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뇨렐리, 루카 ( 1445? ~ 1523)

Signorelli, Lu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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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뇨렐리 최초의 작품인 <채찍질당하시는 그리스도)(원쪽)와 <목신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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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뇨렐리 최초의 작품인 <채찍질당하시는 그리스도)(원쪽)와 <목신의 학교>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정식 이름은 루카 데지디오 디 벤투라 데 시뇨렐리(Luca d'Egidio di Ventura de Signorelli) .
1445년경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의 코르토나(Cor-tona)에서 태어났으며, 초기 시절에는 피렌체 당대의 최고 화가였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0~1492)와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Amomino del Pol-laiuolo, 1432/1433~1498)의 영향을 받아 다수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1479년 고향 코르토나에서 18인 평의회에 선출되어 정치 활동을 하다가 1481년경 로마로 가서 시스티나 경당의 프레스코화를 제작하였다. 1497~1498년에 시에나 근처의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Monte Olibeto Maggiore) 수도원에서 성 베네딕도의 생애를 연작으로한 프레스코화를 제작하였고, 1499~1505년에는 오르비에토(Orvieto) 주교좌 성당에서 자신의 프레스코화 최고의 걸작을 제작하였다. 그 후 로마와 피렌체에서 작품 주문이 줄어들자 움브리아의 주문자들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1523년 10월 16일 코르토나에서 사망하였다.
[작 품) 시뇨렐리가 그린 최초의 작품은 현재 밀라노브레라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채찍질당하시는 그리스도>(1475/1480)이다. 이 작품에서 기둥에 묶여 고통받는 예수 그리스도나 군사들의 자세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과 거의 동일한 모습이고, 채찍을 던지는 군사들의 힘에 넘치는 동작 등은 근육질을 잘 드러낸 폴라이우올로의 작품에 드러난 인물들과 매우 유사한 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시뇨렐리의 특성은 표현된 인물들의 심리적 상태, 자세와 동작의 시각적 효과를 가시화한 것에 있었다. 그가 그린 인물들의 형태는 매우 경직되어 있으면서도 분명한 구성을 보여 주지만, 색채의 다양한 활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 역시 그의 특징이자 그의 한계라고 하겠다.
다수의 화가들과 함께 시스티나 경당 프레스코화의 제작을 의뢰받은 시뇨렐리는 1481~1483년에 <모세가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명하다>와 <모세의 죽음>을 그렸고, 이듬해에는 그가 그린 가장 아름다운 제단화 가운데 하나인 <성모와 성인들>(페루지아, 오페라 델 두오모 미술관 소장)을 제작하였다. 거의 시적인 화면을 보여 주는 이 작품에서 시뇨렐리는 등장 인물들을 다소 경직된 듯 구성하였지만, 각 형태들은 플랑드르 화풍의 영향으로 대단히 섬세한 색채와 세공업적인 정밀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후 1488년에는 <목신(牧神)의 학교>라는 수수께끼 같은 매우 묘한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에 제작된 목신을 주제로 한 그림 중 수작으로 꼽힌다.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는 "가장 난해한 상징이 가장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했는데, 아마도 그가 1,100년 뒤인 르네상스 시기에 살았다면 시뇨렐리의 이 그림에 그와 같은 평가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시뇨렐리는 이 그림속에 자신을 포함시켰다. 그의 옆에는 헤르메스와 한 님프의 아들로 태어난 자연의 신 즉 목신이 옥좌에 앉아 있고, 그의 하체에는 염소의 다리와 두 개의 굽으로 된 발이 달려 있다. 그 주변에는 피리를 불거나 생각에 빠진 전원의 목동 네 명이 모여 있는데, 그들의 나이는 모두 달라 보인다. 이들은 유년기 · 청년기 · 장년기 · 노년기라는 인간의 나이를 시각화한 것이다. 멀리 원경에 보이는 누드의 두 여인은 '멜랑콜리' (melancolie) 혹은 '불안'으로 해석되어 왔다. 신플라톤주의의 범신론을 바탕으로한 인문주의를 주제로 삼은 이 그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실되어 현재 흑백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해석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현재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겸손하신마리아>(Madoma dell'Umita)는 시뇨렐리가 1490년에 메디치 가문이 소유한 피렌체 외곽의 전원 저택을 위해 제작한 것으로, 작품 속의 성모는 꽃밭에 앉아 아기 예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특히 작품 속의 카밀레 꽃줄기 · 국화 · 당아욱 · 오랑캐꽃 · 양귀비 등 여러 종류의 꽃들에 대한 묘사가 매우 뛰어나다. 성모자(聖母子)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이 같은 정원은 소위 '닫혀진 정원' (hortusconclusus)의 도상으로 마리아를 위한 낙원을 상징하지만, 이들 뒤로 고대 그리스의 목가적인 풍경에 네 명의 목동과 고대 신전을 배치해 놓았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적 주제에 세속적인 주제가 함께 표현된 것은 매우 드문일로서, <목신의 학교>처럼 르네상스 시기에 인문주의적 주제가 얼마나 애호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물론 시뇨렐리는 성화(聖畵)에 세속적인 인물들을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이 그림은 당대 정치 · 경제 · 종교 · 문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메디치 가문이 주문한 것인데, 메디치 가문은 당시 플라톤 연구를 위해 장소 제공과 경비 지출을 아끼지 않았었다. 시뇨렐리가 남긴 대작으로는 역시 오르비에토 주교좌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를 꼽는다. 특히 이 주교좌 성당의 산 브리치오 경당(San Brizio Capella)에 그린 작품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매우 극적인 장면들을 보여 주고 있다.
본래 안젤리코(F. Angelico, 1395?~1455)와 페루지노(P. Perugino, 1448~1523) 등도 제작 의뢰를 받았었지만 이들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자, 결국 1499년에 성당 참사 위원회에서는 시뇨렐리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였던 것이다. 시뇨렐리는 그 후 5년 간 성당 벽면의 작업대에 서서 주문받은 작품들을 완성해 냈다. 우선 그는 <반그리스도> · <최후의 심판> · <선택된 자들의 대관식>을 그린 뒤<육신의 부활> · <저주받은 자들> 등을 완성하였다. 르네상스 미술 중 시뇨렐리의 누드와 같이 다양한 포즈와 양을 따라가는 그림은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해부학 연구를 하였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악마들의 다양한 모습들 역시 시뇨렐리의 충분한 상상력, 또 그에 대한 노련한 연구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무리 지어 있는 나체의 저주받은 자들, 기이한 악마의 모
습, 고통스럽고 일그러진 얼굴 표정, 뒤틀려진 신체 등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가 시스티나 경당에 그린 <최후의 심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평 가] 바사리(G. Vasari, 1511~1574)는 자신의 저서《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에서 시뇨렐리를 16세기 초기 최고의 화가 중 하나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현대의 평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16세기 회화를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후대 화가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오르비에토 주교좌 성당에 그린 주요 벽화들(1499~1505) 이후 다소 침체된 듯, 더 이상 괄목할 만한 작품들을 제작하지 못하였다.
※ 참고문헌  Kindlers Malerei Lexikon, Bd. 15, Miinchen, 1982/ Male-rei. Lexikon vonA bis Z, Lingen-Verlag, Köln, 1986/ RolfToman, Die Kunst der italienischen Renaisance, Köln, 1994/ J.R. Hale ed., The Thames and Hudson Encyclopaedia ofthe Italican Renaissance, London, 1992. [洪珍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