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의 사고나 언어의 표현을 끊음, 곧 모든 개념 규정을 부정하거나 배제함을 뜻함. 불교 특히 대승 중관(中觀) 사상의 핵심 개념. 종종 무아(無我) · 연기(緣起) · 중도(中道) · 열반(涅槃) · 반야(般若) · 여래(如來) · 절대(the absolute)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래 어간 sū(svid)는 '부풀어 오르다' 는 뜻이고, '순야' sūnya(空虛, 빈)는 '어느 곳에 어떤 것이 없다 (어느 곳은 어떤 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원 형용사 '순야' (sūnya)와 추상 명사 '순야타' (sūnyata)는 인도 수학의 아라비아 숫자 '0' (零, sūnyam)을 종교적 · 철학적으로 성찰한 결과이다. 이 둘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보통 '공' 또는 '공성' (空性)으로 옮겨 쓰기도 하는데, 이는 단순히 공허 · 부재 · 소멸 또는 비존재(非存在)가 아니라 궁극의 진실과 같은 적극적인 의미로, 소위 부정을 통한 긍정 곧 부단한 부정을 통해서만이 절대에 이른다는 가르침을 표현한다.
'순야' (sūnya)는 교의적으로 우리가 내적 · 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有, bhāva〕에 그 고유 불변의 실체(實體, 自性, svabhāva)가 없다〔無自性〕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무르티(T.R. Murty)의 표현처럼 '공' 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 존재의 견해에 대한 부정을 말하는 것이다. 실천적으로는 우리가 실유(實有)로 생각하여 집착하는 '나 또는 나의 것' 이라는 관념을 제거, 무아(無我)를 체증(體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 불교에서는 이 '공' 을 현상적 이원론과 경험적 현상을 초월한다는 의미로 보아 '절대' 와 동의어로 쓰기도 한다. 중국의 학자들 중에는 '공' 이 철저한 부정과 함께 철저한 긍정을 의미한다고 보고 '공' 보다는 '리' (理)로 옮길 것을 주장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용어가 본래 '부정을 통한 긍정' 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불타의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뜻으로 쓰이다가, 그 경지에 도달하려는 후인들의 사색을 거쳐 더욱 발전되고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용어의 중요성은 철저한 허무주의(nihilism) 또는 인도 종교 · 철학 사상의 브라흐만 (brāhman, brāhma-nirvānam)과 그리스도교 부정 신학(否定神學), 신비 신학(神秘神學)의 하느님, 신성(神性), 무(無) 등과 동일시하는 흐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개와 발전〕 불교의 기본 교리는 무아설(無我說)이다. 모든 것에는 불변하고 독자적인 존재성 즉 아트만(我)이 없다는 말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고유한 본체나 성질을 갖지 않는 연기성에 기초하고 있을 뿐이다.
'공' 이란 사물 고유의 존재 양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緣起〕이며, 무아는 이를 위한 선결 조건이다. 불타의 교설로부터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시 근본 불교의 '무아' 인식은 그 깊이를 더하여 '연기' 의 인식으로, '연기' 에 대한 인식은 심화되어 '중도' (中道). '열반' · '공' 의 인식으로까지 성숙 발전한다. 