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동부 연안에 위치한 국가로, 공식 명칭은 시리아 아랍 공화국(alJumhiniyah al-Arabiyah ash-Suriyah) . 북쪽은 터키, 동쪽과 남동쪽은 이라크, 남쪽은 요르단, 그리고 남서쪽은 이스라엘 · 레바논과 접경하고 있으며, 서쪽은 지중해와 접해 있다. 면적은 185,180km²(골란 고원 포함)이며, 인구는 14,950,00명((996)이고, 수도는 다마스커스(Damacus)s이다. 공용어는 아랍어이지만 프랑스어 · 쿠르드어 · 영어 등도 사용된다. 아랍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교는 없으나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교 신자들이고,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하다.
시리아는 기원전 64년 로마 제국에 의해 팔레스티나 지역과 하나의 주(州)로 병합된 뒤 300년경에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634년 무슬림들에게 점령되기전까지 황금기를 누렸다. 그 후 무슬림의 영향으로 언어 · 문화는 물론 종교까지 변화되어 현재까지 그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다마스커스 · 알레포(Aleppo) · 바그다드는 오랜 세월 동안 아랍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들로 인정을 받았고, 12세기의 십자군 운동 때에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로마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877년에는 이집트에 병합되어 6세기 이상 지배를 받았고, 1516년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철권 통치가 이루어진 약 300년 동안 시리아는 유럽 국가들의 상업과 선교로 개방되었는데, 이후 정치적인 간섭까지 받게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고, 1920년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1941년 독립을 선포하고 1943년에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1946년 무혈 쿠데타로 무너졌고, 이 정권 역시 1954년 쿠데타로 다시 무너졌다. 이 새로운 쿠데타 정권은 1958년 이집트와 연합해서 '통일 아랍 공화국' 을 건국하였는데, 이 정부 또한 1961년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그 후 1964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바트 군사 독재 정권이 집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회사] 성서에서의 시리아 : 시리아 교회는 사도 시대에 설립되었다. 38년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마스커스로 파견되었다가(사도 9, 1-2) 신비체험을 한 후 개종하였는데, 이때 도움을 준 인물이 다마스커스의 신자 아나니아였다(사도 9, 10). 이를 통하여 다마스커스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38년 이전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 다음으로 선교 활동의 중심지였던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지방 교회의 장로와 독립된 지위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또는 교사라고 불리던 선교사들이 있었다(사도 13, 1). 이곳 이방인들은 신자들을 경멸하는 의미에서 '크리스티아노스' (Xpnomowos)라는 명칭으로 불렀는데(사도 11, 26), 그리스도의 추종자' 라는 뜻의 이 용어는 그 후 그리스도교 신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초기 전승에 의하면 안티오키아 주교좌(主敎座)는 사도 베드로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또 사도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선교하기 위하여 안티오키아에서 파견되었으며(사도 13, 1-2), 사도 바오로는 전도 여행을 항상 이곳에서 시작하였다(사도 13, 4 : 15, 40 : 18, 22-23). 이는 시리아에서 에데사(Edessa)와 소아시아 지역으로 복음이 전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사도 후 시대 : 그리스도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로마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이에 시리아에서도 안티오키아와 다마스커스가 종교 활동과 선교의 중심지가되었고, 2세기경에는 모든 도시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또 이 시기에 시리아 교회는 부활 축일 논쟁(controversia de data celebrationis Paschatis)에 휘말렸는데, 안티오키아 교회가 유대교 월력에 따라 춘분과 부활 대축일을 정함으로써 로마 교회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논쟁은 325년에 개최된 제1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유대인들과 같이 부활 축제"를 지낸 교구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과 기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춘분 후 첫째 주일에 부활 축일을 지내야 한다고 결의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분쟁의 여지는 여전히 남았다. 3세기에도 개종자는 증가하여 해안 도시인 티로, 트리폴리, 비블로스가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티로는 이 도시들 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오리제네스(185~254)가 이곳에서 사망하여 묻혔고, 4세기 초의 박해 때에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또 3세기 중엽 이후에는 안티오키아의 주교가 주변의 주교들을 모아 교회 회의를 주재할 정도로 안티오키아 주교좌는 로마의 주교좌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 결정에 따라 교구 서열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 위치를 차지하였고, 칼체돈 공의회(451)에서는 로마 다음에 콘스탄티노플이 위치하게 되어 서열이 네 번째가 되었으며, 교구장을 총대주교(patiarcha)라고 부르게 되었다. 303년 디오클레시아누스(284~305) 황제의 박해 중에는 주교 · 신부 · 부제 등 성직자들로 감옥이 가득 찰 정도로 시리아 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으며, 박해 후 개최된 제1차 니체아 공의회에 22명이나 되는 시리아 주교들이 참석했을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2세기 중엽 아다이(Adda)가 시리아 동부의 에데사와 주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에데사에서 그리스도교 신학파가 형성되고 선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3세기 초에는 에데사의 선교사들을 통하여 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역에 위치한 두라에우로포스(Doaa-5mps)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곳에 세워진 성당의 일부가 현존하고 있는데, 이 성당은 그리스도교 고고학상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주요 신학 작품들과 신학자 : 사도 후 시대에 시리아 교회에서는 중요한 신학 저작물들이 쓰여졌다. 팔레스티나와 소아시아의 유대-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작품들과는 차이가 있지만, 《위(僞) 바르나바의 편지》 · 《디다케》 · 《이사야의 승천기》 ·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의 편지》 등이 대표적이고, 묵시 문학적인 작품들도 많이 발표되었다. 그노시스주의를 창시했다고 하는, 사도 행전 8장에 나오는 시몬 마구스의 제자 메난데르(Menander)도 1세기 말경 시리아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이후 시리아 지역은 그노시스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초기 시리아 신학의 인기 주제였던, 그리스도 지하로 내려감과 천사들 위로 올라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베드로의 복음》에는 그리스도 가현설이 엿보인다. 《베드로의 묵시록》, 《베드로의 설교》, (디다스칼리아)(Didacacala), 《사도헌장》(Constiutiomis Apostolicae) 등도 시리아에서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3세기 말경 창시된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요 신학자들로는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티오(Fusathins) , 다르소의 디오도로(2~394), 요한 그리소스토모(347-407),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350-428) 등의 교부들이 있었으며, 이단자로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네스토리우스(381~451) 역시 시리아 지역 출신이었다. 에메사(Emesa)의 주교였던 네메시오(Nemesius)는 5세기경 시리아의 대표적인 철학자였으며, 역사 기록을 남긴 안티오키아의 요한(Johnofntioch)은 7세기 초 시리아의 연대기 학자였다.
