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時間

[라]tempus · [영]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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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삶의 양식으로, 인간은 여기에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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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삶의 양식으로, 인간은 여기에 속해 있다.

어떤 시각(時刻)에서 다른 시각까지의 사이를 의미하는 개념. 공간(空間)의 상대 개념으로 과거 · 현재 · 미래가 무한하게 연속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인들은 앞으로 시선을 향하고 서 있는 일직선상으로 시간을 파악한다. 다시 말해서 앞에 미래를, 뒤에 과거를 두고 있으며, 이 선상의 점들을 통해서 모든 시상(時想)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현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시간은 추상화된 것이며,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과 구별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 이해는 그리스인들의 시간 이해에 바탕을 둔 것으로, 시간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공간적인 표상들이 시간적인 표상으로 전용되며, 따라서 공간적 병립을 통해 생긴 서열이 시간적 선후 관계의 묘사에 이용된다.
I . 성서에서의 시간
성서에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 개념, 즉 인간사고(思考)의 한 차원으로서 그 안에서 사건들이 일어남으로써 내용이 채워지는 추상적인 틀과 같은 시간 개념이 없다. 즉 과거 · 현재 · 미래라는 상대적인 시간들의 움직임을 인간 생(生)의 움직임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스인들과 히브리인들의 시간 이해의 차이] 고대 셈족에게 시간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내용이나 사건과 동일하였다. 즉 시간은 사건의 개념이며 사건들의 흐름이다. 전도서 3장 1절 이하에서 때 즉 시간은 그 내용에 따라 지칭되고 성격 지어졌다. 이렇듯이 시간에 대한 셈족의 표상은 그 내용의 표상과 긴밀하게 얽혀 있고, 후자없이 전자는 불가능하다. 시간의 양은 시간과 함께 등장하거나 시간 안에서 나타나는 사건들의 내용 배후로 밀려난다. 이러한 시간 이해는 그리스인들의 시간 이해와는 다른 것이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348)에 의하면, 영원은 천문학적인 시간이 아니라 신적 세계의 삶의 양식이다. 이에 반해 시간은 자연 세계 즉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삶의 양식으로, 인간은 여기에 속해 있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ios)에 의하면, 데미우르고스(Drminugox)가 이 세계를 창조하였을 때 부동적이고 정지해 있는 영원의 숫자상으로 진보하는 상(象)을 만들었는데, 이 상이 시간이라고 하였다. 이 시간은 낮 · 밤 · 월 · 년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이렇게 나누어질 수 있는 시간은 물리학적인 것이고, 현재 · 과거 · 미래는 심리학적인 범주들이다. 그러나 양자 모두 감성적이고 무상한 세계에 속해 있다. 이에 반해 시간의 원상인 신적 시간은 영원을 뜻한다. 시간은 부동적이고 불변적인 영원의 구상적이고 동적인 모방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것은 시간의 속박 아래서 낡게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파괴되므로, 시간은 건설적이기보다는 파괴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신과 신적 세계를 시간과 무상, 변화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와는 달리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동일하기 때문에, 각 사람의 모든 정신적 내용들에는 종합적인 통일성이 부착되어 있다. 육체와 외모는 변하고 생의 경험들은 증가되지만, 인간 자체, 그의 의식 자체는 여전히 동일하게 머문다. 내적으로 보면 인간 한 개인의 경험들은 통일성, 즉 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가상적인 시간 선상의 어떤 점에 자기 자신을 옮겨 놓는 대신 자신의 삶의 시간 주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스인이 3가지 시상을 통해 스스로를 공간 안으로 옮기고 일직선상의 상태에 고정시키는 반면에, 히브리인들에게는 말하는 자의 의식이 자신들의 행위들에 대한 방향 설정의 중심점이다. 