그리고 대승 불교에 이르러서는 이 개념이 더욱 철저해져 '공' 사상으로 발전하고, '모든 것이 공 〔一切皆空〕임을 체증하는 완전한 직관적 인식의 상태를 반야바라밀(般若婆羅密)이라하여 깨달음〔菩堤〕의 길로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공 사상은 '공' 또는 '공성' 을 주축으로 하여 초기의 대승 경전인 일련의 《반야경》(般若經)과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의 《중론》(中論) 등에서 더욱 명확해졌으며, 이후 대승 불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면서 그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원시 불교, 부파 불교〕 원시 불교나 부파 불교(部派佛敎)의 경전에서는 '공' 이 단지 비존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후대의 대승 불교에서 발전시킨 것과 같은 심원한 공 사상을 초기 불교에서부터 찾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공의 불교적인 의미는 이미 원시 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 불교의 기본 교리인 삼법인(三法印)은 모든 것이 무상 · 고 무아임을 깨달을 것을 강조하는데, 《아함경》(阿含經)에는 이들 세 개념과 '공' 을 병렬시키는 경우가 발견될 뿐 아니라 '모든 것은 공' 이라는 명제도 함께 나온다. 또 해탈에 이르는 세 가지 명상 방법으로 정착한 삼삼매(三三昧)에서도 공을 첫째 대상으로 열거한다. 삼삼매란 사물이 본래 공인 것을 명상하는 공(空)삼매,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이라고 명상하는 무상(無相)삼매, 인간의 기대나 바람과는 무관한 것으로 명상하는 무원(無願)삼매를 가리키며, 이것은 곧 애욕이나 집착을 끊는 데 유익하도록 공을 명상의 대상으로 교시한 것이다. 현존하는 《소공경》(小空經)과 《대공경》(大空經)에서는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들이 수행하여 얻은 청정한 정신 상태를 '공인 상태' 〔空住〕로 간주하여, 그것을 얻는 방법이나 얻은 상황을 설하였다. 이들 경전에서는 내적 성찰을 심화하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부분적으로 연기와 공관(空觀)을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부파 불교는 모든 것이 무아임을 밝히는 데 특히 주력하였으며, 원시 불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삼매를 포함한 삼삼매 또는 삼해탈문(三解脫門)을 설하지만, 그것들을 이론적으로 추구하는 작업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일부에서는 공성을 주축으로 하는 삼매를 그 깊이에 따라 여러 가지라고 생각하여 팔공(八空) · 구공(九空) · 십공(十空) 등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같은 부파에서는 모든 현상을 세밀한 구성 요소〔諸法, dhārmas〕로 분해하여 실체성은 부정하나 요소 자체의 존재성은 시인하여 공 사상을 전개한 대승측으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공 사상은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체계적 인 기반을 갖추게 된다.
〔대승 불교〕 많은 대승 경전 중에서 초기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반야경》은 지혜의 완성인 반야바라밀에 도달하는 방도를 제시한 경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반야' (prajñā)란 지혜, 특히 모든 것이 공임을 체증하는 지혜를 뜻한다. 이 지혜는 세간적(世間的) 인식 · 지식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세간적 지혜〔分別知, vikālpa〕란 대상에 집착하여 구별하고 판단하는 인식 또는 지식이지만, 반야는 그런 집착을 단절하는 힘인 동시에 그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이 소위 '보리' (菩提)라고 하는 불타의 깨달음이다. 다양한 《반야경》 문헌은 무엇이 '생긴다' 거나 '멸한다' 고 하는 일상적인 판단을 깨뜨리기 위해 모든 것이 공임을 가르친다. 그 기본 명제인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即是空 空即是色) 역시 사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자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사물에 대한 집착을 끊으라고 한 가르침이다. '모든 것은 공 임을 깨닫는 완전한 지혜로 원시 불교의 무아관이나 공관이 심화된다.
