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치오 Siricius(~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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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치오 교황 .

시리치오 교황 .

성인. 교황(384~399). 축일은 11월 26일.
(생애와 활동] 로마에서 티부르시오(Tibutius)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교황 리배리오(352-366)에게서 부제품을 받았고, 교황 다마소 1세(366~384)의 부제들 중 하나였으며, 대립 교황이었던 우르시노(366~367)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84년 12월에 만장 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375~392)가 385년 12월에 당시 로마 집정관이었던 피니아노(Pinamus)에게 보낸 편지에도 시리치오가 만장 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고 적혀 있다. 황제는 우르시노파의 음모를 제거하기 위하여 385년 2월 25일에 발표한 칙서를 통해 그의 교황 선출을 인준하였고, 이듬해에는 바오로 대성전의 복원과 증축을 위한 기금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인준을 확실히 입증하였다.
교회의 규율 제시 : 385년 2월 11일 스페인 타라고나(Taragona)의 주교 히메리오(Himenius)에게 보낸 서한이 시리치오 교황의 첫 공식 교령이다. 히메리오는 교황 다마소 1세에게 교회 규율과 전례에 관하여 15개 항의 질문을 보냈고, 이 서한은 그 답장이었는데 여기에서 교황은 모든 교회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개종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재세례 금지, 부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만이 성인 세례를 위한 고유 시기라는 것, 이미 다른 이와 약혼한 여인과의 혼인금지, 참회 규율의 완화, 성품성사의 단계적 집전, 부제와 사제의 독신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교황은 이 규율들을 어길 때 파문을 내릴 것이므로, 히메리오가 스페인의 주교들뿐 아니라 인접 지역인 아프리카와 갈리아의 주교들에게도 통보하여 변명할 수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교황에 의해 개진된 이 규율들은 이미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나 사르디카(Sardica) 교회 회의(343), 다마소 1세가 주재한 로마 교회 회의 등에서 결정된 사항들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 교령에서 보여지듯이 모든 교회에 대한 권위와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교황이 결정한 것을 모두가 존중해야 한다는 신념은 교황의 활동, 특히 교회 회의를 통하여 드러났다.
교황은 여러 차례 교회 회의를 주재하였는데, 이 중에서 중요한 것은 386년의 교회 회의였다. 이 교회 회의를 통해 채택된 9개 조항들을 교황은 아프리카와 다른 교회에 보내 준수하게 하였다. 이 조항들 중 특히 주목할 것은, 사전에 교황청의 인준을 받지 않거나 서품 집전자가 한 명일 경우에는 주교로 성성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교황은 서품 지원자들의 생활을 우선적으로 조사하여 군인이나 공무원 등은 후보자에서 제외하며, 선임 교황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성직자들의 군대 징집에 대한 거부 등도 규정 지었다. 그리고 갈리아 주교들이 질문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답변하였다. 즉 동정 서원을 한 이들이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 엄격한 참회 기간을 부여하는 규정과 주교 · 사제 · 부제들의 독신제 준수 및 혼인법 문제와 성품성사, 주교들이 다른 교구의 문제에 간섭하는 것에 대한 금지 등이었다.
마니교에 대한 반대 : 교황은 열성적으로 이단과 투쟁하였는데, 이러한 교황의 열정은 갈리아 지방 막시무스(M.C. Maximus, 383~388)와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드러났다. 교황은 막시무스에게 서한을 보내 가톨릭 신앙을 보호할 것을 권고하였으며, 이단의 혐의를 받고 있으면서도 서품을 받은 아그리치오(Agicius) 문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였다. 막시무스는 교황에게 보낸 답신에서 참된 신앙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신의 염원을 밝히면서 이 문제를 성직자들의 회의에 맡기고, 갈리아 지방의 마니교 신자들에 대한 반대 조치를 이미 취했다고 밝혔다. 이 답신에서 마니교 신자들은 프리실리이누스주의자(Braclianismus)들로, 당시에는 마니교 신자라고 불렸다.