이로써 과거 · 현재 미래라는 상대적인 시간들은 공간과의 결합에서 벗어나고, 모든 시간의 움직임은 인간 자신의 생의 움직임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말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행동들은 오로지 두 가지, 즉 완료된 것(완료)과 완료되지 않은 것(미완료)이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시점들과 시차들은 극히 부차적인 역할을 한다. 사건도 하나의 연관성이 있는 전체이다. 이 전체성을 일련의 조각들로, 혹은 시점들로 나누거나 규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시간상 많은 차이가 나는 사건들일지라도 그 내용이 일치한다면 동일한 사건, 또는 동시에 발생한 사건으로 간주할 수 있다. 예컨대 아모스를 비롯한 많은 예언자들이 자기가 살던 시대에 출애급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표현하였다(아모 2, 9-11). 의미 심장한 역사적 사건들은 지울수 없는 사실들로 한 민족의 삶 속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사건들의 질적인 차이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성서의 시간 용어들] 구약성서 : 구약성서에는 과거 · 현재 · 미래라는 시간의 범주를 가리키는 특별한 용어가 없다. 시간을 뜻하는 단어로 가장 널리 사용된 '에트 (ID, 약 290회)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 순간, 또는 시점을 의미한다(출애 9, 18 : 2역대 25, 27). 이 시점을 결정짓는 사건이 얼마나 긴가 하는 것은 관심 밖이고, 따라서 시점은 오랜 기간으로 바뀔 수도 있다(1열왕 11, 16 : 예레 50, 16). 히브리어에서는 시간과 시간 내용이 논리적 구별 없이 나란히 존재한다(에스 4, 14 ; 예레 49, 8). 때로 '에트' 는 어떤 일을 위한 올바른 때, 적절하고 좋은 때를 가리키기도 하지만(1사무 11, 1 : 1열왕 12, 32 : 시편119, 126 : 전도 3, 1-8 ; 하깨 1, 2-4), 종말론적인 문맥에서 '에트' 는 심판이 임박한 때(이사 13, 22 : 예레 27, 7 ;에제 7, 7. 12 : 30, 3)를 가리킨다.
'용' (ㅁi”)은 밤과 대조되는 낮을 뜻하며, 주로 어떤 사건의 시점을 가리킨다. 시점을 가리키는 이 말의 용법 때문에 결정적인 사건들을 ····의 날' 로 표현하는 관습이생겼다(에제 34, 12 ; 오바 1, 12 : 이사 9, 3 ; 호세 2, 2). 가령 야훼의 결정적인 종말적 개입은 "야훼의 날" . "그날"이다. 다소 정확하게 한정된 시간을 의미할 때는 보통 복수형인 '날들' (D72)이라고 말한다(창세 26, 1 : 1사무 2, 31).
또 '케츠' (下Р)라는 단어로도 표현하였는데, 이 말은 '잘라 버리다' 라는 뜻의 '카차츠' (丫꼭)에서 파생된 것으로, 종말론적인 심판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아모 8, 1-2). 이 단어는 사해 사본에서 '시간' · '시점' · '기간' 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종말론적 표현이 되었다(1QS 1, 14). 그리고 '아하리트' (口”刀口×)는 '끝내다' · '마감하다' 라는 뜻의 단어로서 '나중에 오는 것' 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와 반대되는 '카담' (ㅁㄱㄹ)은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 '처음에' . '동쪽' ·'전에' . '오래된' . 고대에' 등의 의미이다(신명 33, 27 : 이사 19, 11).
구약성서에는 일시성과 대조되는 영원성을 가리키는 특별한 단어가 없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 양 방향으로 멀리 나가는 끝없이 길고 불변적인 기간을 나타낼 때 '을람' (ㅁ〉)少)이 자주 사용되었다(창세 9, 16 : 1열왕 2, 33 : 이사 40, 28 : 예레 31, 3). 이 단어는 독립적인 명사로 사용되지는 않고 항상 전치사 ···로부터' (ina)와 함께, 또는 ····까지' (ㄱ), 7)와 결합되어 사용되었는데, '가장 먼 시간' 이라는 의미이다. 종종 영원성 또는 궁극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70인역 성서 : '크로노스' (xpovos)는 시간과 때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일반 명사로 '폴루스' (roxivis, 많은) · 미크로스 (unppos, 적은) 등의 형용사와 함께 측정 가능한 시간의 양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70인역 성서에서 이 단어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어 보통 구약의 날' (ㅁi', ㅁm2)을 의미할 때 사용되었다. 크로노스노스' 에 해당하는 성서 히브리어 단어는 없다.
