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

[영]Republic of Slovak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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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Czech)와 함께 체코슬로바카아(Cachostidaia)를 이루었다가 연방 공화국의 해체와 함께 독립한 나라로, 공식 명칭은 슬로바키아 공화국(Slovenska Republika). 서쪽은 체크, 북쪽은 폴란드, 동쪽은 우크라이나, 남쪽은 헝가리, 남서쪽은 오스트리아와 접경하고 있다. 면적은 49,036km고, 인구는 5,404,000명(1997)이며, 행정상 독립된 수도는 브라티슬라바(Botisfua)이다. 자파도슬로벤스키(Zinpadslolomesky) · 스트레도슬로벤스키(Ste-doslovensky) · 비코도슬로벤스키(Vy5*badolomedi) 등 3개 주(州)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용어는 슬로바키아어. 국교는 없으나 가톨릭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종교가 없는 이들도 많다. 슬로바키아 지역에 최초로 거주한 이들은 켈트족이었는데, 1세기 초에 로마인과 게르만족의 압력을 받았으며, 5세기 이후에는 이 지역에 여러 게르만 왕국들이 세워졌고, 6~7세기에 : 이르러서는 게르만족 사이에 점차슬라브족들이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이어 9세기에 대모라비아GrmeatMima) 제국에 합병되었고, 906년 대모라비아 제국이 붕괴된 후에는 헝가리에 속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헝가리로부터 분리되어 체크인들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단일 국가를 세웠다.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이 독일에 할양되었고, 그 해 10월 6일 슬로바키아는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국가 안에서 자치권을 선포하였다. 이에 독일은 이듬해 3월 14일 프라하를 점령한 뒤 슬로바키아를 독립시켜 독일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 독일에 반대하는 격렬한 봉기가 빈번히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1945년 초에는 소련군의 점령을 받게 되었다. 소련군의 점령하에서 체크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은 완전한 평등을 전제로 다시 체코슬로바키아 국가를 세우기로 합의하였으나, 1948년 2월 공산당에 의한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되면서 주도권은 체크인들이 행사하게 되었다. 1989~1990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이 실권한 후 슬로바키아의 공식 명칭에서 '사회주의' 라는 말이 삭제되었고, 1993년 1월 1일 체크와 슬로바키아가 연방 국가에서 분리되면서 각각 독
립국이 되었다.
〔복음의 역사] 8세기경 아일랜드와 독일의 선교사들이 독일 주교의 관할권에 속해 있던 슬로바키아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후, 민족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슬로바키아의 통치자 라스티슬라브(Rastislav, 846~870)는 863년에 성 치릴로(St.Cyillus, 827~869)와 성 메토디오(St. Methodius, 825~885)를 초청하였다. 이곳에서 두 성인은 '슬로바키아의 사도 로서 존경받았는데, 특히 치릴로 성인은 선교 활동을 펼치는 동안 슬라브 알파벳의 기원이 된 글라골체(Glagolinc)를 만들어 슬라브인들이 복음에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모라비아 제국이 붕괴한 직후, 슬로바키아의 문화와 언어는 비잔틴-슬로바키아 전례가 보존되고 있던 동슬로바키아의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라틴 문화와 언어로 대체되었다. 이와 함께 로마 전례를 따르는 루마니아인과 루써니아인(현재의 우크라이나인)이 이주함에 따라 신자수가 늘어났고, 880년에는 니트라(Nita) 교구가 설립되었다. 또한 슬로바키아의 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베네딕도회는 1000년에 조보르(Zobor), 1075년에 벤나딕(Benadik), 1143년에는 오파트스카(0paiska)에 분원을 마련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 종교 개혁 사상은 슬로바키아에 거 주하던 독일인들에게도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귀족들에게도 급속히 퍼져 나갔는데, 그들은 피지배자들에게도 프로테스탄트 사상을 전파하고자 했다. 당시 가톨릭은 국유화되어 있었으므로, 올라후스(M. Olahus,1493~1568) 대주교는 트르나바(Trmava)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고, 예수회를 초청하는 등 가톨릭 개혁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600년경에 이르러서는 온 나라가 프로테스탄트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가톨릭 개혁을 책임지고 있던 파즈마니(P. Pizmány, 1570~1637) 추기경은 1635년 트르나바에 대학을 설립하여 예수회에서 운영하게 하는 등 가톨릭 재건 작업을 전개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정치적 혼란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1781년 조세프 2세(Joseph II ) 황제가 종교 관용에 관한 율령을 발표하면서 종교적인 상황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즉 18세기 중반 동방 교회 신자들이 가톨릭과 일치를 이루면서 신자수는 전 인구의 80%까지 증가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반스카비스트리차(Banska Bystrica) 교구가 설립되었고, 1776년에 로즈냐바(Roinava) 교구와 스피스(Spis) 교구, 1804년에 코시체(Kosie) 교구, 1818년에는 비잔틴 전례를 따르는 프레쇼프(Presov) 교구가 설립되었다. 한편 1800년경에 민족적인 각성이 일어났는데, 특히 가톨릭 사제였던 베르노락(A. Bernolak, 1762~1813)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체코어 대신에 슬로바키아어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점차 슬로바키아어가 슬로바키아인들에게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면서 슬로바키아인과 체코인 간의 유대에 금이 가게 되자, 헝가리는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즉 1875년 모든 중등학교에서 슬로바키아인의 입학이 금지되었고, 1907년에는 초등학교까지 확대되어 슬로바키아인들은 교육조차 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1900년 초에 지적 계층으로는 사제들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1944년부터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종교 탄압이 시작되어 이듬해에는 교회 부설 학교들이 국유화되었고, 신학교 교육 또한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1972년에는 수녀원을 해산하라는 정부 명령이 내려졌다. 1993년 독립 이후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여전히 교회 활동에 관여를 하고있다. 1996년 현재 3,571,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있으며, 대교구 2, 교구 5, 본당 1,440개에 추기경 2, 대주교 2, 주교 12, 신부 2,255(교구 소속 1,752, 수도회 소속 503), 종신 부제 7, 수사 202, 수녀 3,571명이 있다.(-) 체크)
※ 참고문헌  L. Macfarlane, 4, PP. 589~598/ 2000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338/ E. Wiskemann, (EB) 20, pp. 662~663/ Ammuario Pontificio 1998, Città del Vaticano, 1998/《EU》 Les Chiffres du Monde, p. 467.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