교황은 로마의 마니교 신자들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그래서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는 교황이 마니교 신자들을 발견하면 유배형에 처하였고, 그들의 더럽혀진 입으로 주님의 몸을 모시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이유로 이들이 신자들과 통교하는 것을 금하였다고하였다. 이는 당시의 마니교 신자들이 교회의 영성체에 참여하였다는 관습을 암시하는 것이다. 결국 마니교에서 개종한 이들은 수도원으로 보내져 영성체는 못하고 기도와 단식을 하며 살다가, 죽을 때에 조사를 받고 영성체를 할 수 있다고 인정이 되면 노자 성체를 베풀어 줄 수 있다고 하였다. 다른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교황 에우세비오(308~309/310)가 정한 것처럼, 화해 예식을 거행하기 전에 참회 기간을 갖도록 재천명하였다.
동정과 성모 마리아에 관한 이단 반박 : 390년에 시리치오 교황은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저명한 평신도인 팜마키오(Pammachius)와 빅토리노(Vicomins)의 설명을 듣고 밀라노의 수도자 요비니아누스(Joviniam)와 8명의 추종자들을 단죄하였다. 이 수도자들은 말이나 글로 동정 상태가 결혼의 상태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동정성의 가치를 부정하였고, 참회와 단식 또한 무익하다고 설파하였다. 아울러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출산한 이후에는 동정녀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교황이 이들을 단죄한 것은 이들이 이미 동정 서원을 한 이들을 결혼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교황은 이들에 대한 판결문을 다른 주교들에게도 통지하였는데, 이 중에는 이들이 황제의 보호를 희망하면서 피신해 있던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340-397)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교황은 3명의 사제를 밀라노로 파견하여 밀라노 성직자들에게 보내는 교황의 서한을 전달하게하였다. 이 서한에서 교황은 이 이단에 대해 로마에서 처리한 내용을 전하면서 밀라노에서도 그와 같이 하도록 하였다. 이 서한은 "지금껏 교회의 신비에 반대하여 이처럼 짖어 댄 개들은 없었다"라는 등 온갖 욕설로 가득차 있었다.
암브로시오는 자신이 소집한 밀라노 교회 회의에서 요비니아누스를 단죄하였고, 이를 교황에게 통지하면서 '스승이요 박사' (maestro e dottore)라고 교황을 칭송하였다. 그는 이 서한에서 교황이 수위권을 갖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우리는 교황의 서한에서, 착한 목
자가 깨어 지키고 있는 모습과 자신에게 맡겨진 문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그리고 성실하게 그리스도의 양 떼를 보호하는 자세를 보기에, 주님의 양 떼가 듣고 따라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로니모(343-420) 역시 <요비니아누스를 거슬러>(Adversus Iovinianum)라는 단 편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마리아론에 관한 이단을 쉽고도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었다.
391년에 열린 카푸아(Capa) 교회 회의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 이외에 다른 형제들을 낳았기에 영원한 동정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다른 오류들도 저지른 나이수스(Naissus)의 주교 보노소(Bonoso)에 대한 판결이 일리리꿈(mimicum)의 주교들에게 맡겨졌다. 주교들은 교황에게 결정을 요청하였고,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해 확언한 뒤 교회 회의가 주교들에게 위임한 것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해 조사하여 판결문을 선포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로마 총대주교좌의 일부를 일리리킴의 주교들이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주교들과 교황은 특별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 지역이 제국의 행정 문제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영향력하에 놓일 위험이 있었는데, 이미 교황 다마소 1세는 데살로니카의 주교 아콜리오(Acholins)를 자신의 대리자로 임명하여 특별 권한을 부여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었다. 시리치오 교황 역시 데살로니카의 주교 아니시오(Amyius)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를 자신의 대리자로 임명하여 지역 주교들을 성성할 수 있는 권한과 주교 선출이나 서품 문제에서 온갖 비규정적인 문제들을 막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아울러 교황은 멜레시아누스(Melaians) 이단으로 갈라져 있던 안티오키아 교회에 성공적으로 중재하였다. 