대부분의 경우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에트' (ny)는 70인역 성서에서 '카이로스'' (koupos)로 번역되었다. 날이나 순간을 의미하는 '오라' (6jpa)나 '해메라' (ninusox) 등의 단어들도 있으나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다. '카이로스 는 본래 '결정적인 것' · 본질적인 시점' 을 뜻하는데, 70인역에서는 대체로 야훼의 결정적인 시점 즉 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시간의 길이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명사 '아이온' (oicciv)과 형용사 '아이오니오스'(oincimos)가 70인역에서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들은 주로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올람' 과 '아드' (ㄱ)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온' 은 본래 '생명력' 또는 '생명' 을 의미하다가 후대에 와서 '세대' · '생애' 를 뜻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긴 시간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영원' 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신약성서 : '크로노스' 는 신약성서에서도 비교적 드물게 나타나는데, 이 단어는 측정 가능한 기간을 표현하는 말로서 기본적으로는 그리스의 시간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단수는 '기간' 을 의미하고, 양을 나타내는 형용사에 의해 수식되는 경우가 많다(마태 25, 19). 복수형은 보통 더 긴 시간을 가리킨다(루가 23, 8 : 2디모 1, 9). 단수형과 복수형 둘 다 같은 의미를 지칭하기도 하였는데, 예컨대 "무지의 시대" (사도 17, 30), "여러분은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1베드 1, 17) 등이다. 또 신약성서에 나오는 '해메라' 의 단수형은 시점을(골로 1, 6. 9 : 히브 12, 10), 복수형은 기간을 나타낸다(마태 9, 15 ; 2디모 3, 1). 이러한 점에서 보면 신약성서도 히브리 · 아람어적 용법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종말론적인 시간을 나타낼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루가 17, 24 : 필립 1, 6. 10 : 1데살 5, 2. 5 ; 묵시 6, 17).
신약성서의 시간 개념들 중 특히 중요한 것은 '카이로스 로, 70인역에서처럼 설정된 시점 혹은 결정적인 시점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짧거나 긴 시간(1고린 7, 5 : 사도 17, 26), 고정된 시간(루가 12, 42), 또는 일반적으로 시간을 나타낼 때(마태 11, 25의 "그때") 사용되기도 하였고, 종말론적인 마지막 때를 가리키기도 하였다(루가 21, 8 ; 묵시 1, 3 ; 22, 10). 히브리어 구약성서와 70인역의 영향을 받아 '아이온' 이라는 단어도 사용되었는데, 이는미래(요한 4, 14)나 과거(루가 1, 70)에서 "길고 멀며 끊이지 않는 시간"을 의미하였다. 형용사 '아이오니오스' 는 영원성에 대해 서술할 때 많이 사용되었다(2고린 4, 18 : 히브 9, 12. 15). 시간의 길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아이온' 에 내포되어 있다. '아이온' 은 히브리어 '을람' 과는 달리 시간의 길이 개념이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마태 13, 39-40. 49 : 마르 4, 19) 또는 "현세"(1고린 2, 6)라는 의미로 쓰였다.
