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로, 사렙다, 비블로스와 함께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페니키아 항구 도시. 현재 아랍어로 사이다(Saida)라고 불리고 있는 시돈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45km, 티로의 북쪽 4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시돈은 지중해 앞바다의 작은 섬들과 육지를 방파제로 연결하여 만든 전형적인 페니키아식 항구 도시로 발전되었다.
〔성서에서의 언급] 구약성서에서 시돈은 노아 자손의 계보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노아의 손자인 가나안의 영토는 시돈에서 시작하여 가자(Gaza)에 이르렀다(창세 10, 19)고 한다. 이외에도 시돈은 구약 성서에서 지역의 경계선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언급되었고(창세 49, 13 : 여호 11, 8 ; 19, 28 ; 2사무 24, 6), 시돈 주민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영토를 점령한 후에도 쫓겨나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다(판관 1, 31). 예언자들이 경고를 하거나 앞으로 내려질 심판을 언급하는 경우 시돈만을 언급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티로와 함께 언급되었다(이사 23, 2. 4. 12 ; 예레 47, 2 : 에제 28, 20-23 : 즈가 9, 2 ; 요엘 4, 4). 또 시돈은 여러 도시들과 왕국들 가운데 하나로 하느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예레 25, 22)이라고 하였다.
사실 성서에서 시돈과 시돈 사람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그들로 인해 이스라엘에 우상 승배가 행하여진 적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왕 아합(기원전 875~853)은 풍산신(豊産神)을 섬기던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혼인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바알 숭배를 강요하였고, 이로 인해 예언자 엘리야의 질책을 받았다(1열왕 16, 29 -18, 15). 또 시돈은 느부갓네살에 대항하기 위해 사절을 남부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키야에게 파견하였지만 (예레 27, 3), 바빌론에 대한 저항이 아무런 효력이 없을 것이며 바빌론 유배는 야훼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예언만을 들었다. 그리고 마카베오 시대에 시돈과 다른 도시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유대인들을 공격하였다(1마카 5, 15).
신약성서에서 시돈은 티로와 함께 언급되고 있는데, 예수는 티로와 시돈을 한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다(마태15, 21 : 마르 7, 31). 이때 예수는 가나안 여인을 만났고,그 여인의 딸을 고쳐 주었다. 이것이 예수가 팔레스티나 지역 밖으로 나갔던 유일한 경우이다. 또한 예수는 당신이 기적을 많이 행한 고장을 꾸짖으면서 코라진과 베싸이다를 티로와 시돈과 비교한 뒤 티로와 시돈이 더 빨리 회개했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였다(마태 11, 21-22 ; 루가 13-14장). 하지만 이렇게 말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로 가는 길에 시돈에 들러 친구들을 만났다(사도 27, 3).
[주거의 역사] 기원전 3500년경 동석기 시대에 주거한 흔적이 나타나지만, 기원전 7세기에 건설된 에슈문 (Eshmun) 신전을 제외하고는 항구와 고대 도시의 터가오늘날 주거지로 발전되었다. 그래서 발굴을 시도할 수가 없어 시돈의 전체적인 주거 역사를 직접적으로 재구성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1860년대부터 시작된 시돈 인근의 묘지 발굴에서 수집된 유물들의 연대 분석과 고대 근동 문헌에서의 언급 등을 통해 시돈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동석기 시대의 주거 흔적이 있지만 시돈은 중기 청동기 시대 말기인 기원전 16세기부터 도시로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4세기에 기록된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 히타이트의 저주 문서, 우가리트의 키르타(Kina) 서사시 등에는 티로와 함께 시돈이 독립된 항구 도시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 12세기 이후에는 페니키아 민족의 지중해 지역 진출과 더불어 목재 · 자주색 염료 · 유리 그릇 등의 수출항으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기원전 1100년경 이집트의 "웬아문(Wenamun)의 보고서"에는 50여 척의, 상선을 거느리고 이집트와 무역을 한 도시로 기록되어 있고, 구역성서에는 티로와 함께 해양 무역을 발달시킨 페니키아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이사 23장). 기원전 7세기에 건설된 에슈문 신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시돈은 항구 도시인 시돈-암(Sidon-Yam)과 내륙 도시인 시돈-사데(Sidon-Sadeh)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한다. 시돈은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539~332)에 최고조로 발달하였고, 기원전 350년경 페르시아 군대에 저항하다가 도시 전체가 불타서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도움으로 무역항의 위상을 다시 회복하였는데, 항구 지역의 부분적인 발굴을 통해 당시 지중해 동쪽 해안에 위치한 페니키아 항구들의 공통 문제점인 모래의 유입을 파도로 차단하기 위한 독특한 방식으로 방파제가 설계되었음을알게 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이곳에 주교좌 성당이 있었고, 551년에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었으며, 1111년에는 훗날 예루살렘 십자군 왕국의 왕이 된 보두앵 2세(1118~1131)가 이곳을 점령하여 생 루이(St. Louis) 성채를 건설하였다. 또 1855년에는 기원전 5세기경 시돈의 왕 에슈문아자르(Eshmunaza)의 석관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잊혀졌던 시돈의 유적이 밝혀지기 시작하였고, 프랑스의 르낭(E.Renan)은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리스-로마 시대의 묘지를 발굴하였다. 1877년에는 기원전 6세기의 타브니트(Tabnit) 왕의 석관과 소위 "알렉산더의 석관"이라고 불리는 매우 아름다운 장식의 그리스 시대 석관들이 발견되었다. 1914년 이래 시돈 지역을 집중적으로 발굴한 프랑스의 콩테노(G.Cotenau)는 에슈문 신전과 바닷가의 소라 껍데기 언덕과 소라 양식장, 가마터 등이 있는 자주색 염료 공장 터를 발견하였다. 1924년부터 뒤낭(M. Dunand)은 미트라 신전과 에슈문 신전을 발굴하였고, 페르시아 시대에 확장된 시돈의 경계를 확인하였다. 오늘날 시돈의 대표적인 유적은 항구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아왈리(Awali) 하천변에 위치한 에슈문 신전인데, 이 신전 지역에는 로마 시대의 신전과 비잔틴 시대의 성당 유적이 함께 남아 있다. (-) 티로)
※ 참고문헌 G. Contenau, Mission archéologique a Sidon, 1914, Syria 1, 1920, pp. 198~229, 287~317/ F.C. Eiselen, Sidon : A Study in Oriental History, New York, 1907/ J. Elayi, Sidon, cité autonome de l'empire perse, Paris, 1989/ N. Jidejian, Sidon through the Ages, Beirut, 1971/ T. Kelly, Herodotus and the Chronology of the Kings of Sidon, 《BASOR》 268, 1987, pp. 39~56/ I.A. Khalifeh, 《OEANE》 5, pp. 38~41/ A. Poidebard . J. Lauffray, Sidon : Aménagements antiques du Port de Saida, Beirut, 1951/E.
Renan, Mission de Phénicie, Paris, 1864/ P.C. Schmitz, (ABD) 6, pp. 17~18. 〔金 聲]
시돈 〔히〕Т누 [그]∑18ciov [라 · 영]Si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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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시돈 항구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