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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급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으로 하느님의 발현이 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산.
〔성서에서의 언급] 성서에서 시나이 산과 관련하여 맨 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모세이다. 모세는 이집트인을 죽이고 미디안 곧 시나이 반도로 피신하였는데, 그가 이곳에서 장인의 양 떼를 돌본 지 40년 만인 나이 여든에 '호렙 산 곧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뵈었다(출애 3, 2-6). 그리고 하느님의 지시대로 이집트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동족을 이끌고 시나이 산에 이르렀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출애19-24장), 모세는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기 위해 시나이산으로 올라가(출애 19, 3 24, 9) 그곳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 계명을 전하려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고(출애 19, 14), 시나이 산에서 40 일을 보내기도 하였다(출애 24, 18). 또한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바알 우상을 섬기자 호된 질책을 하였는데(1열왕 16, 29-18, 46), 이에 이세벨 왕비가 자기를 해치려고 하자 시나이 산으로 도망을 갔다(1열왕 19, 9-15).
그런데 야훼계(J) 전승과 사제계(P) 전승에서 모세의 산은 '시나이' 산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엘로험(E) 전승과 신명기계(D) 전승에서는 '호렙' 산으로 표기되어 있다(출애 3, 1 ; 신명 1, 2 : 4, 10 ; 5, 2 : 1열왕 19, 8). 히브리어 '호렙' (コ方)은 황량한 지역 · 사막 · 광야를 의미하는데, 이 호렙 산이 시나이 산과 지역적으로 다르다는 근거를 문헌상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시나이 산과 호렙산은 서로 다른 산이 아니라 같은 산이라는 것이 학자들간의 통설로 되어 있다.
〔위 치] 모세가 야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나이산의 위치에 관해서는 성서상으로 이집트의 나일 삼각주 지역과 가나안 사이에 있다는 것 외에는 뚜렷한 단서가 없다. 그래서 오늘날의 학자들도 서로 각기 다른 지역의 시나이 산을 제시하고 있다. 이스라엘 고고학자인 로텐버그(B. Rothenberg)는 자신의 답사와 유물 수집을 통해서 이스라엘 남부 지역의 카르콤 산(HarKachom)이 시나이산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모세가 미디안 지역에서 야훼를 만난 것에 착안하여 요르단 남부와 사우디 아라비아 서북부 지역에서 시나이 산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아마도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1세기 사도 바오로가 시나이 산을 아라비아, 즉 나바테야 왕국에 위치한 것(갈라4, 25)으로 묘사한 데에서 착안한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나이 산을 시나이 반도 남부에 위치한 고산 지대로 보고 있으며, 특히 이 중에서도 특정한 한 봉우리를 시나이 산으로 여기고 있다.
[교회사와 가타리나 수도원] 250년경 데치우스 황제(249~251)의 박해를 피해 알렉산드리아 지방에서 피신해 온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은 시나이 반도 남부의 가장 큰 오아시스인 페이란 계곡(Wadi Feiran)에서 공동 생활을 하였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해발 2,070m 높이의 세르발 산(Jebel Serbal)을 시나이 산으로 여겼다. 하지만 페이란 계곡은 로마 군인들에게 쉽게 발각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수도자들은 좀더 산속깊은 곳으로 이동을 하였다. 그리고 근처에 샘이 있는 시나이 산 기슭에 정착한 그들은, 샘가에 자라고 있던 떨기나무를 호렙 산의 모세(출애 3, 4)와 연관 지으면서 이 장소를 신성시하기 위해 성당과 망대 등을 건설하였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공적으로 인정한 뒤에는 성모 마리아 기념 성당이 세워졌고, 6세기 중엽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가 제국의 남쪽 변방인 시나이 반도를 지키기 위해 일종의 전략적인 요새로서 이곳에 대규모 요새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수도원은 548~565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것이다. 7세기에 이슬람 군대에 의해 시나이 반도가 점령되었을 때 이 수도원은 보호를 받았는데, 아마도 이때부터 아랍인들은 수도원 남쪽의 해발 2,285m 봉우리를 '예벨무사' (Jebel Musa) 즉 '모세의 산 이라고 부르기 시작한것 같다.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2,642m의 산봉우리를 '가타리나 산 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1000년경 이곳에서 가타리나 성녀의 유해가 발견되면서부터였다. 롭트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250년경에 태어난 가타리나는 알렉산드리아의 귀족 출신으로 본명은 도로테아였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가타리나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수도자 생활을 하다가 막시미아누스 황제(286~305)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몇 세기 후 시나이 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이 꿈에 두 명의 천사가 성녀의 시신을 알렉산드리아에서 가타리나 산으로 옮기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수도자들이 성녀의 유해를 성당의 제대 옆으로 모신 뒤부터 성 가타리나 수도원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3세(717~741)가 726년에 내린 성화상 공경 금지에 관한 칙령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수도원의 구내 박물관에는 희귀한 고대의 성화들이 수백 점 남아 있다. 또 10세기 이전에 쓰여진 3천여 종이나 되는 고대 성서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고, 세계 최초의 그리스어 성서인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이 19세기 중엽 이곳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독일의 티센도르프(L.F.K. Tischendorf, 1815~1874)가 1844년부터 15년간에 걸쳐 거의 탈취하다시피 빼돌린 이 소중한 성서는 현재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사본은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과 함께 최초의 신약성서의 사본으로 손꼽히는 매우 귀중한 것이다. 오늘날 시나이 산을 찾는 순례자들은 해발 1,500m 지점에 위치한 성 가타리나 수도원에서부터 오르기 때문에 실제로 걷는거리는 약 800m 정도이다. 마지막 750여 개의 돌 계단을 올라 정상에 오르면 성 삼위 일체 성당과 이슬람교 사원이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에 속한다. (- 시나이 반도)
※ 참고문헌 G.I. Davies, (ABD》6, pp. 47~491 J.J. Hobbs, Mount Sinai. Cairo, American Univ. Press, 1996/ B. Rothenberg · H. Weyer, Sinai, NewYork, 1980/ G.E. Wright, Mount Sinai, (IDB》4, pp. 376~378. 〔金 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