[시간과 계시] 구약성서는 역사, 즉 시간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 활동을 증거한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특정 시점을 택하여 심판이나 구원 행위를 함으로써 그 시점들에 특별한 구원사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하느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족장들과 출애급 사건에서 시작된다. 또한 하느님의 새로운 행위들은 시간 속에서 약속되고 성취된다(창세 12, 1-3 ; 13, 14-17 : 17, 6-8 : 여호 21, 43-45 : 판관 4, 6-7. 14 : 13, 5 : 1사무 9, 16 : 2사무 7 : 1열왕 14, 6 이하 : 15, 29 ; 이사11, 1 이하 : 45, 18-25 : 예레 23, 1-8 : 아모 9, 11-12). 따라서 여기서부터 시작과 목적을 지닌 하느님의 구원사가 생겨난 것이다. 역사를 구원사로 보는 구약성서적인 역사 해석은 성서적 시간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편으로는 순종의 결단이 요구되는 '카이로스' , 즉 오늘' . '지금' . '곧' 이 특별히 강조되었고(신명 11, 2. 26. 31 ; 시편 95, 7),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의 흐름이 하느님에 의해 설정된 목적을 향해 가는 통일성을 지니고 있음이 강조되었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시간 안에서 스스로를 유일한 주(主)로 계시하며,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시간의 주로 계시한다. 시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는 하느님이 우주뿐만 아니라 시간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시간성은 하느님이 피조계에 부여하신 존재 형식이다(욥기 1, 21 : 시편 90, 10 ; 이사 40, 6-8). 이러한 인간의 시간성 혹은 무상성(無常性) 속에서 계시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주권에 의해 선택된 어떤 시점들에서(1사무 3, 1-4 : 아모 8, 11-12) 베풀어진 은총이며, 인간은 이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시간 속에서 계시하시기에 시간 속에 사는 피조물을 세심하게 배려한다. 이처럼 시간과 역사를 통해 구원의 수단이 제공되기 때문에 시간과 역사는 구약성서에서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한편 신약성서는 직선적이며 구원사적인 구약성서의 시간 이해를 넘어서 그 개념을 발전시켰다. 모든 신앙의 표현은 시간적 성격을 지니는데, 특별히 육화해서 시간안으로 들어온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죽음의 구원사적 의미와 미래의 재림에 대한 대망(待望)이 그러하다. 구원사의 실현은 하느님이 그의 완전한 권능으로 세운 것이며(사도 1, 7) 갑작스럽게 오게 할(1데살 5, 1-2) 것이면서
'카이로스'' 즉 "정한 때 완성되는 것이다(1디모 6, 15: 디도 1, 3 : 1베드 1, 11). 이러한 사실 때문에 "이제" 혹은 "오늘"을 의미하는 '눈' (vov, 골로 1, 26)과 '세메론'(onjuepov, 히브 3, 7. 13. 15)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여기서 "때가 찼을 때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역사는 모든 시대들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심점을 이룬다(갈라 4, 4). 이 그리스도의 역사는 유일회적으로 단 한 번 발생하는 것이다(로마 6, 10 : 히브 7, 27 : 9, 12. 28 ; 1베드 3, 18). 그런데 그리스도의 역사인 부활과 재림 사이의 시간은 '아직' 과 '이미' 사이의 긴장을 지니고 있다(2고린 5, 17 : 필립 3, 12).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아직' 과 '이미' 사이의 실존 인식 안에서 현재적 시간 인식을 지닌다. (V 때)

※ 참고문헌  T. Boman, Das Hebraische Denken im Vergleich mit dem Griechischen, Vandenhoeck und Ruprecht, 1968(허혁 역,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분도출판사, 1975)/ C. von Orelli, Die hebraischen Symomyma der Zeit und Ewigkeit enetisch und sprachverglei-chend dargestellt, 1871/ G. Delling, Das Zeitverstinchis im NT, Giitersloh, 1940/ E. Jenni, 1962, pp. 642~6491 W. Eichrodt, Heilserfahrung und Zeitverstindnis im AT, Theologische Zeitschrift 12, 1956, pp. 103~125.
[朴炅美]
II . 철학에서의 시간
흔히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 또는 "광음은 화살같다" 고 하는 것은 세월의 흐름이 빠르고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하는 것인데, 이는 세월을 해나 달을 단위로 하여 한없이 흘러가는 시간으로 생각한 것이다. 인간은 바로 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태어나서 시간속에서 살다가 시간 속에서 죽어 간다. 기일(忌日)을 기억하여 제사를 지내며 추모하고, 갓난아이가 태어나면 생년월일시를 기록하고 이를 사주(四柱)라고 한다. 인간은 이처럼 시간의 제약을 면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은 육체를 지닌 까닭에 자연인(自然人)으로서 자연 속에 태어나 자연 속에서 살다가 자연 속에 묻힌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농사를 지으면서 절기를 염두에 두고 달을 바라보며 음력을 따른다. 이렇게 인간은 '자연 시간' 의 지배를 받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고, 흘러가는 세월을 아쉬워한다.