한편 공 사상은 '공' 이라는 용어를 구사하지 않으면서 모순적이고 역설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은 반야경이나 이를 계승한 《유마경》(維摩經) 등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공은 부정이며 그것도 절대적인 부정이다. 부정을 통해 사물을 초월하고 그 초월에서 오히려 진정한 실재가 드러난다는 데 공의 진의가 있다. 공이 절대적 부정인 점에서는 공 자체도 역시 공으로 부정된다. 다시 말하면 공은 부정이고, 그 부정의 부정(공 역시 또한 공이다) 또한 부정인 셈이다. 이에 따라 공을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하고 분류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공(人空 혹은 生空)과 법공(法空)이다. 인공은 인격적 주체가 공임을, 법공은 현상의 모든 사물이 공임을 뜻한다. 이 밖에 삼공(三空)을 비롯하여 이십공(二十空)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류하나, 문헌에 따라 내용과 해석에서도 차이가 나타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공의 분류가 공 자체에 여러 종류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되어야 할 대상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경전에서 설하는 공은 대개 신비적이고 직관적이고 암시적이어서 이론적이거나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다. 아마도 이것은 공의 경지가 수행을 통해 체득된 무애(無碍)의 경지이므로 경전 편찬자로서 공의 체험을 논리화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공(空)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진전된 것은 대승 학자들의 덕분이다. 2~3세기 무렵의 나가르주나와 아랴데바(Āryadeva, 堤婆) 4~5세기 무렵의 아상가(Asanga, 無着)와 바수반두(Vasubāndhu, 世親) 등이 저술을 통해 이론적 전개를 시작하는데, 앞의 두 사람을 계승하여 중관(中觀)학파가 성립하고, 뒤의 두 사람을 계기로 유가행(瑜伽行) 또는 유식(唯識)학파가 형성되어 인도 대승 불교 철학의 두 가지 큰 조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중관학파 : 유부(有部, 說一切有部, sarvāstivādin)의 법유론(法有論)에 대하여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용수에서 시작되는 중관학파의 공관이다. 용수는 대승 불교의 기본 입장을 《반야경》의 공(空)과 무자성(無自性)에서 발견하고, 이것이 불타의 가르침인 연기설(緣起說, prautyasamutāda)의 진의(眞意)임을 강조하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용수는 공관을 대성하고 그의 저서 《중론》에서 공의 체험을 바탕으로 모든 철학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주의 입장을 확립한다. 그가 채택한 독특한 비판 논증법은 귀류법(歸謬法, prasanga)인데, 일상적인 언어가 의미상으로 전제하는 실체성 또는 자성(自性, svabhāva)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논법이다. 그는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유적(有的), 즉 실체적인 것을 인정하는 입장을 예리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지혜를 중시하는 《반야경》의 사상이 불타의 실천적인 연기와 중도 사상을 직접 계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중론》 등의 저작을 통해 모든 것이 공임을 매우 정교하고 치밀한 논리로 구명하고자 했
다.
용수는 또한 우리의 일상적 언어 습관이 오히려 진리를 꿰뚫어 보는 데 방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일상적 언어에 얽매이다 보면 마치 그 언어에 상당하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으로 집착하게 되고, 언어에 얽매어 있는 한 어떤 현상의 진상을 진실하게 경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에 대한 반성 없는 의존을 벗어나, 일체가 공임을, 자성을 갖지 않는 것임을 꿰뚫어 현상 자체를 전체와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언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적 경험과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 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원시 불교와 부파 불교에서 설한 연기는 어떤 일정한 사물의 연쇄적 인과 관계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었으나, 그는 연기를 더욱 일반화하여 모든 것이 공인 근거가 연기라고 파악했다. 즉, 《중론》 제24장 18~19절에서 "연기인 것, 이것을 우리는 공이라 부른다. 이것은 무엇인가에 기초한 방편적 표명〔假〕이며, 또한 중도와 다를 바 없다. 무엇일지라도 연기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공이 아닌 것 또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고 하였다.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것은 무엇이다" 또는 "이것은 무엇이 아니다"라고 하는 긍정적 판단이나 부정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일체의 고정적인 판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중도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전개되는 그의 공 사상은, 《반야경》에서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역할을 맡지 않았던 원시 불교 이래의 연기 · 중도 사상을 활성화하고, 공의 개념을 통해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관학파에서는 이처럼 실체적인 것을 상정하는 언어나 개념을 부정했지만, 자신들의 주장을 설파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논리를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언어의 효용 가치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절대적 모순에서 용수는 궁극적 진리제〔第一義諦, 勝義諦〕와 세간적 진리〔世俗諦〕라는 이제설(二諦說)을 주장한다. 그중 승의제는 최고의 진리로서 반야로 직관하는 진리이며, 항상 세속제를 초월하여 사유나 언어로는 미칠 수 없는 소위 '고귀한 침묵' (clebrated silence)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기서는 침묵만이 올바른 태도이며, 침묵만이 참된 태도인 것은 질문에 답할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질문 자체의 무의미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속제에 의하지 않고서는 승의제를 드러낼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는 불타의 설법도 용수의 논법도 세속제 차원에 속한다. 그래서 공은 이 두 가지 관점 어디에나 적용된다. 즉 세속제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연기 법칙에 따른 무자성이므로 공이며, 승의제의 관점에서는 모든 이원적 대립이 부정되므로 공이다.
