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아일랜드의 갤빈(Edward Galvin) 신부에 의해 창설된 선교 단체. 정식 명칭은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이지만, '성 골롬반회' 라 약칭하기도 한다. 주보는 아일랜드 출신 성인인 골롬바노(Columbanus, Bobbio). 교황청 인류 복음화성(포교성성)의 지시를 받으며, 아일랜드 더블린에 본부를 두고 있다. 한국 지부는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6-140 소재.
〔설립과 목적〕 갤빈 신부는 본래 미국 뉴욕교구 브룩클린 지구에서 사목하던 선교사였으나, 1912년부터 중국에 파견되어 활동하면서 그곳 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1916년 아일랜드로 돌아온 후 메이누스의 성 페트릭 대학 교수로 있던 블로윅(John Blowick) 신부와 함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를 창설하였다. 따라서 처음 회원들이 진출한 지역은 중국에 국한되었으나, 이후 필요에 따라 그 선교 지역은 아일랜드 · 미국 · 오스트레일리아 · 영국 · 뉴질랜드 · 필리핀 · 한국 · 미얀마 · 일본 · 피지 등지로 확장되었다. 이 중 맨 처음에 시작한 중국 선교는 1950년 그곳 정부에서 선교사들의 입국을 거절함에 따라 중단되어야 했다. 그러자 당시의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골롬반회에 라틴 아메리카 선교를 요청하였고, 이때부터 회원들은 페루 · 칠레 등지에서 가난한 도시 정착민들을 찾아 선교에 나서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 파키스탄 · 대만 · 브라질 · 자메이카 · 벨리즈 등지로 선교 지역을 넓혀 왔다.
성 골롬반회의 설립 목적은 우선 국경과 언어 · 종족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증거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삶과 문화 안에 깃들어 있는 역사의 서열을 인정하고, 가난한 이들과의 결속을 굳게 하는 동시에 하느님 창조 목적에 부합되는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면서 회원들을 세계 각국으로 파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세부 사항으로 첫째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일, 둘째 그 지역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이 복음화될 수 있을 때까지 그 교회의 성장을 돕는 일, 셋째 다른 종교의 전통과 그리스도 신앙 사이의 대화를 증진시키는 일, 넷째 지역 교회들의 교류를 촉진시키는 동시에 특히 본 선교 회를 파견한 지역과 파견된 지역 사이의 교류를 돕는 일, 다섯째 선교 대상 지역의 신자들 또한 선교의 의무가 있음을 자각하도록 돕는 일 등을 손꼽고 있다.
〔영성과 인적 자원〕 성 골롬반회의 영성과 지향은 설립자들이 채택한 초기 선교사들의 좌우명인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Perigrinari pro Christo)라는 짧은 표어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고 자신을 비우는 사랑을 우선으로 하고, 주보 성인 골롬바노가 6세기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한 일과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Christi simus non nostri)라고 가르친 데 바탕을 두고 있다. 또 선교사들은 이러한 영성을 통해, 첫째 다른 나라에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데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둘째 다른 종교 · 문화 역사를 지닌 사람들을 통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민감히 들으며, 셋째 선교회 내 다른 회원들과는 물론 지역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과 삶을 함께 나누고 그들에게서 배우려는 열정을 지니고, 넷째 자신의 사고 방식과 행동을 조절하며, 다섯째 어느 곳이든 파견된 지역에 기여하려는 자세를 갖추는 것을 선교 정신이요 사명으로 삼고 있다.