인간은 이 '시간' 을 정확히 재기 위하여 시계를 발명해 냈다. 해시계와 물시계, 진자(振子) 시계로부터 오늘날의 전자 시계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측정에 일정한 기준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간은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면서도 국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 같은 시차는 '태양시' (太陽時)를 기준으로 한 태양력을 따르기 때문인데, 그래서 인간들은 1935년에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기준으로 삼아 세계 공통의 시각을 제정했다. 이것이 '세계시' (世界時)이다.
이렇게 자연 과학을 통하여 일정한 기준이 세워진 시간을 '객관적 시간' 혹은 '물리적 시간 이라고 한다. 이 시간은 자연 현상 속에서 물체들의 운동을 측정하는 데 부합하게 양화(量化)된 시간이다. 또 인간은 살아가면서 서로 만나고 약속하는 일이 많다. 이때 장소뿐만 아니라 시간도 정하는데, 약속 시간을 어긴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은 마치 시간이 가지 않는 듯 더디게 느껴진다. 또 세월을 유수(流水)와 같다고 느끼고 유년 시절을 회상 속에 되살리며, 계절은 반복되고 흐름의 속도는 일정한데도 시간의 빠름과 느림을 느낀다. 이를 '심리적 시간' 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시간을 인간 자신의 기준에 따라서 구분 짓고 규정한다.
[성 질] 상대성(相撲性) : 물리적 시간은 사회적으로도 통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 시간이고, 반면에 심리적 시간은 생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주관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 모두는 상대성을 지니고 있다. 전자는 과학의 영역에서도 사용되는 것으로 '제정된 시간' 이고, 후자는 일상에서 나름대로 느껴지는 시간이므로 상대적이다. 따라서 시간의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런 상대성을 벗어나서 '시간 자체' 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상관성(相關性) : '제정된 시간 을 만든 이는 바로 인간 자신이지만, 그렇다고 시간을 인간의 소관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연 시간 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간을 제정한 유래는 무엇인가? 태음력은 달과 지구와 해와의 상관 관계의 소산이고, 태양시를 기본으로 한 태양력은 지구와 해와의 상관 관계에서 산출되었다. 그런데 태음력과 태양력은 년 · 월 · 일 · 시를 나누는 분할법에 육십분법(六十分法)을 채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산술에서는 십진법을 공용하고 있으므로 이 육십분법 자체도 어떻게 보면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천문학에서뿐만 아니라 물리학에서 말하는 '공간 시간 (space-time)의 시간은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므로 이 또한 상대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태양시든 세월이든 간에 인간이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시간이란 해와 달과 지구와의 상관 관계에서 산출되는 것이므로, '시간' 그 자체로는 아무런 실체가 보이지 않는, 다시 말해 어떤 '실체' 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상반성(相反性) : 시간은 보이지도 않고 어떤 실체도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누구나 '시간 속에서' 산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시간을 의식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실로 시간은 '시간 의식' (時間意識)을 전제로 하고, 시간 의식은 '인간 생존' 을 의미한다. 시간은 시시각각으로 변전(變轉)하는 무상성(無常性)과 그러면서도 다함이 없이 '이제' 로 현재하는 지속성(持續性)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시간의 또 다른 성질인 상반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 · 변화하는 자연 현상의 무상함과 그렇게 변하면서도 그 변동 운행하는 것들이 없어지지 않고 지속됨을 느끼는 우리 인간 생명은 무언중에 '시간' 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런 의식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결국 무상 · 지속 · 시간 · 의식 · 생명 등은 시간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의식을 떠나서 시간은 존재할 수 없고, 살아 있는 생명 없이 시간만이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좋은 대조를 이루는 말은 항상 · 영원 · 존재라고할 수 있다. 항상 존재하는 영원은 언제나 현재하는 것이고, 거래(去來) 무상한 시간이 그래도 다하지 않고 늘 '이제' 로서 현재하니 이 '현재' 라는 현행(現行) 속에서 시간과 영원은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현재하는 시간의 다함이 없는 '무진성' (無盡性) 즉 '이제'로서 지속하는 '순수 지속' (純粹持續)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영원이다. 왜냐하면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는 시간은 어떤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것 즉 '영원자' (永遠者)를 지칭하는 영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념적으로는 영원이 시간의 부정 개념(否定概念)이지만, '실재(實在)의 차원' 에서 말한다면 시간이 영원의 부정 개념인 셈이다.