용수의 이 변증론은 상대방의 주장에서 자가 당착되는 결론이 유도된다면, 그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자신의 특정한 입장을 논거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논리상 공의 입장이다. 특히 이러한 그의 변증론은 ① 有, ② 無, ③ 有이며 無, ④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님 등의 4구(句)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이 넷으로써 가능한 모든 경우를 끝까지 검토하여 상대가 자성
을 상정하는 한, 상대 스스로 모순에 봉착하여 공임을 인식토록 하였다. 그러므로 이 4구를 통해 모든 것을 분석 비판하여 그것들이 자성을 상정하는 한, 반드시 모순을 포함함을 폭로하고, 따라서 공임을 지적한다. 이것이 용수의 귀류논법이다. 이 4구는 결국 유와 무라는 2구 사이의 딜레마로 귀착하며, 오로지 유(有)라고 하거나 오로지 무(無)라고 하는 것은 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므로 그 둘을 초월한 중도가 진실인 것으로 드러나게 되고, 결국 연기와 공은 불타가 설한 '중도' 와 동의어가 된다. 공을 관찰하는 이 학파가 중관학파로 불리고, 또 용수의 주저가 《중론》이라 명명된 것도 공이 중도이기 때문이다. 공을 통하지 않으면, 사유는 스스로 얽매이게 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공함을 자각하는 것은 모든 지혜의 완성이며, 이는 모든 사물의 철저한 연기성을 깨닫게 해준다. 여기서부터 열반은 시작되고 이 네 개념은 동등한 의미를 갖는다. 즉 그 개념들은 네 개의 인식론적 또는 존재론적인 단계가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깨달음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유식학파 : 용수 이후 공을 인식론적 또는 실천적으로 현실에 맞추어 해명하려는 데서 유가행학파 즉 유식학파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학파에서 생각하는 공은 중관학파의 공과는 의미가 다르다. 유식학파는 공을 허무(虛無)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계속 문제삼아왔던 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공관은 공견(空見) 즉 공에 대한 그릇된 집착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공관은 이미 용수 당시부터 인간적인 모든 영위나 노력을 부정하는 잘못된 허무론으로 타락할 위험이 있었다. 용수 자신도 "공을 설한 것은 모든 견해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기 위함이므로, 만일 그 공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여 거기에 속박된다면, 참으로 구제하기 어렵다" 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공관이 허무론으로 타락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이런 허무론에 대한 반동으로 유식학파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유식파에서는 식(識, vijñãna)만을 궁극의 실재라고 보아 '오로지 식뿐' 〔唯識〕임을 설하고, 중관파의 무자성에 대해 '3자성' (三自性)을 설한다. 이런 점에서 중관파와 유식파는 각각 '공(空)의 학파' 와 '유(有)의 학파' 로 대비된다. 그러나 유식학파가 식의 실재론을 세웠다 하더라도 결코 공 본래의 뜻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유식파의 별명인 유가행이란 명칭은 '요가의 실천' 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 학파의 주된 관심이 무엇보다도 실천 수행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런 실천적 입장에서는 공 사상을 전면적으로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여기서는 소위 악취공(惡取空)이라는 그릇된 공을 배격하고 올바른 공인 선취공(善取空)의 파악을 중시하며, 이런 의미에서 초기 유가행파는 중관학파의 보완이요 그것이 발전한 것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이 학파에서는 중관학파에 비해 공의 긍정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또 이 점에서는 공에 대한 이해가 중관학파의 그것과 반드시 동일하지 않다. 공은 부정이며 이 부정을 통해 긍정의 면이 회복된다는 취의는 용수에게서도 인정된다. 그러나 유식학파는 이런 취의를 일보 진전시켰다. 특히 마이트레야(Maitreya, 彌勒)는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에서 연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적 인식을 고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물론 일상적 인식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실재가 아니라 공일 뿐이다. 그러나 공인 그 인식이 현실로 작용하고 있음은 부인하지 않으며 중도는 바로 이런 사실에서 성립한다고 한다. 더 나아가 공이란 '주관 · 객관의 비존재, 아울러 그 비존재의 존재' 라고 정의한다. 부정의 면과 긍정의 면을 함께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연기=공=중도‘ 라는 용수의 등식을 인정하면서도 공을 '비존재의 존재' 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한 점에서 독특하지만, 후세의 중관학파는 이 '비존재의 존재' 를 후세의 중관학파는 모순이며 그릇된 이해라고 비판하였다. 이 밖에도 이 학파에서는 진여(眞如) · 실제(實際) · 승의(勝義) · 법계(法界) 등과 같은 긍정적인 표현을 공과 동의어로 간주하는 예가 있다. 또 공과 공성을 구별하여 전자는 소극적인 공, 후자는 적극적인 절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한 흔적도 있다.