골롬반회에서는 이와 같은 영성과 정신을 실현할 인적 자원으로 우선 선교 사제들로 '종신 회원' 을 양성하고 있다. 이들은 선교사로서 일생 동안 하느님께 몸바쳐 봉사할 의향을 가진 사람들로, 1982년 총회에서는 영어 문화권이 아닌 지역 출신자들도 이 회원으로 영입할 수 있도록 명시하였다. 다음으로 일정 기간 동안 타국의 문화 속에서 일할 뜻이 있는 교구 출신의 '자원 사제' 들이 있다. 이들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준회원의 자격을 갖고, 사목 활동에서는 그 지역 교구장의 지도 아래 활동하면서 골롬반 회원들과 동등한 결정권을 지니며, 계약기간이 종료되고 본 교구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 세번째의 인적 자원으로는 '평신도 선교사' 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선교 성소가 사제와 수도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데 의미를 두고 있으며, 평신도 선교 단체들과 협력하고 아울러 각 평신도 선교사들의 상호 교류 촉진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원 회원' 은 직접 외방 선교사로서 활동할 수 없는 경우에 선교 성소자들이나 선교사들을 영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뒷받침해 줌으로써 그들이 행하는 복음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한국 진출과 활동〕 성 골롬반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33년이었다. 이해 10월 29일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맥폴린(O. McPolin, 林) 신부 등 제1진 10명은 우선 목포시 산정동(지금의 성 골롬반 병원)에 본부를 두고 주로 전라도와 제주도 서쪽의 선교를 담당하였다. 당시 이 지역의 교세는 본당 6개소(목포, 제주, 노안, 광주, 나주, 순천)에 교우수는 2,884명에 불과하였다. 이후 회원들은 이곳 선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1937년과 1939년에는 새로 설정된 광주 지목구와 춘천 지목구의 사목을 맡아 맥폴린 신부와 퀸란(T. Quinlan, 具仁蘭) 신부가 각각 초대 지목(知牧)에 착좌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71년에 신설된 제주교구에도 그 회원인 헨리(H.Henry, 玄)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중 춘천 지목구는 교구로 승격된 이후 지금까지 동 회의 회원이 교구장을 맡아오고 있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선교 활동을 해오는 동안 성 골롬반회원들은 여러 가지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본국인 아일랜드가 일본의 적인 연합군에 가담한 탓에 일제 당국으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일제 당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패색이 짙어지자 골롬반회원들을 1차로 목포에 연금시키는 동시에 맥폴린 신부와 퀸란 신부를 사임토록 강요하였고, 1945년 5월 29일에는 목포의 아일랜드 신부 11명을 강원도 홍천으로 옮겨 연금하였다. 이들은 해방 후 선교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는데, 이때 맥폴린 신부와 퀸란 신부도 다시 지목에 임명되었다. 한편 6 · 25 동란 때의 고초는 더욱 심하였다. 당시 공산당에게 체포된 9명의 신부들 중 7명은 살해되고, 퀸란 신부와 크로스비(P. Crosbie, 趙) 신부는 '죽음의 행진' 을 겪은 끝에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기적적으로 생환, 훗날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이때 살해된 회원들은 광주 지목이던 브렌난(P.T. Brennan, 安) 몬시뇰을 비롯하여 쿠색(T.Cusack, 高) 신부, 오브라이언(J.O'Brien, 吳) 신부, 콜리어(A. Collier, 高) 신부, 맥긴(J. McGinn) 신부, 레일리(P. Reilly) 신부, 캐나반(F. Canavan, 孫) 신부 등이었다.
〔현 황〕 현재 성 골롬반회의 회원 사제수는 모두 800여 명으로 세계 14개국에 나가 활동하고 있으며,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가 아일랜드 · 미국 · 호주에 각각 하나씩 있다. 그 동안 한국 지부에서 활동했던 회원수는 약 250명에 이른다. 특히 1970년대에는 150여 명의 회원이 한국 지부에 등록되었고, 1980년대 초에는 전국 7개 교구 61개 본당에서 사목 활동과 구호 사업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1992년 현재 선교사가 파견된 곳은 27개 본당으로 축소되었다. 이 밖에 한국 지부에서는 알코올 상습 예방, 단(斷)도박 친목 활동, 영성 생활 연구소를 통한 신앙 생활 상담, 노동 사목, 정신 지체인 교육 시설, 그리고 농촌 현장을 통한 선교 사업 등에 참여하면서 한국 교회의 선교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 회원들을 양성하여 다른 선교지로 파견하
고 있다. (→ 골롬바노)
※ 참고문헌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편, <현대 사회 속에서의 골 롬바노회의 선교>(총회 문헌), 1982/ <회칙 및 훈령>, 1986/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 지부 편, <한국 지부 대회 자료>, 1982/ 《가톨릭 대 사전》. 〔민 후고〕
골롬반 외방선교회
— 外邦宣敎會
〔영〕Missionary Society of St. Colum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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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롬반 외방 선교회를 창설한 갤빈 신부(왼쪽)와 블로윅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