[철학사적 고찰]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는 의식의 차원에서 '시간' 을 문제시하여 자성적(自省的)으로 깊이 성찰하였다. 그런데 이를 더욱 명석하게 밝히려 시도하고 내적(內的) 시간 의식을 통찰한 사람은 훗설(E. Husserl, 1859~1938)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clees, 기원전 384~322)는 운동의 전후 관계에서 '물리적 시간' 을 자연학적으로 세밀히 분석하였고, 플로티노스(Ploinos, 205~270)는 이를 나름대로 높은 차원에서 정밀하게 비판하였다. 플로티노스는 시간에서 벗어나 영원으로 몰입하여 '일자' (-者)와 합일하는 일종의 탈혼(脫魂, ecstasis)의 경지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한편 자연 법칙의 객관적 인식 가능성을 논한 칸트(I. Kant, 1724~1804)는 시간을 인식 주관의 아 프리오리(apriori)한, 즉 선험적(先驗的) 감성의 직관 형식(直觀形式)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맞서 베르그송(H. Berg-son, 1859~1941)은 그 형식의 무내용성을 비판하면서 시간은 우리의 내적 의식 생명의 직관의 알맹이인 '순수지속' 이라고 하였다.
〔신학과 시간] 시간 속에 들어온 영원, 즉 사람이 된 말씀(Logos)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마지막 숨을 거두고 돌아갈 때까지 하늘에서 내리는 은혜를 입는다. 이를 천시(天時)라고 한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출생과 사망은 자기의 자유 의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말하자면 각 사람의 자유권 밖에 있는 인간 아닌 다른 권능에 의해서 좌우된다. 이를 주관하는 이를 '하늘의 뜻' 또는 '천명' (天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 인간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동안에 하는 일을 하늘의 뜻에 알맞게 할 때, 이것을 시의(時宜)에 맞는다는 뜻에서 시중(時中)이라고 한다.
미사에 참례하고자 하는 이는 누구나 정성을 다하여 미사 시간을 지키려고 한다. 미사 시간은 성당에서 정하는 것이지만, 이 시간은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이 하느님과 만나는 때이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가 성변화(聖變化)된 성체를 거양할 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우러러보고,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고 사랑으로 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를 영할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은총을 받는다. 따라서 성체를 영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 인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한 마음으로 정성되이 받아들이는 이는 곧 '현재로부터 영원' 을 살게 된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왜 인간만 시간 의식을 갖고 있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 시간의 속도가 빨라진다고 느끼게 되는 것일까? 전자는 시간의 근원은 영원이니 그 영원한 존재인 신 즉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아차리라는 것이고, 후자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즉 영원한 삶을 깨달아 더욱 잘 준비하라는 시사(示唆)라고 생각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시간의 근원은 영원이요, 그 영원은 살아 있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안다.
※ 참고문헌  Aristote, Physique, vol. 4, par Henri Carteron, Paris, 1952/ Plotin, Emeéades Ⅲ , traduit par Emile Brehier, Paris, 1956/ W.J. Oates, Basic Writings of Saint Augustine, The Confessions, XI ~ XIV, vol. 1, NewYork, Random House, 1948/ I. Kant, Kritik der reinen Vermunft, Leipzig, 1930/ Herri Bergson, Essai sutr les données immediatees de la conscience, Paris, 1926/ Husserliana, Bd. 10, Haag, 1966/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Tiibingen, 1953/ 金奎榮, 《時論》, 서강 학술 총서 15, 서강대학 교 출판부, 증보판, 1987. [金奎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