중국 불교 : 중국에서는 2세기 후반 지루가참(支婁迦識)이 《반야경》을 번역함으로써 공 또는 공성의 개념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 개념이 인도 불교에서 통용된 그대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약간 변질되었다. 즉 중국에서는 이미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가르친 '무' (無) 사상이 성숙해 있었으므로, 공 · 공성을 무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또 5세기에 이르러 구마라집(鳩摩羅什)은 《반야경》과 《중론》을 포함한 많은 대승의 문헌들을 번역하면서, 공 · 공성에 상응하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론적 측면을 전달하기가 곤란하자 공 · 공성을 '공' (空)으로 통합하였다. 그런데 이 경우의 공은 존재론적인 면에서는 '유(有)의 근저가 되는 무(無)' 또는 '큰 허공’ 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인도의 논리적이면서 분석적인 공관이 이른바 직관적 · 총관적인 중국인의 감성으로 수용되면서 공관은 독자적인 전개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특히 《중론》의 번역을 통해 삼제원융(三諦圓融)의 논리가 창출되었다. 인도 불교에서는 개체와 전체의 문제가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전체 속에서 개개를 구별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방향으로 융합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상즉적(相卽的)인 논리였다.
중국적인 무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선(禪) 사상 역시 유의 근저에서 무를 보고 그로부터 다시 유의 세계로 되돌아온다는 점에서는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경향을 띤다. 인도에서 허무적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던 공 사상이 중국에서는 무의 사상을 통해 인도와는 다른 적극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런 적극성이 중관학파의 중국적 형태인 삼론종(三論宗)에 잘 나타난다. 삼론종이란 구마라집이 번역한 세 논서를 중시하는 중국의 중관학파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삼론은 용수의 《중론》과 《십이문론》(十二門論), 그의 제자인 아라데바(阿羅提婆)의 《백론》(百論)이다. 삼론종에서는 공이 지닌 부정의 의미를 '파사' (破邪)라고 표현하여 이것이 바로 현정' (顯正), 즉 바른 가르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파사현정 역시 부정적 의미의 공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개념이다. 한편 유식학파는 중국에서 법상종(法相宗)으로 전개되었다.