그래서 팔레스티나의 가이사리아 교회 회의에서 에바그리오(Evagrius) 대신 플라비아노(Favianus)를 합법적인 주교로 인정한 것도 교황의 조언에 힘입은 것이었다.<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교황은 재임 기간 동안 5번의 서품식을 통해 32명의 주교와 31명의 사제, 그리고 16명의 부제를 탄생시켰다. 390년에는 바오로 대성전을 개축하고 봉헌하였으며, 성 푸텐치아나(St. Pudenziana) 성당과 성 글레멘스 성당을 확장하여 대성전(basilica)으로 개축하였다. 399년 11월 26일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산 실베스트로(San Silvestro) 성당에 있는 프리실라(Priscilla)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그 후 교황 파스칼 1세(817~824)에 의해 프라세데(Prassede)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평가와 의의] 6통의 편지로 구성된 교황의 저서가 그의 인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데, 교회 규율을 적용하는 데에는 엄격하였고, 보노소 문제에서는 다른 교회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으며, 안티오키아 교회에 대해서는 중용과 현명함을 보였다. 세비야의 이시도로(560?~636)는
교황을 '지극히 분명한 교황' (clarissimus pontifex)이라고 평하였다. 또한 교황의 서한은 동정성의 의미를 개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모든 교회의 의무' (sollicitudo ommium ecclesiarum)라는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선임 교황 다마소 1세 때와는 달리 시리치오 교황에게서 는 조언자라는 위치를 얻지 못했던 예로니모는, 교황이 그저 평범한 인물로 자신의 단순함을 기준으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교황 시리치오의 묘지에는 "검소하고 수줍음을 타며, 자유롭고 온정적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교황" 이라고 새겨졌다. 교황의 이름은 《예로니모 순교록>(Matirologium Hieronymus)과 7세기의 《잘츠부르크인의 여정》(itinerario Salisburense)에도 나온다. 교황은 일찍부터 성인으로 공경되었지만, 《로마 순교록》(Matytrologium Romanum)에는 1748년에 시치리오 교황의 성덕에 관한 논문을 저술한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에 의해 비로소 수록되었다. 이는 교황에 대해 비판을 가한 예로니모와 놀라의 바울리노(353-431) 때문이었다.
비교적 평온한 시대에 교황직을 수행하였지만 역동적인 활약을 보인 시리치오 교황은, 자신의 사목적 배려를 모든 교회로 연장하여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지 중재 역할을 하였고, 이미 이론상으로는 인정된 것이나 존중되지 않던 수위권을 실질적으로 실현시켰다. 교황은 다른 이의 자문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교회에 대한 법을 제정하고 자신의 결정 사항들이 충실히 준수되도록 명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즉 그의 서한에서도 보여지듯이, 교회 회의의 결정 사항이나 법령들과 같은 권위를 지니는 교령을 반포한 첫 교황이었다. 또한 보편적인 아버지라는 의미를 지니는 교황의 호칭인 "빠빠" (papa)라는 말을 처음으로 채택한 교황이기도 하였다. 시리치오 교황은 교황권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 참고문헌  L. Duchesene, Le Liber Pontificalis, Texte, Introduction et Commentaire, ed. E. De Boccard, Paris, 1955/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Popes, Oxford Univ. Press, Oxford, New York, 1986/ A. Lopes,I Papi, La vita dei pontefici attrcverso 2000 anuni di storia, Futura Edizioni,Roma, 19971 L. Tripepi, Ritratti e Biografie dei Romami Pontefici, Tipog-rafia della Pace, Roma, 1879/ É. Amann, (DTC) 23, pp. 2171~2174/ A.Amore, (EC) J. Barmby, (DCB》I B. Studer, (DPAC》/ Ghislaine de Senneville-Grare, Dizionario Storico del Papato, diretto da Philippe Levillain, Traduzione di Francesco Saba Sardi, Bompiani, Milano, 1996/ V. Monachino, Bibliotheca Sanctorum, Istituto Giovanni XXIII della Pontificia Università Lateranense, Roma, 1968. 邊宗宗燦]