와 유럽 공동체(1986)에 가입하였고, 1991년에는 중동 평화 회담을 개최하는 등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다져 놓았고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권력형 비리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경제 침체로 실업자들이 늘어나면서 사회 노동당의 인기는 급락하였다. 그 결과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José Maria Aznar, 1953~ )가 이끄는 우파의 대중당(Pari-doPopular)이 1996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어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대중당은 2000년 3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과반수가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다시 승리하여 집권2기 시대를 개막하였고, 아스나르는 수상으로 재선출되었다.
〔현 황] 스페인 교회는 1996년 현재 대교구 14개, 교구 54개(군종교구 포함) 등 총 68개의 교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본당수는 2,102개이지만 이 중에서 사제가 없는 본당이 10,599개에 달한다. 사제가 있는 본당 중에서 교구 사제가 맡고 있는 본당은 11,503개이고 나머지는 수도회 소속 사제가 맡고 있다. 추기경 6명, 대주교 21명, 주교 92명, 신부 28,237명(교구 소속 18,976, 수도회 소속 9,261), 종신 부제 210명, 수사 5,369명, 수녀63,139명이 있다. 신부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60세 이상이 52%이고, 40~59세 사이는 35%, 40세 미만은 13%로서 점차 고령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신부 1인당 신자 비율은 1,303명이다. 교회는 본당 사목 이외에도 빈민 구호 · 농촌 · 실업 · 유아 시설 · 여성 · 노인 · 마약 · 에이즈 · 집시 · 외국인 · 장애인 등 여러 문제에 걸쳐 활발한 사회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음악회 · 전시회 · 도서관 등 각종 행사와 활동을 통하여 그 지역 사회의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1997년 통계에 의하면 가톨릭 신자 비율은 93.57%를 기록하고 있으나 빠짐없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비율은 23%에 지나지 않고 거의 매주 미사에 참례하는 비율은 11.2%, 대축일에만 참례하는 비율이 19.1%, 그리고 거의 무관심한 경우가 45.3%에 달한다. 스스로를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하는 비율도 25%에 못 미친다. 그러나 18~25세 사이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비율이 73%에 달하는 것을 볼 때, 스페인 사람들의 깊은 심성에는 신앙의 불꽃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이들의 신앙은 기복적이며, 하느님은 인간의 약점을 감싸 주고 쉽게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하느님과 개인 사이에는 중개자가 필요 없이 직접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는 경향이 많다. 또한 비록 미사 참례를 하지 않는 집안에서도 자녀들의 첫영성체를 축하하기 위해 친지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고, 주님 공현 대축일에 어린이들은 동방 박사로부터 선물을 받기 위하여 가슴 설레이며 기다린다. 1년 중 여름 휴가를 제외하고 성주간이 가장 큰 휴가철이라는 점 등은 스페인 국민들의 삶의 양식에 교회 문화가 뿌리깊게 박혀 있음을 말해 준다.
이외에도 우엘바(Huelva)의 성모 마리아 순례, 세비야의 성주간 행사, 톨레도의 성체 거동 행렬 등은 이미 종교 행사를 떠나 전세계적으로 관광객들을 몰려들게 하는 문화 행사로 자리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신심은 각별해서 스페인 각지에는 비록 교회의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곳이라고 알려져 순례자들이 몰려드는 장소가 여러 군데 있다. 이 밖에도 야고보 사도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전,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곳에 세워진 사라고사 대성전,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썼다는 성배가 보존되어 있는 발렌시아 대성전, 아메리카 대륙 복음화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검은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 과달루페 성당, 예수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에게 나타난 아빌라의 가르멜 수녀원, 카탈루냐인들의 신앙적 고향으로서 검은 성모 마리아가 있는 몬세라트 수도원, 예수회 창립자인 로율라 성인이 수련을 한 만레사의 동굴 등 헤아릴 수 없는 교회 유적들이 전국적으로 산재하여 가톨릭 신앙의 뿌리를 가능하게 해준다. (- 가톨릭 문학, 스페인의 ; 라틴 아메리카 ; 무어인 ; 세르반테스 ; 이시도로, 세비야의)
※ 참고문헌 Anmuarium Statisticum Ecclesiae 1997,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7/ Garcia de Cortázar CO., Breve historia de Espania, Madrid, Alianza Editorial, 1994/ Hans J. Hoefer dir., Esparia, Madrid, Ediciones El Pais, 1988/ J. Lenzenweger CO. dir., Historia de la Iglesia cat6lica, Barce-lona, Editorial Herder, 1989/ OESI, Estadisticas de la iglesia cat6lica en Espaia 1995, Madrid, Editorial de la Conferencia Episcopal Espaiiola, 1995/ C. Pérez-Bustamante, Compendio de Historia de Espaiia, Madrid, Ediciones Atlas, 1967. 〔申政桓〕
스페인
〔영〕Kingdom of S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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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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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족이 침입하여 왕국을 세우고 수도로 삼았던 톨레도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