〔현대 종교, 철학〕 공 개념과 중관 사상의 부정 변증법에 관한 현대 종교 · 철학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논의들은 '종교간의 대화' 에서만도 방대한 연구서가 필요할만큼 관계 학자들의 집요한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종교간의 대화에서 공은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인간의 본성, 종교적 인식의 문제와 관련하여 불교와 그리스도교와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의 하나가 되었다. 즉, 현대 철학계에서는 공의 인식 문제, 공 사상의 언어관, 그리고 연기의 논의가 칸트(I. Kant)의 이성 비판, '물자체' (物自體) 문제, 하이데거(Heidegger)와 비트겐쉬타인(L. Witttenstein)과의 언어 문제, 과정 철학상 화이트해드(A.N. Whitehead)의 유기체 철학의 구조 문제들과 비교되면서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또한 현대 일본의 철학자 니시다 키타로(西田幾田郞)와 니시타니 케이지(西田)는 철학 사상의 중심 문제로 공 사상을 취급하여, 선(善) · 존재 · 자아의 논의를 비교 문화의 철학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사계의 전문 학자들조차 공에 관한 정의에서부터 논의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공의 개념 규정만 보아도 스즈키(Suzuki)는 단순히 조건성(conditionality) 또는 무상성 (transitoriness)로, 체르바스키(Stcherbatsky)는 관계성(relativity)으로, 히리야나(Hiriyana) 무(nothingness)로, 라다크리쉬난(S. Radhakrishnan)은 결정적 원리(posi-tive principle) 또는 모든 것의 기초 · 근거(the basis of the all)로 다루는 등 일목 요연하게 정리하기 어렵다. 특히 라다크리쉬난은 그의 《인도 철학》(Indian Philosophy)에서 용수의 공을 가리켜 해밀턴(Hamilton)의 비조건자(uncondi-tioned), 스펜서(Spencer)의 불가해한 힘(inscrutable power)은 그 비관계적 성격 때문에 때로는 플로티누스(Plotinus)의 일자(the one), 스피노자(Spinoza)의 실체 (substance) , 셀링(Shelling)의 중간자(neutrum)와 비교된다.
〔종교 · 철학적 의의〕 공 사상은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불교의 핵심적인 경험이나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비실체성에 대한 교의와 관련하여 절대자의 본질, 또는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본성과 실재를 파지(把指) , 기술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철학적인 허무주의나 형이상학적 불가지론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긍정이며, 실재의 궁극적 구조에 대한 인간의 가장 심오한 직관의 하나이다. 공 사상 특유의 변증론은 일반적으로 원인과 결과, 운동과 변화, 사물과 그 속성, 나와나의 소유, 전체와 부분 등의 온갖 대립적 관계에 적용되며, 아비달마 불교의 실재론적인 교설뿐만 아니라 여래나 열반 등 최고 원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공임을 지적한다. 이것은 오로지 아비달마 철학의 다원론적 실재론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철학 일반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는 곧 공을 주장하는 공견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는 공에 대한 자기 주장, 즉 '공견' (空見)일 수는 있어도 '공관' (空觀)은 아니다. 공의 변증론은 공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空見)이 아니라, 그런 정언을 내세우기 이전에 본래 공임을 세간의 논리에 따라 세간에서 알아차리게 할 뿐이다. 따라서 공관은 '무(無)입장의 입장' 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이것이 곧 중도이다. 중도는 유와 무를 초월하므로 유는 그대로 무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생사는 그대로 열반' 〔生死卽涅槃)이다. 용수의 중관 철학이 공이라는 부정을 그 원리로 삼아 고도로 이론적으로 전개했던 것은 철학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철학적 · 형이상학적인 이론의 구성을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실천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전하고 있다. 인간 중생이 인생의 순례 과정을 통하여 도달해야 하는 목표를 열반(혹은 구원)이라 한다면, 공이란 번뇌와 고통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사랑(자비)의 실천을 통하여 비로소 제 빛을 발하게 하는 그 무엇' 〔妙有〕이다. 참다운 인식〔반야, Prajina〕은 행동〔慈悲, Kāuna〕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론 이성' (理論理性)과 '실천 이성' (實踐理性)이 하나로 만나는 세계를 접하게 되며, 공은 바로 이 세계를 가르쳐주고 있다. (→ 무)
※ 참고문헌 T.R. Murty, 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 London : George Allen & Unwin Ltd., 1960/ R. Frederick . J. Streng, Emptiness-A Study in Religious Meaning, New York : Abingdon Press, 1967/ Edward J. Thomas, The History of Buddhist Thought, London : R &k Ltd., 1971/ Jaideva Singh, Introduction to Madhamaka Philosophy, Delhi M.B., 3rd ed.,1978/ Hans Waldenfels, Absolute Nichts-Zur Grundlegung des Dialogs zwischen Buddhismus und Christentum, Herder Verlag, Frieburg, 1976/ S. Radhakrishnan, Indian Philosophy, vol. 1,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66. 〔吳將均〕
공
空
〔영〕nothingness, emptiness · 〔산〕sūn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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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 중의 반야경 일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