수도 생활 : 4세기 시리아에는 수도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집트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이들과는 생활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안티오키아와 서부 시리아의 산에는 은수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고, 요한 그리소스토모와 예로니모 역시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세기에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 즉 라우라(Laura) 수도 공동체와 주상(柱上, stylites) 수도자들이 등장하였다. 라우라 수도 공동체에서는 청원자들에게 일정 기간의 수련을 요구하였는데, 수련 기간 동안 은수 생활을 할 능력을 보이면 정식 수도자가 되어 각자 자기 굴이나 독방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혼자서 기도와 묵상과 노동으로 보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공동으로 전례 생활을 하였다. 한편 주상 수도는 시메온(388-459)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세속에서 좀더 이탈하려는 목적으로 기둥 위에 올라가 극기 생활을 하였다.
시리아 야곱파 교회 : 5세기경에는 그리스도론에 대한 논쟁으로 교회 내 분열이 급진전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하나의 성(性) 즉 신성(神性)만이 있다는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sismus)이 안티오키아의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러나 칼체돈 공의회가 이 주장을 단죄하자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하는 주교를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로 내세웠고, 이로 인해 한 지역에 두 명의 교구장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 역할을 주도한 사람이 야곱 바라데우스(Jacob Baradaeus, 500?~578)였기 때문에, 그리스도 단성설을 믿던 이들은 '야곱파' 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교계 제도를 만들어 운영하였으며, 무슬림들이 시리아를 정복한 뒤에는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법률과 재판을 통해 다스려지는 종교단체로 인정을 받았다.
1237년과 1247년 두 차례에 걸쳐 야곱파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일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결실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피렌체 공의회(1439~1443) 때 3명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중 1명과 시리아 정교회의 많은 주교들이 가톨릭 교회와 일치를 이루었고, 그 뒤 몽골족이 유럽으로 침입해 왔을 때 시리아 교회 내에서 가톨릭 교회와의 일치가 재거론되기도 하였다. 시리아 가톨릭 신자들의 수가 다수를 차지할 때도 있었지만, 이는 짧은 기간에 불과하였다.
1662년 알레포에서 시작된 카푸친회와 예수회의 활동으로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는 신자들이 늘어났으며, 1656년에 알레포의 주교로 선출된 시리아 가톨릭 교회의 아키드잔(A. Akhidjan) 신부가 1662년에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가 됨으로써 시리아에 동방 가톨릭 교회 총대주교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가 1677년에 사망한뒤 많은 탄압을 받았는데, 시리아 가톨릭 교회가 시리아 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갖고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은 1782년 알레포의 주교인 자르웨(M. Jarweh)가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로 선출된 이후부터였다. 가톨릭 교회로 돌아와 일치를 이룬 동방 교회들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만, 전례 예법과 성직자들의 규율 등에 대해서는 동방 교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시리아에 있는 동방 가톨릭 총대주교좌는 3(멜키트 예법 1 · 시리아 예법 1 · 마로니트 예법 1), 대주교좌 12(아르메니아 예법 1 · 마로니트 예법 2 · 멜키트 예법 5 · 시리아 예법4), 교구 3(아르메니아 예법 1 · 칼데아 예법 1 · 마로니트 예법 1), 대목구 1(로마 가톨릭), 수좌 대주교좌(exarchatus) 1개 등이다. 1996년 현재 전체 인구의 2%인 309,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있으며, 본당 204개에 총대주교 1, 대주교 18, 주교 4, 신부 248(교구 소속 174, 수도회 소속 74), 종신 부제 11, 수사 11, 수녀 395명이 있다. (- 다마스커스 ; 동방 교회 ; 동방 전례 ; 야곱파)
※ 참고문헌 M. Lacko, 《NCE》 13, pp. 894~895/ 2000 Catholic Almam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340/ (EB) 20, pp. 488-492/Anmurio Pontificio 1998, Città del Vaticano, 1998. [편찬실]
시리아 [영]Syrian Arab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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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